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마치 레벨이 높은 틀린 그림 찾기를 하듯 시현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돌아가는 고개가 마치 스캐너처럼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까와는 조금 다른 각도의 시선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바닥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하얀 눈이 없었다면 초록빛 풀로 가득했을 땅. 시현은 어느 순간 한쪽 입꼬리를 슬쩍 밀어 올렸다. 그러자 손에 쥔 하얀 검신 위로 붉다 못해 검게 느껴지는 강기가 확 타올랐다.
‘지렁이 같은 새끼.’
얼어 버린 땅은 고작 살과 피로 이루어진 것들과 비하면 조금 더 단단하고 파헤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현의 검은 아주 거침없이 움직였다.
갯벌에 꼬챙이를 쑤시듯 검강으로 인해 몇 자나 길어진 검이 손쉽게 푹 하고 땅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사실 길이가 길어진다고 위력이 더 강해지는 건 아니었지만 저 안쪽 깊은 통로에 있는 자를 끄집어내려면 무엇보다 길이가 중요했다.
내공을 더욱 검으로 집중했다. 이제는 제 팔처럼 느껴지는 이 검이 죽죽 늘어나 어딘가에 닿았을 때.
크헥!
손아귀로 어떠한 감각이 그 울림을 타고 목표물의 고통 어린 단말마가 들려왔다.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때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미묘하게 주변을 경계하며 늑대들을 쉼 없이 살육하고 있던 태운이 조심스레 말을 건네 왔다.
아무래도 저 통로까지 땅을 파야 하고 그것을 들고 와야 하는 중노동이 될 테니 제가 하겠다 뜻일 테다. 시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피가 조금 튄 태운의 머리칼을 쓰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야. 마무리도 내가 할 테니 여기 정리 좀 부탁해. 너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네, 미안해.”
너밖에 없다. 요즘 꽤 잘 먹히는 주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태운은 잠시 멈칫하더니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이런 면은 그대로라고 괜히 웃음이 나왔다.
시현은 그런 그에게 작게 미소를 보내며 아까부터 혼란에 빠진 듯 우왕좌왕하는 라이칸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비록 웃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방심해선 안 됐으니까.
아까와는 달리 확연해 보일 정도로 줄어든 숫자. 그들은 머리를 잃자마자 처음에 파악했던 그들의 특성처럼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저런 상태라면 더 문제없겠네.’
이미 겁을 먹었다. 원래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태운이라면 이제는 정말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다. 시현은 미련 없이 시선을 내린 뒤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
여태까지 힘겹게 막고 있던 게 허무할 정도로 수백이나 되었던 라이칸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조금 과장해서 증발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헌터로 보이는 둘의 무용은 무서울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나름 이 무리를 이끌고 있던 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고 털썩 주저앉았다. 옷가지에 눈이 묻어 축축하게 젖어 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홀린 듯이 그 전투를 보았다.
이미 사방은 하얀색은 온데간데없이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자들은 점점 빨라져 이제는 잘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괴물….”
“…우리를 도와주는 거 보니 협회에서 파견한 게 맞겠죠?”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주변에서 들려왔다. 분명 의심할 여지 없이 저희를 도와주고 있는 게 맞았지만 안 그래도 최근 뒤숭숭한 일들로 예민해져 있는 상황. 남자는 순간 멈칫했다.
만약 저러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때리고 죽이기라도 한다면?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잡고 이어졌다.
그때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물론 백여 명에 가까운 인원이었기에 원래 있던 일행이 만들어 낸 기척일 수도 있었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나 갑자기 나타나 있었다. 남자는 천천히 무기를 움켜쥐고 고개를 돌렸다.
“어? 하, 하정 헌터님?!”
“어어!! 헌터님!!”
순식간에 주변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정은 제가 오기 전까지 저 앞을 보면서 경계 어린 얼굴을 하고 의심하듯 수군거리던 걸 봤다. 아무래도 진짜 정시현 미친놈이 별다른 설명 없이 대충 튀어 나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이하정입니다. 혹시 지부가…?”
“아아! 저희는 중부 쪽에서 파견 나왔습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딱 봐도 어리바리해 보이는 게 전방에서 움직이던 이들은 아니겠다고 생각했지만 진짜로 그랬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전방에서 활동하던 이들이었으면 저 둘에 대해 대충 넘어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상황이 급하니 과한 조처를 하진 않았겠지만, 지금은 전시 상황. 어느 누가 안전을 이유로 꼬투리를 잡을지 몰랐다. 그리고 오기 전에 이미 세뇌에 대해 경험해 보지 않았나. 분명 그런 이들이 협회 안에도 있을 것이다.
“하하, 별말씀을. 일단 저 앞에 둘은 제 일행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저 둘이 앞의 상황을 처리할 때까지 정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희가 계속 도와 드릴 수 있는 건 아니라서요.”
하정의 말을 시작으로 분위기가 급속도로 풀려 가기 시작했다.
