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유자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헌터란다-117화 (117/146)

#117

사방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괴성과 비명, 고통에 찬 신음들이 개미들이 내는 쉬쉿거리는 소리가 한데 뭉쳐 주변을 어지럽혔다.

기가 세지 약한 사람이라면 듣는 것만으로도 질려서 움직이기 힘들 만큼의 치열한 소리였다. 물론 시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대로 앞을 뚫을게.”

“예.”

시현과 태운의 움직임은 그 뒤엉킴을 앞에 두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다시 새가 날듯 무척이나 가벼워졌다. 개미들이 우르르 포진해 있었지만, 발걸음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두 발바닥이 지면에서 조금씩 미끄러지며 마찰음과 동시에 모래가 튀어 오르고, 태운과 시현의 몸이 떠올랐을 때. 그곳에 인영은 없고 붉은빛만이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단 뭉쳐 있는 곳부터.’

저 멀리에 있던 붉은빛이 마치 순간 이동 하듯 번쩍이며 개미 무리가 가장 많이 뭉쳐 있는 곳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레이저처럼 주욱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사람의 움직임으로 인해 생긴 거라곤 믿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아무래도 절대적인 숫자 자체가 헌터들에 비해 두세 배가 넘어가는 상황, 다들 목표를 처리하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지만 그만큼 뒤쪽은 정체되어 아등바등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그 끝에서부터 개미들에 믹서기에 갈리듯 와르르 갈려 가고 있었다.

검은 갑피의 번들거림과 붉은빛, 그리고 흰색 줄기가 이리저리 엉겨들었다.

개미들은 제 운명도 모르고 계속해서 덤벼들다가 그렇게 순식간에 죽어 나자빠지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 개미 무리를 처리할 때 멈춰 서서 상태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움직였다지만 이제는 저것들과의 수준 차이를 정확히 알았으니 망설일 것도 없었다.

‘남은 것은… 32마리.’

시현의 발이 평지를 달리며 개미 무리의 외곽을 깎아 내다가 이제 거의 다 쳐 냈을 즈음, 앞에 보이는 개미 사체들의 산을 턱턱 밝고 올라갔다. 그리고 저 앞에 보이는 바위를 향해 몸을 띄웠다가 가볍게 착지하곤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곧바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철컥.

그사이에 헌터들이 힘겹게 벌이던 전투가 끝났다. 그리고 할 일을 마친 검이 그새 검집으로 돌아와 쏙 들어갔다. 힘겹게 이어 갔던 전투가 고작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이 허무할 법했지만 처음에 지나쳐 왔던 이들과 같이 그저 살아남은 것에 행복해할 뿐이었다.

시현은 환호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올 정도로 멀어지자 그제야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렸다. 와글와글 모여 제 앞길을 막고 있는 또 다른 무리가 있는 곳을 향해 곧바로 뛰어들었다. 태운 또한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뒤 데칼코마니처럼 움직여 시현과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곧이어 다시 한번 몇 번의 검결이 사람들과 뒤엉켜 있는 개미무리 절반을 꼬치 꿰듯 꿰어 버리고 수십 개의 탄지가 쏘아져 나가 몬스터의 내장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머리 가슴 배로 나뉘어 있던 개미들이 레고 풀어지듯 부분부분 와르르 떨어져 나오고 터지며 사방을 체액으로 적셨다.

‘이제 전방과 꽤 가까워진 것 같은데. E등급뿐만 아니라 이따금 C나 B 정도의 등급도 보여.’

또 한 개의 무리가 격파당했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벌써 세 개의 무리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때쯤 시현은 계속해서 달리던 발을 멈추고 잠시 멈춰 서서 상황을 복기했다.

일단은 점점 상위 등급의 몬스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말은 전방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원래라면 대략 5분여만 달려서 도착할 수 있었던 곳. 하지만 지금은 겨우 예상했던 것의 절반 정도만 도착했을 뿐이었다.

아무리 시현과 태운이 강하다곤 하나 끝없이 나타나는 개미 무리, 사체들로 만들어진 천연 저지물들이 발걸음을 조금씩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태 꽤 달린 것 같은데 목표 지점이 보이지도 않는다니 의아한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다 내팽개치고 가는 건 조금 그러니까.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될 일이야.’

시현은 조금 더 내공을 끌어올리면서 얼굴을 굳혔다. 말 그대로 조금 늦었다고 눈앞에 보이는 것까지 모른 체하기엔 영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퇴각로도 있으면 좋으니까….’

그렇게 제가 한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할 만한 핑곗거리를 하나 더 덧붙인 시현은 머리를 슥 쓸어 올리고 갑자기 다 죽어 나자빠진 개미들을 피해 모이기 시작하는 헌터들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중간쯤에 머물고 있던 이들인 만큼 제 도움이 늦었고 그로 인해 사망자가 꽤 있어 보였다.

