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시현은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는 건물을 쭉 바라보았다. 응집석을 통해 순간 이동하듯 온 이후, 외부에서 이곳으로 복귀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낯선 곳은 아니었다. 지나가다 가끔가다 본 셰어 길드의 건물이었으니까 말이다.
“길드가 아니라 무슨 회사 건물 같더니….”
물론 건물의 대부분을 길드에서 다 사용하고 있는 건 맞았다. 이곳에 있는 것도 레이첼과 간부 몇이 다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은밀한 단체가 이 도시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기분이 이상해졌다.
시현은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는 길드 입구를 들어서며 괜히 민망한 듯 뒤통수를 쓸고는 마치 놓기라도 하면 잃어버릴까 태운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나갈 때 설명받은 대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내부자용 게이트를 통과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제일 위층을 누른 뒤, 사람들이 하나하나 다 빠져나갔을 때쯤 미약하게 내공을 손끝에 두르고 다시 최상층 버튼을 눌렀다.
원래라면 버튼에 들어와 있던 빨간불이 꺼져야 했지만 불빛은 꺼지지 않고 초록색으로 바뀐 채 열심히 숨겨진 층을 향해 올라갔다.
휘이이이잉
어느 지점을 지나자마자 사방에서 아주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마치 어디선가 바람이라도 불어와 감기며 내는 소리 같았다.
‘괜히 으스스하게 만들어 놨네.’
이 출입 방법을 구현하는 데에 막대한 돈과 노고가 들었지만 시현의 감상은 고작 으스스하다 뿐이었다.
그렇게 곧 작게 몸이 둥실 뜨는 느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시현은 제 주머니에 들어 있는 응집석 조각을 떠올리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또 제가 이것을 수거해 와서 신의 광산이 그렇게 된 걸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이걸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을 거란 기대감이 속에서 부딪혔다. 절로 손아귀에 땀이 쥐어졌다. 제발 제가 한 짓이 잘못된 실수가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스승님이 하는 건 뭐든지 제대로 풀릴 겁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그때까지 얌전히 손이 잡힌 채 서 있던 태운이 시현의 동요를 눈치챘는지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태운은 늘 그랬다. 마치 제가 절대 실패라곤 하지 않을, 늘 옳은 길만 걸은 사람인 마냥 굴었다.
사실 자신은 늘 실패만을 해 온 사람이었다. 주변 관계, 학업, 직장 생활 등, 단 한 번도 순탄함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어린 태운을 구해 내고 순수한 감정을 아낌없이 받자 달라졌다.
시현은 그런 태운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그만큼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땐 자괴감도 커졌지만 그것도 역시 태운의 변함없는 믿음으로 인해 금방 해소되었다.
‘그래, 실수면 어쩔 거야, 어차피 일어났는데. 그냥 앞으로 일어나는 일을 다 해내면 되는 거지.’
지금도 같았다. 태운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그만큼 힘이 되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일이 조금 까다로워지긴 했지만 그 또한 해결하지 못할 제가 아니니까. 시현은 천천히 열리고 있는 엘리베이터 문 밖으로 아까랑은 달리 자신감 있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
레이첼이 만든 단체는 본인들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무명이라고만 불릴 뿐이었다. 그렇지만 ‘무명’은 그 자체가 단체의 이름이 되었고 알게 모르게 본인들도 자신들이 속한 곳을 무명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지금 그 무명은 만들어진 이래로 역대 최고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간부급까진 아니었지만 말단들, 이 단체의 손과 발이 되어 주는 이들 사이에서 다발적으로 소요가 일어난 것이다.
시기는 정확히 신의 광산에서 이상이 생길 때쯤, 몇몇 인원이 마치 신호라도 받은 듯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변해서 주변의 같은 소속원들을 공격하고 사라졌다. 전형적으로 세뇌에 걸린 이들의 반응을 남기고 말이다.
처음엔 모든 이들이 잘 믿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기도 했고 그동안은 어떠한 이상도 보이지 않던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무명의 대부분, 거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거의 모든 소속 인원들이 세네아즈를 추종하는 량차오샤와 그 사이비 집단들에 의해 피해를 본 이들이었다.
돈을 끌어모으고 저들의 영향력을 빨리 퍼트리기 위해 마구 뿌린 약에 피해받은 이들. 마력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을 줄이고 기운을 퍼트리기 위해 반대하는 이들을 숙청, 그로 인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
그렇게 피해받은 이들은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레이첼은 처음부터 그런 이들을 직접 찾고 규합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스파이나 배신 같은 위험요소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 아니었다. 저들은 사람을 조종하는 데 아주 탁월한 능력을 갖췄으니까. 그건 어느 단체든 마찬가지였고 본인 또한 적진에 스파이를 몇이나 보낸 전력이 있었다.
