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후우… 진짜 뭔가를 찾아오실 줄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는 지금 작은 희망이라도 필요했거든요.”
“이해합니다.”
김 비서는 저를 그대로 둔 채 빠르게 사라진 신류하의 남은 자리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나 김 비서 또한 바쁜 사람이었기에 그것도 잠시, 곧바로 태블릿을 들어 올려 무언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참, 지내실 곳은 저번에 쓰시던 방 말고 다른 곳을 지정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머물 곳을 지정해 주겠다는 말이 김비서의 입을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신류 하의 말대로라면 오늘 밤에 응집석이 모두 완성될 것이다. 당연히 그때까지 시현과 태운이 쉬고 있을 거라 여기는 것도 타당했다. 하지만 시현은 그때까지 마냥 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아, 방은 괜찮습니다. 다시 나가 봐야 할 것 같거든요.”
“예? 하지만 지금은 게이트도 소멸하고 있고 신의 광산 주변은 정체불명의 기운으로 가로막혀 있습니다. 딱히 별달리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없으실 텐데요.”
“압니다. 그런데 제 길드원들이 아직 그곳에 있다고 해서요.”
“아….”
대화는 몇 번의 문답을 끝으로 빠르게 끝났다.
김 비서는 지금 이렇게 시현과 공조를 하기 전에 알아봤던 정보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시현을 조사해 보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두 명의 인물도 말이다.
사람들은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 느끼긴 하겠지만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 자칫하면 정말 이 세상이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A와 B의 등급을 가진, 그리고 그런 작은 규모의 길드라면 낮은 등급들과 함께 무조건 가장 전방 쪽에 배치가 될 것이었다.
김 비서는 사실 가장 큰 전력인 시현과 태운이 이곳엔 남아서 긴밀하게 저희를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제 마음대로 될 리가 없었다. 세상은 늘 제 바람과 다르게 굴러갔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럼 대신 하나 가지고 가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조금 체념 어린 표정을 하고 있던 김비서는 이내 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리곤 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흔하게 보던 직사각형 모양의 검은색 물체, 스마트폰이었다.
“…그건 저도 있습니다. 연락 때문이라면 마석 배터리로 바꾼 지 꽤 됐으니 끊길 일도 없을 겁니다.”
“아니, 이건 단순한 스마트폰이 아닙니다. 다른 보급기들처럼 단순히 배터리 용량만 늘린 게 아니라 내부 칩에 레이첼 님이 만들어 낸 응집석이 작게 들어가 있습니다.”
“응집석이요?”
시현은 신기하단 표정으로 누가 봐도 제 것과 별다른 것 없어 보이는 핸드폰을 조심히 받아 들었다. 그러자 손과 물체가 닿은 곳을 중심으로 미묘한 파장이 느껴졌다. 어찌 보면 심장박동 같기도 한 그 느낌은 생명력이 뿜어져 나오는 것과 비슷했다.
제가 비록 그 안에 담긴 의지 같은 건 탐지할 수 없어 어딘가에 꼭꼭 숨겨 놓은 것까지는 찾지 못한다고 하나 이렇게 직접 손에 닿아 있는데도 이 생명력을 느끼지 못할 수는 없었다.
“이 안에는 새끼손톱만 한 응집석이 들어 있는데 이것이 핸드폰의 연산을 도맡은 데다 동력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는 의지가 담겨 있죠.”
“그렇게… 조그마한 걸로도 가능한 거였습니까?”
“큰 힘은 못 쓰죠, 그 정도 크기로는 이 손바닥만 한 기계를 움직이는 게 한계입니다. 하지만 아주 유용한 정도였죠.”
시현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모자라면 뭐 어떤가, 제 위치에서 제대로 움직이기만 한다면 과도한 힘보다 훨씬 나았다.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던 시현은 조심스럽게 화면을 켰다. 역시나 내부는 보통의 것들과 완전히 달랐다. 화면에 떠올라 있는 앱은 다섯 개 남짓. 필요한 것들만 최소한으로 설치해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소지자의 위치를 2시간마다 알립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본인의 고유 마력을 흘리면 그때도 다른 소지자들한테 응급 구조 신호가 갑니다. 그러니 꼭 지니고 있어 주십시오. 시현 님과 태운 님이 강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모르는 거니까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제가 몰래 무언가를 하러 가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위치를 미리 알고 있다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가능할 테니 언젠가는 꼭 필요할 것 같았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 든 핸드폰을 주머니에 조심히 집어넣었다.
김 비서는 여전히 불안함과 초조함이 묻어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이 자꾸만 힘없이 처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현은 그런 김 비서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짚고 입을 열었다.