조금 입맛이 씁쓸했지만, 어차피 제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모든 이를 구할 수 없다는 건 진작 깨달은 부분이기에 큰 미련이 남진 않았다.

시현은 잠시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내 발을 굴러 다시 앞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량차오샤와, 이 사달의 주동자인 외부의 존재들을 향한 분노가 조금 더 커져 있었다.

***

다행히도 목표 지점에는 금세 도착했다. 사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아주 조금 늦어졌을 뿐 10분도 걸리지 않아서 그 세 개의 무리를 격파하고 전방으로 향하는 길 끝에 다다라 있었다.

시현은 그제야 제 피부가 얼얼해질 정도로 울리는 몬스터의 파장과 꽤 강력한 헌터들의 기운을 느끼곤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이제 가시권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익숙한, 그리고 반가운 기운들과 함께 아주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대체….”

저 앞에서는 까만 형태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어 마치 작은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은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놀라운 게 아니었다.

어느 한 구간, 힘겹게 전투를 이어 가고 있는 곳들과는 달리 몇몇 군데에서의 전투는 아주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해결되어 가고 있었다.

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죄다 바람구멍이 나서 저 멀리 나자빠지고 있는 수십 수백 마리의 개미들이 그대로 비 오듯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무언가 음속으로 날아가는 듯한 소리가 두두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물론 얼마 크지 않은 반경의 범위긴 했지만 얼핏 보면 시현과 태운이 오면서 개미들을 작살낸 속도에 비견될 정도였다.

시현은 지금 이 상황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약한 개체들이 먼저 넘어왔다곤 해도 C, B급 정도의 몬스터가 이렇게나 모여 있다니 충분히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평범한 가정을 다 깨부수고 헌터들은 너무나 잘 싸우고 있었다.

까만 갑피로 둘러싸인 개미들이 셀 수 없이 바글바글했다. 하지만 그만큼 아주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제야 시현은 제가 여태 본 무리가 아주 소규모의 정찰대였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거… 설마 유준이야…?”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의 중심에 유준이 있다는 것을 그제야 머리가 받아들이고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하! 바보들! 병신들!”

유준은 눈에 띄게 활약 중이었다. 아니, 활약이라기보단 뭐랄까. 조금 이상했다.

왜, 왜 저렇게 웃고 있지?

양손에 조금 반투명해 보이는 거대한 총을 들고 자유자재로 난사하는 유준의 양쪽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서 기분 좋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휘몰아치는 기파와 바람에 흰머리가 휘날려 늘 가리고 있던 눈이 드러났다. 이미 푸르게 변한 눈 또한 즐겁다는 듯 반달로 접혀 있는 게 보였다.

급히 달려온 것도 잊고 멍하니 서서 그 상황을 바라보던 시현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고개를 돌려 태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거…. 유준이 맞지?”

“아무래도.”

태운 또한 지금만큼은 꽤나 의외였던 건지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대답이 돌아왔다.

‘어쩐지. 뭐 대단히 큰 위협일 것처럼 말한 것치곤 개미들의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더니.’

시현은 눈앞에서 거의 갈려 나가듯 사라지고 있는 개미들을 조금 지긋하단 눈빛으로 슥 둘러보고는 너무 강한 유준의 임팩트에 순간 잊은 규민의 위치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규민의 능력은 철저하게 대인전에 특화되어 있는 능력들이었다. 한마디로 이런 물량 공세에 불리한 능력이란 뜻이었다. 그러나 시선을 돌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순간 땅에서 수백 개의 무언가가 쑥 올라오더니 한데 뭉쳐 있는 개미들에게 각각 수십 개의 바람구멍을 내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돈맛이 어떠냐, 이 개새끼들아!!!”

정신없는 소음 사이로 악에 받친 듯한 규민의 목소리가 아주 정확하게 들려왔다. 시현은 결국 입을 작게 벌리고 멍하니 그들의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규민은 상의 허리춤에 달린 여러 개의 주머니에서 수첩 같은 걸 꺼내서 페이지를 북북 찢어 내 바닥에 흩뿌리고 있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그곳에선 가시나, 화염, 또는 단검 같은 공격 수단들이 광범위로 튀어나왔다.

‘설마, 저거 다 돈으로 사서 쓰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둘 다 멀쩡히 살아 있다는 건 참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 헤어진 기간 동안 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아….”

“일단, 음… 가시죠.”

시현은 정말 평소답지 않은 미약한 당혹감이 담긴 태운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허리에 올려놨던 손을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천천히 제 길드원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은 유준과 규민을 무사히 찾는 것이었지만, 뭐 이 정도면 나름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당연히 생각과는 다른 흐름이었지만 시현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가장 앞에서 여전히 실실 웃으며 총을 쏘고 있는 유준에게 먼저 다가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