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시현은 마음껏 실력을 발휘했던 아까와는 달리 검을 직접 손에 쥐고 휘둘렀다. 그러자 갑자기 나타난 타깃에 우왕좌왕하던 개미들 백여 마리가 단번에 두 동강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까처럼 저를 막을 만한 사람도 없었고 빠르게 이동하지 않아도 되니 내공을 과하게 써서 이기어검을 쓸 필요가 없었다. 물론 손맛이 다르기도 하고 말이다.
시현은 씩 웃었다가 이내 흥건히 묻은 피를 검을 휘둘러 털어 내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앞은 그 덕에 마치 누가 카펫이라도 깔아 놓은 듯 깔끔하게 길이 만들어졌고, 갑자기 동료들이 사라지자 당황하며 망설이는 개미들 덕에 발목 잡히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갈 수가 있었다.
시현은 저 멀리 한군데에 못 박힌 듯 서서 계속 총을 기관총처럼 쏴 대고 있는 유준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그새 키가 조금 컸는지 겨우 가슴팍까지나 오던 꼬맹이가 이젠 턱까지는 오는 것 같아 제 옛날 모습도 생각나고 새삼 신기했다.
“유준,”
철컥-
그러나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간 순간. 앞으로 보며 총을 쏘던 유준이 몸을 홱 돌려서 곧바로 시현과 태운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었다.
시현은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이었으나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총구를 쳐 내고 펄쩍 뛰어올라 빠르게 한 걸음 다시 물러났다.
“어?”
“서유준.”
“어라? 형? 시현이 형? 진짜 형이에요?”
유준의 얼굴은 아주 가관이었다. 개미들의 체액이 하필 파란색이어서 그런지 얼굴과 머리를 적시고 있는 모양새가 꽤 기괴했다. 게다가 그런 얼굴로 저를 보며 환하게 웃자 조금 더 낯설어졌다.
“그럼 나지 누구겠어.”
유준은 눈을 잠시 크게 뜨고 몇 번 호흡을 급히 몰아쉬더니 이내 치아가 보이도록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손은 몇 번이나 쉬지 않고 사방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지만, 무척이나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혀엉!!!!”
마치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라도 된 듯 우다다 달리기 시작하는 유준은 양손의 총도 번거롭다는 듯 허공에 던져 버리고는 냅다 팔을 앞뒤로 움직이며 빠르게 달려왔다. 그리고 한 걸음 정도 거리가 남았을 때 땅을 박차고 안겨들듯 점프했다.
덥석.
그러나 유준의 격돌은 시현의 품에 닿기도 전에 제지당하고 말았다. 범인은 당연하게도 태운이었다. 점프하자마자 잡힌 목덜미에 목이 콱 졸려진 채로 떨어져 나온 유준은 몇 번 캑캑대더니 방금과는 다르게 표정을 급격하게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반응이 조금은 과해 마치 적이라도 만난 듯 살기를 뿌려 대니 그 상황을 보고 있던 시현이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어, 저거 잘 안 봐주는데.’
그리고 걱정이 밀려왔다. 지금 전투하는 걸로 보아 그동안 꽤 강해진 것 같았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태운에게 대적할 만한 건 안 됐다. 그리고 태운은 조금, 그러니까 아주 조금 특정 상황에 민감해서 제게 공격성을 보인 이를 봐준 적이 없었다.
시현은 급히 손을 들어 올려 상황을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전에 이미 태운의 내기가 울렁울렁 피어 나와 유준의 살기를 먹어 치우고 있었다.
“어?”
유준도 그걸 느꼈는지 조금 멈칫하더니 아주 잠시 태운을 바라보다가 사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 순간 돌아 있던 푸른 눈이 점점 가라앉더니 원래의 검은 눈동자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거 아주 개새끼가 따로 없군.”
“어…. 안녕하세요…?”
순식간에 기운이 모두 수그러들었다. 유준은 여전히 목덜미가 잡힌 채로 눈을 끔뻑끔뻑하더니 곧 태운을 알아본 듯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시현은 당장 뛰쳐나가려던 몸을 바로 세우고 멍하니 급변한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뭐야.
미국에 간 뒤로 게이트가 터졌고 그 안에서 한 달을 지냈다. 그 이후로도 두어 번 통화를 한 게 다였을 뿐 또 몇 주를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거의 두 달여를 떨어져 지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게 또 엄청나게 긴 기간은 또 아니었기에 시현은 얘가 왜 이렇게 변했나 혼란스러워졌다.
‘얜 왜 이렇게….’
그때 옆에서 또 다른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아리처럼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형님! 형니임!!! 흐어어엉….”
지금 상황에 저를 형님이라고 꼬박꼬박 부르며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이는 자는 한 명뿐이었다. 시현은 누가 봐도 알 것 같은 한 사람의 외침에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에서 사방으로 종이를 찢어 좍좍 뿌려 대고 있는 규민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이곳에 오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새였지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개미들을 단번에 밀어 내긴 힘든지 여전히 둘러싸여 움직일 수는 없어 보였다.