“중간이 이리 꼬이고 저리 꼬여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세상은 망하지 않을 거고 정상적으로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살아 있으세요. 이렇게 고생한 사람이 그 모습은 꼭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돌아오는 미소가 조금 씁쓸했다. 그렇지만 그 말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는지 김 비서의 표정은 한결 나아져 보였다. 물론 제게도 누군가를 위로하고 할 만한 여유가 충분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기분도 나아지는 걸 느꼈다.
“응집석이 완성되는 대로 알려 주십시오. 곧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어차피 모두의 궁극적인 목표는 비슷했다. 자신과 자신 주변의 모든 인간이 제가 직접 앞길을 선택하고 자유롭게, 행복하게 사는 것. 시현은 누구보다 자유롭지 못했던 최근 10년간의 세월을 되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분명 그쪽 길드는 저희보다 등급이 아래인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하하, 등급만 높으면 뭐 합니까 실적이 절반인데요.”
하얀 머리를 하고 누가 봐도 빙결 마법을 쓸 것같이 생긴 중년 남자와 검을 옆구리에 패용한 채 지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하는 젊은 남자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시현은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잘만 하면 이 상황을 큰 피해 없이 해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차 있던 상태였다.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뛰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제 눈앞의 상황을 보자 그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먼지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레인저들이 확인한바, 저 구역에서 처음엔 약한 놈들부터 빠져나올 확률이 크다더군요. 그럼 당연히 더 강한 전력을 가진 우리가 뒤에 서는 게 맞습니다.”
“대체 그 강한 전력이란 거 어디의 누가 정해 준 거랍니까. 길드 등급이요? 등급은 그동안 처리해 온 게이트 수와 사회의 기여도 따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게 강하다고 하기 힘들죠.”
지금 모인 수십에 달하는 사람 모두 길드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길드장의 신분이었다 한마디로 서로 뒤에 서겠다고 열을 올리고 있다는 말이다.
앞에 서면 제대로 전력이 파악되지 않은 적에 갈려 나갈 확률이 크니 말이다. 이건 전투의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고기 방패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그걸 시현도 알았지만, 이 자리에서 저렇게 언성을 높이며 놀이터 어린이인 양 입씨름을 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황당했다.
이곳에 도착한 건 고작 30분 전, 하정과 간단히 연락한 뒤 현 상황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들었다.
내용이 꽤나 상세한 게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이들에게만 풀린 정보 같았으나 하정은 그걸 시현에게 알려 주는 걸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친구인 것을 떠나 누구보다 이 상황을 타파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시현이었으니까.
시현은 아주 빠르게 이어지는 하정의 말에 집중하며 내용을 분리해 냈다. 그리고 그 짧은 사이에 또 바뀐 내용들은 자잘한 게 여러 개였지만 그 모든 것 중 두 가지를 기억했다. 신의 광산의 변화와 유준, 규민의 거취.
아니나 다를까 하정은 제가 부탁했던 것을 아주 간결하고 깔끔하게 조사해 둔 상태였다.
-일단 신의 광산을 중심으로 특정 지역이 형성되는 중이야…. 그리고 그 안에 몬스터들이 간헐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속성이 다른데도 마구잡이로 섞이고 있어.
‘마치 최후의 일격, 또는 웨이브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모양새 같아.’
조금 의아해졌다. 정말로 웨이브가 일어나 온 도시가 파괴되고 자연이 훼손되면 이곳을 손에 넣는 의미가 없을 텐데 왜 이런 방법을 쓰기로 했는지 변화의 방향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저들도 생각이란 걸 하는 존재들이니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일 테다. 시현은 절대 방심하지 않겠다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하아, 내가 어떻게 해 보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규민 씨랑 유준이가 경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진작 배치받은 것 같아.
하정의 목소리엔 미안하다는 감정이 잔뜩 실려 있었다. 물론 그게 하정의 잘못이 아니란 걸 충분히 알았다. 그리고 전방이래도 위치만 알면 괜찮았다. 자신과 태운이 갈 거니까.
그러다가 전방 어쩌고 하며 언성을 높이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자신의 목적지 또한 그 막혀 있다는 구역의 경계, 즉 전방이었기에 뭐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나 하는 마음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지 말걸.’
이 와중에도 계속 어떻게든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빠져 보려고 입씨름하는 저들의 목소리에 귀가 썩는 것 같았다.
아무리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해도 그랬다. 지금 신의 광산이 이상한 현상을 보이고 있고 멀쩡히 나타나 있던 게이트들이 급히 사라지고 있다는 보고가 빗발치고 있었다. 각 길드의 수뇌부라면 절대 모를 리 없는 사실들이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