#120
“괜찮습니까?”
그냥 갈 수도 있었지만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자 걱정 어린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그 말을 내뱉자마자 괜히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조금 후회하긴 했지만,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헌터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곧 다시 움직이려 몸을 돌렸다.
“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아. 정시현입니다.”
“감, 감사합니다. 혹시 협회 직원이신지,”
시현은 바빠 죽겠는데 제 예상대로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름을 밝힌 뒤 땅을 박차고 올랐다. 그리고 다행히 헌터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시현이 움직이자 쏙 입을 닫았다. 시현은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작게 내뱉곤 바로 하늘을 향해 튀어 올랐다.
[누굽니까?]
그러자마자 붉은 눈과 마주쳤다. 일반인이라면 절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을 거리였지만 시현의 눈에는 아주 잘 보이는 거리에 태운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라고 할 만큼 전음이 머리를 파고들어 왔다.
태운은 열심히 움직이던 것도 멈추고 땅 위에 꼿꼿하게 서서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개미들은 태운이 주변을 장악한 내기를 응집시킬 때마다 갈려 나가고 있었다. 그냥 검을 휘두르거나 하는 것보다 더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신위였다.
시선은 제가 하늘 위로 점프했다가 느리게 바닥으로 떨어지며 검을 휘둘러도 변함이 없었다. 조금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시현은 열심히 움직이면서 급히 전음을 보냈다.
[몰라. 그냥 죽을 것 같아서 도와준 거야.]
[아하, 그렇구나.]
또 칼같이 대답이 들려왔다. 목소리는 평소와 딱히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는데도 괜히 심장이 조였다. 시현은 자신이 대체 왜 이러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딱 떨어지게 돌아온 대답이 신경 쓰여 전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응, 진짜 모르는 사람.]
괜히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이 없자 점점 더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시현의 검로도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 검에 맞서고 있는 개미들에게는 더 안 좋은 소식이었다.
급한 마음이 투영되듯 검을 감싸고 있는 검강이 한번 확 하고 타올랐다. 그러자 칼날에 깔끔하게 잘려 나가던 개미들이 반쯤은 찢긴 듯한 흔적을 남기며 빠르게 절명하고 있었다.
토벌의 속도가 빨라지니 주변에 있던 헌터들이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시현의 무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조용하고 빠르게 처리하려 했으나 이미 물 건너갔다는 뜻이었다.
이 전투 현장의 양 끝에 있던 시현과 태운이 빠르게 중앙으로 이동했다. 전투는 이제 완전히 헌터들의 승리라고 봐도 될 만큼 거의 다 끝나 가고 있었다.
“태운아!”
시현은 물론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는 거의 바로 앞이라고 할 수가 있을 만큼 가까워진 태운의 이름을 외쳤다. 딱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건만 괜히 그랬다.
그러나 그 목적도 없었던 외침이 끝나자마자 ‘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여전히 일렁이던 알파 구역 경계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운의 검이 거의 마지막 무리라고 할 수 있는 10여 구의 개미 몸통을 절반으로 갈라 냈을 때였다.
드드드드-
마치 천둥소리 같기도 한 소음이 주변을 장악했다. 그와 동시에 경계에 밀집된 기운이 진해지고 울렁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기 전 시현이 제 존재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민했던 그것과는 궤를 달리할 정도로 강한 움직임이었다.
순간 방금까지도 전투로 인한 광기와 소음으로 가득 찼던 장소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미친, 이건 또 뭐야.”
말이 경계였지 마치 게임처럼 땅에 무언가 선이 그어져 있다든가 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 일정 경지에 올라와 있지 않다면 저것을 경계하고 쉽게 느끼기도 어려울 것이었다. 그만큼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는 장막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랬던 경계가 점점 모양을 갖춰 가고 있었다.
마치 검은색이 첨가된 색유리 같았다. 경계는 마치 알파 구역을 보호하듯 돔 모양으로 생성되고 있었는데 얼핏 단단해 보이다가도 어떨 때는 울렁이고 있어 젤리 같아 보이기도 했다.
특히나 시현이 있는 곳. 그 부분이 심하게 울렁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느꼈던 그 현상이 정말 가시적으로도 보인다는 뜻이었다.
그때, 당황하고 있던 시현의 얼굴이 점점 무섭게 굳어 갔다.
‘제기랄, 저거 움직이잖아.’
경계가 아주 느리게 팽창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몬스터의 기운이 깜빡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위치는 알파 구역 안, 시현은 입술을 콱 깨물었다.
한 치도 망설일 새가 없었다. 시현은 급히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외쳤다.
“당장 저 경계에서 떨어져! 뒤로 물러나세요!”
벼락같은 목소리였다. 내공이 담긴 목소리는 강한 힘을 가지고 멍하게 경계를 바라보고만 있는 이들의 정신을 깨웠다.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은 인원도 아니었다.