직접 얼굴을 보고 판단하던 초창기와 달리 나중엔 단체가 커질 거고 그땐 하나하나 체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레이첼과 신류하 등 그 단체의 간부들은 그런 위기에서도 쉽게 벗어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었다.
그러나 이렇게 신의 광산이 급격하게 형태가 어그러지고 저희가 쓸 무기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배신은 꽤 뼈아픈 것이었다.
“상황이 조금 곤란해졌어요. 당당하게 도움을 주겠다고 해 놓고 이런 모습만 보여 드린 것에 면목이 없습니다.”
시현은 그런 그들의 사정을 빠르게 들으며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켜야 했다. 아까 차올랐던,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흐려진 건 아니었지만 상황이 더욱 어려워진 건 팩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속이 답답하고 화가 나는 건 저들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신의 광산에서 느껴지는 이상에 조금 마음이 급했지만 이곳도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비록 능력이 딱히 없어 일반인에 가까운 이들이었기에 큰 사상자가 생겨나진 않았습니다만…. 내부 인원들이 조금씩 동요하고 있습니다.”
보통 아무것도 아닌 이들에게 심혈을 기울여 세뇌를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량차오샤는 유능한 이에게만 제 능력을 쓴 게 아니었다.
정말 별거 아닌 것 같은 이들에게 의지를 사용해 세뇌를 하기도 했고, 제 편이 된다면 꽤 힘이 될 만한 이들을 단순히 최면 스킬을 써서 과녁처럼 대놓고 앞에 내세우기도 했다.
그건 오히려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이용해 쉽게 방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신류하, 그리고 이 비서의 표정은 굉장히 좋지 않았다. 피곤함은 물론이거니와 아주 옅게 패배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레이첼은 응집석 채우기에 전념 중이라 대면하지 못했지만 별반 다를 것 같진 않았다.
이해는 갔다. 하지만 시현은 이런 분위기를 타파하고 싶었다. 상황이 급박했지만 생각해 보면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일이 악화한 것도 아니었고, 응집석만 완성이 된다면 금방 또 해결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제가 그런 상황이 일어났다니 안타깝네요 따위의 위로를 하며 시간을 끌어 봤자 해결되는 건 없다. 그렇기에 시현은 평소보다 더 단호하게 말했다.
“내부 동요로 인해 저희가 해야 할 일에 큰 지장이 갑니까? 그런 게 아니라면 원래 하기로 했던 대로 계속 진행하면 됩니다. 정신 차리세요.”
“압니다…. 절대, 계획에 지장이 가게 하진 않을 겁니다.”
기분이 상할 걸 각오하고 한 말이었으나 역시나 다들 속에 자신만의 대의를 세우고 있던 이들답게 흐트러진 모습을 추스르는 건 빨랐다.
신류하는 마치 속 안에 부스러기들을 끌어모아 내뱉듯 깊게 숨을 한번 내쉬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응집석은 오늘 밤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새벽쯤에 완성이 될 겁니다.”
“예상된 시간은 이틀 후가 아니었습니까?”
“…그랬지만 그 이틀마저도 허투루 보낼 수 없지 않겠습니까.”
시현은 별다른 반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면 뭐든 필요했다. 시현은 그렇게 하면 분명 레이첼이 죽을 만큼 힘들 것이란 걸 예상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리고 신류하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아주 씁쓸한 얼굴이었지만 결국 마음을 먹은 듯했다.
본인들이 결정 내린 일에 제가 왈가왈부할 순 없었다. 시현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이 심상치 않은 일들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며 자신이 가져왔던 본론을 꺼냈다.
“아, 제가 그곳에 갔다가 이걸 사방에 숨겨 두던 놈들을 찾았습니다. 조심스럽게 수거해 오긴 했는데 이것에 어떤 의지가 담겼는지 알 수 있을까 해서요.”
“이게 뭡니까…?”
“응집석 조각이라고 하는데 원래 부여한 의지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 같더군요.”
신류하는 정말 단서를 찾아올지 예상치 못했는지 꽤 놀란 얼굴로 제 앞에 들이밀어지는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이게… 그 북한 지역에 있었다고요?”
“정확히는 그 경계쯤이었습니다. 그 지하에서 이것들을 숨기고 있더군요. 그런데 하는 짓들을 보니 처음 설치한 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최근 일주 전에만 해도 별다른 변수는 없었습니다. 레이첼 님이 직접 확인하신 거라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일어난 지 최대 일주일이란 뜻이 되겠군요.”
신류하의 표정은 무척 심각해졌다. 아무리 조각이라도 응집석이었고 그렇다면 어떠한 의지가 담겨 있을 것이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지금 생긴 모든 일들이 이것에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신류하는 지친 얼굴 위로 아주 작은 희망을 띠며 받아 든 주머니를 조심스레 손안에 쥐고 곧바로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