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왜 잊고 있었을까. 제게 저 낯선 기운을 탐색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이 하나 있지 않았나.
단순히 정보를 알아내는 것뿐이라면 이게 아주 딱 맞는 방법이었다.
[성안]
시현은 조금 긴장한 상태로 아직도 입에 잘 익지 않는 스킬명을 느릿하게 외쳤다.
비록 완전하지 않으나 성안을 쓴다면 최소한 이름과 용도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분명 예전에도 응집석을 성안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땐 생명력을 끌어모은다는 정도의 내용밖에 나오진 않았지만, 그때의 능력과 지금의 능력은 달랐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예전과는 다른, 조금 더 세세한 설명이 적힌 알림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조각난 응집석의 일부(-) - 심어진 의지에 따라 필요한 파장을 퍼트린다. 조각의 개수에 따라 파장의 크기가 달라진다.]
순간 시현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자세한 내용을 알 순 없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저들의 궁극적인 목표야 결국 세네아즈들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더 이곳에 끼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아마 이것도 그런 수작 중의 하나일 게 분명했다. 하나 한 발짝 디뎠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었다. 이렇게 능숙하게 지하에 숨기고 다녔다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뜻일 테다. 그러다 보니 이게 이곳에만 있다고 한정 지을 수도 없기에 다시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이걸 레이첼 쪽에 가져다주면 뭐라도 나오겠지.’
시현은 혹시 몰라 태운의 손에서 조각을 조심히 주워 들었다.
“태운아, 아까 봤다고 했던 다른 것들도 모아 줄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일단 눈에 띈 이상 방치해 놓을 순 없었다. 하나가 빠지더라도 알 수 없는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만들어 놨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시현은 태운에게 조금 미안한 얼굴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러나 역시 되돌아오는 대답은 조금 유쾌한 듯 기쁜 목소리였다.
그런 태운의 모습에 한숨이 나올 것 같았지만 또 웃음이 날 것도 같았다.
“그럼 부탁할게.”
태운은 그런 시현의 미묘한 표정을 한껏 눈에 담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이미 한번 갈라 놓은 곳이기에 수거는 어려운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1분도 되지 않아 바람같이 움직인 태운 덕에 4개의 조각이 추가로 더 모여들었다.
시현은 그런 조각들은 하나하나 확인하고 숨을 작게 몰아쉬었다. 아무리 조각난 것들이라고 해도 무슨 영향을 끼칠지 모르기에 조심해야만 했다. 저번에도 제가 조심성 없이 떼어 놨다가 봉변을 겪지 않았던가.
부욱-
그렇기에 조금 더 잘 보관할 수 있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시현은 냅다 제가 입고 있던 셔츠의 주머니를 찢었다. 그리고 그 안에 조각을 집어넣고 다시 바지 주머니 안에 쑤셔 박았다.
‘그래도 성과가 있어 다행이네.’
꽤 쓸 만한 단서였다. 물론 이 공간을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곤 일단 자신과 태운뿐이고, 그 안에서 이 조각을 찾을 만한 사람은 태운 하나였기에 일일이 수거를 하려면 지난한 시간이 걸릴 테지만 말이다.
조금 아쉬웠다. 물론 단번에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적이 일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을 상황을 만들어 줄 리가 없지 않나.
“스승님….”
그때 불만스럽다는 얼굴을 한 태운의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은 상념에 차 별생각 없이 움직였다가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온 태운의 반응에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그러나 금세 그 말을 가로채듯 재빨리 걱정하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다.
“아, 어, 안 추워. 괜찮아.”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셔츠가 상했어도 안에 입고 있던 반팔티는 멀쩡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기에 딱히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태운을 달래 주는 게 먼저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깊이 묻어 두었다. 경험상 그런 얘길 하면 더욱 화를 낼 태운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잔소리 아닌 잔소리가 이어졌다. 말투는 무척이나 공손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였다. 태운은 화가 나면 날수록 말을 아주 공손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주 모르는 타인 대하듯 말이다.
“스승님께서는 괜찮으시다고 했지만, 먼저 말을 해 주셨으면 조금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
“어어, 앞으로는 진짜 그렇게 할게.”
목소리의 높낮이로 보아 엄청나게 화난 건 아니었지만 그런 낌새가 슬슬 보였다. 시현은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지이이잉-
그때 시현을 구원이라도 하듯 짧고 굵은 진동 소리가 텅 빈 동공을 울리고 사라졌다.
‘하, 씨, 다행….’
시현은 신난다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지금 제게 연락할 사람이라곤 하정뿐이었다. 아무래도 그곳에 혼자 덩그러니 놓고 온 데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가 되어 버리니 연락을 한 것일 테다.