헌터들은 다 죽어 가는 개미들의 사체 사이에 멍하니 서 있다가 시작 총성이라도 울린 듯 흠칫하더니 급히 몸을 돌려 뒤로 뛰기 시작했다. 그 외침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보고 따를지 말지 정하고 하는 사고의 흐름은 필요 없었다. 사실 누가 봐도 점점 변해 가는 경계는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온갖 이동 마법들과 기술들이 펼쳐지며 사방으로 특수효과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은 홀로, 또는 단체로 계속해서 경계와 떨어져서 멀리 이동했다. 나름 지금까지 살아남은 만큼 빠릿빠릿한 움직임이었다.
시현 또한 멍하니 있지 않았다. 시현의 눈이 급하게 움직였다. 제가 곧바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오는 태운과 유준, 규민. 그리고 다른 헌터들까지.
일단 태운에게 전음을 던져 상처를 입거나 크게 다쳐 움직일 수 없는 이들을 부탁했다.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더 앞에 가 있던 규민과 유준에게 빠르게 접근해 몸통을 낚아채고 경공을 펼쳤다. 급하게 움직이는 내공이 혈맥을 쿵쿵대며 뛰어다녔지만, 시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저 경계가 움직이고 있어. 당황하지 말고 가서 사람들 통솔해서 물러나세요.”
시현은 놀란 유준과 규민이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짧게 현 상황에 대해 말해 주고는 어느 정도 경계와 떨어진 위치에 둘을 내려놨다.
유준도 그랬지만 규민은 예전처럼 속이 안 좋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땅바닥에 닿는 다리마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튼튼했다. 정말 강해졌다고 하는 감상이 들었다 금세 사라졌다.
“형은요?”
시현의 시선이 점점 팽창하며 넓어지는 걸 보다가 다시 규민과 유준에게로 돌아왔다.
“일단 못 움직이는 사람들 좀 최대한 데려와야지.”
“형! 안 돼요! 지금 같이 뒤로 물러나요. 저게 어떻게 움직일 줄 알고요.”
맞는 말이었다. 지금이야 저렇게 느리게 움직이고 있어 괜찮았지만, 갑자기 제가 낼 수 있는 속도를 뛰어넘어 빠르게 움직인다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몰랐다. 무엇보다 저 경계에 닿았을 때, 경계 안에 들어갔을 때를 조금도 예상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목이 찢어지도록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절규하고 있는 이들을 모른 척하기가 힘들었다. 자꾸만 저 절규들이 머릿속을 헤집는 것 같았다.
“나도 적당히 할 수 있을 만큼만 하고 튈 거야. 무리 안 해.”
시현은 지금도 제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사람들을 개미 사체들 사이에서 쑥쑥 뽑아 와서 멀리 옮기고 있는 태운을 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일단 보이는 것만.’
시현은 눈에 내공을 담아 주변을 슥 돌아보곤 태운과 조금 떨어진 곳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다음은 부상자들의 혈로 지공을 흩뿌려 점혈하고 무 뽑듯 뽑아낸 뒤 등 뒤로 둘러메 뛰었다.
내공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물론 아직 무리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최근 들어 이런 속도로 사용한 건 처음이라 조금 위기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시현은 다시 한번 저 앞에까지 나아가서 반쯤 삶을 포기한 듯 엉엉 울고만 있는 헌터를 들쳐 올리고는 다시 움직였다.
시현과 태운이 움직일 때마다 온갖 부상자들과 기절한 사람들이 빠르게 모여들었다. 그리고 처음에 보고만 있던 생존자 무리들이 조금씩 나서서 시현과 태운을 돕고 있었다.
“치료할 수 있는 자들은 빨리 치료하고, 속도에 자신 있는 분들은 생존자 구출 부탁드립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얼타고 있긴 했지만 그들 또한 몇 번의 전투를 겪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수습은 빠르게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현은 다시 한번 데리고 온 부상자 셋을 내려놓으며 그 장면들을 볼 새도 없이 다시 저 경계를 향해 움직였다.
팽창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이루어지진 않았으면 하는 현상이었다.
‘씨발. 어쩌면 안 좋은 생각만 이렇게 칼같이 이루어지냐.’
하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생각보다 헌터들이 빠르게 정신을 차렸고 빼는 거 없이 열심히 돕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좆같은 일이 일어났었다는 걸 시현은 떠올리지 못했다.
“스승님!”
시현의 귀로 전음이 아닌 육성이 들려왔다. 태운의 목소리였다. 시현은 제 눈앞에 있던 기절한 헌터를 들어 올리려다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 굳은 표정과 작게 깨문 입술.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생겼다는 표정이었다. 시현은 그제야 지금 본인들이 처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시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태운의 힘이 사라지고 움직였을 때의 속도와 저 경계가 팽창하는 속도. 당연하게도 제 도움이 없을 경우 태운은 맨몸 상태로 경계와 맞닿을 거다.
순간 시현의 입가로 절로 거친 말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