도와주는 것 같으나 정체도 모르는 이들 때문에 부상도, 필요한 소모 아이템도 내공도, 마나 들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던 상황. 이들은 그제야 하나둘씩 털썩 주저앉으며 서로의 상태를 돌보기 시작했다.
하정도 작게 한숨을 쉬면서 상황이 대충 마무리가 지어져 가는 저 앞을 빤히 바라봤다.
‘시발, 저러니까 사람들이 무서워하지.’
말도 안 되게 강한 자를 만나면 보통 무서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저들은 그 강함을 아주 빠르고 무자비하게 표출해 내고 있었다. 이제는 그 커다랗고 바글바글 몰려 있던 라이칸이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뿐이 남아 있질 않았다.
그만큼 주변도 붉은색과 피비린내로 가득했고, 말이다. 비록 어느 정도 설명을 들었다고 했지만 깊게 와닿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저걸 보면 그 모든 말들이 자동으로 납득이 되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강함이 도저히 설명되지 않았으니까.
‘아, 이제 넷.’
그 와중에도 수는 꾸준히 줄었다. 대략 5분여의 시간 동안 이제 그 강대한 라이칸 무리는 한 개체도 빠짐없이 바닥에 눕혀 있었다. 하정은 그제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걸어 나갔다.
“후우…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냄새가 조금 역한데.”
사실 역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 잔혹하고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반경 몇 미터가 온통 시체로 차 있으니 말이다. 시현은 고작 그 짧은 소감만을 남기고선 정확히 심장에 상흔을 달고 있는 몸뚱이를 둘러멘 채 헌터들이있던 방향으로 움직였다.
“괜찮으세요? 제가 들겠습니다.”
“아냐, 괜찮아. 진짜 하나도 안 무거워.”
다크엘프는 생각보다 덩치가 커다랬다. 시현 또한 작은 덩치가 아니었건만 꽤 큰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차이가 확연하게 두드러졌다. 하지만 그에 비해선 무게가 말도 안 되게 가벼웠기에 시현은 무슨 오리털 이불이라도 든 양 거침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시현은 그런 몸뚱이를 이리 휙휙 흔들며 애써 괜찮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태운이 자꾸 일을 도맡아 하겠다고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너 뭐 하냐?”
그렇다고 그 모습을 다른 사람한테까지 보여 주고 싶다는 건 아니었다. 시현은 순간 고개를 홱 돌려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하정이 한심하단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체를 한쪽 어깨에 둘러 냈다가 들었다 몸을 흔들었다가, 분명 방금까지 제가 한 짓이었다. 당연히 저런 얼굴을 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시현은 순간 목덜미가 화끈해짐을 느끼며 버럭 소리쳤다.
“아니! 뭐, 뭔데 기척이 없어? 무슨 스킬 썼어?”
누군가 다가오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다. 자신이 알고서도 낯짝 두껍게 그런 행동을 하진 않았을 거란 말이었다.
“뭐? 어,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러나 이어지는 하정에 말에 시현은 쪽팔려서 식식대던 것도 잊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곤 하정을 바라봤다. 변장이라든가 폴리모프 같은 이상한 기술이 들어간 낯선 이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내공을 이용한 기술과 말 그대로 방법이나 초능력을 이용한 마법, 기술들은 펼쳐지는 방식이 정말 단 하나도 닮지 않았기에 그런 류의 스킬을 받아서 눈치채지 못했나 했더니 아니란다.
시현은 고개를 홱 돌려 태운을 바라봤다.
“태운아, 너도 몰랐어?”
“저는 오늘 방향을 향하고 있었기에 알았습니다. 하나 스승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로 본다면 은밀하긴 했습니다. 아니, 약간 반투명하게 비틀려 있다고 할지….”
그제야 시현은 정신을 뾰족하게 집중해서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충 이유 몇 가지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시현의 탐색에 걸려든 건 라이칸들을 죽이면서 이 일대에 알게 모르게 퍼진 마나들이었다.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다. 미량이었고 그 기운들은 그들이 내뿜던 투지와 비슷했기에 금방 적응이 됐던 탓이었다. 자신이 만능 로봇은 아니지 않나. 아직도 몬스터라는 존재와 내공을 이용하지 않는 프로세스들에는 많이 약했다.
“뭔가… 네 존재가 아주 살짝 붕 떠 있는 느낌이야.”
“뭐? 무슨… 어디 이상이 있지는 않은데.”
그런다면 이 마나들 때문인 건지, 하지만 이 전투는 꽤나 오랜 시간 이어져 오고 있다고 했다. 이것과 관련하여 보고 같은 게 하정에게 올라오지 않았을 리 없었다. 이곳에 내공을 쓰는 헌터가 자신들뿐만도 아니었고 마나나 내공을 탐색하는 마법도 있었으니 그들도 이 현상에 대해 몰랐을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서만 나타난 이상 현상이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