시현은 머쓱한 맘에 머리를 긁적이며 도착한 연락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채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연속으로 톡이 우르르 도착하기 시작했다. 진동은 마치 전화벨처럼 끊임없이 울려 대고 있었다.
-어디야
-큰일 났어. 빨리와
-빨리
-ㅃㄹ
수 번의 진동이 멎자마자 들여다본 내용은 온통 급하다는 말뿐이었다. 오죽하면 마지막에 가서는 자음들로만 이어진 내용뿐이었지만 그만큼 급박한 마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시현은 점진적으로 빨라지고 있는 심장 박동과 함께 떠오르던 잡다한 상념을 급히 내리누르고 핸드폰을 급히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시현은 그 즉시 땅을 거칠게 딛고 힘차게 달려 나갔다. 태운 또한 기다렸다는 듯 속도를 맞췄다. 둘에게 별다른 지시나 말은 필요 없었다.
***
가는 길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출발했을 때와 달리 전속력을 다해 하정이 있는 곳으로 달렸으니까 말이다.
하정은 자신과 헤어졌었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초조하게 한쪽 다리를 떨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하정이 순식간에 시야 가득 들어왔다.
“정시현!”
“무슨 일이야? 야, 진정해 봐.”
하정은 시현을 보자마자 크게 이름을 외치며 무언가를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것은 핸드폰, 정확히 말하자면 문자 내용이었다.
!긴급 소집 - (극비)
현시간 기준 전 세계에 우후죽순 퍼졌던 게이트가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 신의 광산에서 이상 징후가 포착되었다. 기존 임무를 해결하는 대로 곧바로 신의 광산으로 모인다. 이상,
“이게 무슨….”
“좆됐어 진짜. 지금 나 당장 움직여야겠다.”
“잠깐! 잠깐만.”
시현은 순간 등골이 쭈뼛하는 기분에 급히 양손을 움켜쥐었다. 시현은 신의 광산의 의미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전초기지의 역할을 할 시기가 아주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왜 하필 제가 이 응집석 조각을 발견했을 때일까. 순간 그리 조심했건만 설마 제가 수거해 온 그 응집석 조각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긴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요하긴 하지만 조절도 안 돼서 민폐를 끼치는 이 능력이 무척 짜증 났다.
“무슨 문제 있어?”
하정은 당장이라도 떠나려는 듯 급히 움직일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시현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반대야. 지금 움직이면 안 돼. 내가 어느 정도 설명해 줬잖아. 네 능력이 강하다고 해도 직접적으로 그들과 부딪힌다면 분명 문제가 생길 거야.”
“… 알아. 아직도 희미하게 그 느낌이 남아 있으니까. 누구보다 더 잘 알지. 근데 원래 내가 데리고 다니던 우리 팀 다 거기로 가게 될 거야. 걔네들은 뭐 때문에 그쪽으로 가는지도 몰라. 근데 내가 혼자 숨어 있어야겠냐?”
시현은 결국 입을 다물고 한숨을 푹 쉬었다.
“못 하겠지.”
특히나 하정은 그걸 알고도 제 목숨 챙기겠다고 후방에 있을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여태까지 자신도 태운도 능력이 있으니 둘이서 전력을 다해 빨리 해결하면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찮았고 그 모든 생각들은 한낱 자만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만 보여 줄 뿐이었다.
“그리고, 규민 씨랑 유준이도 그곳으로 오게 될 거야.”
가슴속에 무언가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제가 할 일이 급해 제대로 챙기지 못한 일행들이었다. 가끔은 성가시고 귀찮았지만 그만큼 제게 큰 영향을 주던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도 아무것도 모른 채 사지에 집합할 거로 생각하니 점점 입이 마르고 마음이 급해졌다.
“시발… 후우. 알겠어. 그러면 여기서 헤어지자. 나는 단서 찾은 걸 저쪽에 전달하러 가야 해.”
“어.”
“걔네들도 좀… 부탁한다. 죽지 말고.”
“너나 조심해, 인마.”
하정은 무척 시원하게 웃어 보이고선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근처에 헌터들이 모여 있던 부대가 있었으니 그쪽에 합류해서 움직일 테다. 그렇다면 대략 하루. 시현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동쪽 저 너머에 있을 신에 광산을 바라보며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가자, 태운아.”
“예.”
누가 떠밀듯 상황은 점점 빠르게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시현은 조금씩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속이 마그마처럼 점점 끓어 넘쳐 갈무리조차 하기 힘들어졌다.
마지막에 누가 웃게 될지,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시현은 질 생각도, 그렇다고 저들을 쉽게 보내 줄 생각도 없었다.
‘두고 보자고.’
시현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