“저만 빼고 무슨 얘기 하시는 거예요!!! 안 돼요!!! 나 빼놓지 마!!!”
그러나 여전히 입은 살아서 우렁차게 말하는 걸 보니 걱정은 눈 녹듯 사라지고 한숨만이 남았다. 생각해 보면 규민은 처음에도 본인이 죽을 위험 앞에서 살려 달라 하기는커녕 냄새난다고 고함을 빽빽 지르던 사람이었다.
시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콱 움켜쥐었다. 그리고 멀리서 안달나 있을 규민을 위해 목소리에 내공을 실었다.
“일단… 이것부터 처리합시다. 그리고 그때 얘기하죠.”
“네….”
태운이 고개를 끄덕였고 규민이 신나게 몇 번이나 좋아요를 외쳤다. 그리고 눈이 까맣게 돌아온 유준이 마지막으로 기어들어 가듯 대답을 해 왔다. 이제야 대충 유준의 능력이 파악됐다.
‘능력 때문에 무언가 영향을 받나 보군.’
시현은 그런 유준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은근히 눈치를 보고 있던 유준 또한 당연하단 얼굴로 있는 시현에 한시름 놨는지 몰래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렸다. 시현은 그것도 다 눈에 보였지만 모른 척하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유준이 양손 안으로 아까 허공에 던져 사라졌던 총이 구현화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다시 개시될 전투의 시작이었다.
그동안 유준이 열심히 죽여 댄 덕에 꽤 넓은 반경의 공간이 비어 있었지만 조금 대화를 한 그새 개미들은 쉬지 않고 가까운 곳까지 들이닥쳐 있었다. 시현은 이제는 발을 움직여 다시 앞으로 나아가며 아까보다 더욱 신나게 총을 갈겨 대는 유준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제 경지에 따로 기수식을 할 필욘 없었지만, 시현은 습관적으로 검을 뻗어 들고는 횡으로 몇 번 긋고는 다시 아래로 자연스럽게 내려트렸다. 전투를 하기 전 습관 같은 거였다. 평소라면 여기서 끝이었겠지만 시현은 이번에 하나를 덧붙였다.
“웬만하면 다치지 말고, 다 끝나면 제대로 인사합시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모두의 귀에는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돌고 돌긴 했지만 결국 이렇게 모여서 모두와 함께 전투하게 됐다. 그간 동료라곤 태운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태운은 동료보단 제가 지켜야 하는 존재에 조금 더 가까웠다. 물론 함께 움직이던 부하들이나 협조자들이야 계속 있어 왔지만 이렇게 제 모습을 온전히 보여 주고 편하게 지낸 이들은 처음이었다.
기분이 뭔가 조금 이상했다. 불안감 같기도 하고 뭔가 충만하게 들이차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 그때 손아귀로 따듯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시현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제 손을 잡고 있는 태운을 바라봤다.
“너도, 진짜 다치지 말고 몸 이상하면 피하고.”
“약속하겠습니다.”
대답은 조금의 텀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들려왔다. 시현은 그제야 이러저러한 불안감을 내려놓고 힘차게 검을 들며 앞으로 뛰어올랐다.
흰색 검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붉게 일렁거리던 검강이 훅 하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그리고 마치 기체가 고체화되듯 순식간에 단단한 모양을 갖추더니 대각선으로 휘둘러지는 검결을 따라 앞으로 길게 뻗어 나갔다.
개미들은 종잇장 찢기듯 너무도 손쉽게 잘려 나갔다. 아무리 여러 겹 촘촘하게 모여 있다고 해도 종이는 종이였다. 잘 갈려진 칼에는 어쩔 수가 없었던 거다.
시현은 다시 한번 몸에 회전을 주며 이번에는 왼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마치 같은 영상을 또 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사방으로 푸른 피가 쏟아졌지만 붉은색이 아니라 그런지 별다른 감흥도 주지 않아 더 그렇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 전투의 속도가 빨라졌다. 아니,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물론 유준과 헌터들이 선방하고 하고 있긴 했지만, 그들이 그걸 다 감당하기엔 범위가 너무 넓었다. 저것들의 특성이 눈에 보이는 목표물부터 모조리 처리하고 넘어가는 단순한 것이 아니고 무조건 넓게 퍼져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거였다면 꽤나 곤란해졌을 법한 상황이란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중심에서부터 양쪽으로 뻗어 나간 시현과 태운의 힘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적은 약했지만 그만큼 물량 공세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것도 시현과 태운에겐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대략 한 시간이면 다 정리되겠군.’
시현은 한 손으론 검을 휘두르고 다른 한 손으로 장을 내뿜어 양쪽으로 바글거리는 개미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고 다시 다리에 힘을 주어 튀어 올랐다.
사실 시현도 이곳을 빨리 정리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일행들과 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평소에 길게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방이 피가 튀고 고함 소리가 난무하는 상황이었지만 시현의 입가에는 작게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