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휘잉-
원래라면 건물이 들어차 있어야 할 곳이었지만 이곳은 부서진 잔해뿐이었다. 바닥으로 부서져 흩어진 잔해들 사이로 싸늘한 바람이 계속해서 휘돌고 몰아쳐 왔고 그 사이사이엔 눈발이 섞여 기온을 떨어트렸다.
“설마 이거 도시냐?”
“맞아.”
하정의 목소리가 조금 씁쓸했다.
시현은 여러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주변을 쓱 돌아봤다. 지금 있는 곳은 반도를 둘로 나누고 있던 곳보다 조금 더 위에 있는 마을보단 크고 도시보단 작은 밀집지였다. 그곳에는 초록빛은커녕 회색빛과 그 위를 덮고 있는 눈발이 다였다.
왠지 낯이 익은 풍경이었다. 물론 그때는 건물이 이렇게까지 파괴되어 있진 않았지만, 주변을 잔잔하게 몰아치는 마력과 눈발이 그때의 기억을 끌어왔다.
‘몬스터도 비슷한 것 같고….’
눈앞에는 웬만한 성인 얼굴보다도 훌쩍 큰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형태는 네발 동물의 것. 시현의 예상이 맞았다면 생각보다 강한 놈들이 휩쓸고 다니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현의 착각이었다. 처음 접한 폭발 게이트에서 만난 웨어울프들은 보통 무리를 이루고 사냥했다. 그리고 그들끼리도 서열을 만들었는데 가장자리로 갈수록 약한 놈들이 밀려나 있는 그런 형태를 했다. 시현이 만난 것들은 그런 개체들이었다.
“다크 엘프와 웨어울프야. 웨어울프만 있다면 몰라도 다크 엘프까지 있다면 무척 위험해.”
“왜?”
그런 시현의 생각을 깨어 버리듯 곧바로 하정의 굳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웨어울프가 무리를 이루기 때문에 까다로운 건 맞아. 그런데 멍청해서 전투할 때 까다로운 애들은 아니거든.”
“아, 다크 엘프들이 지능이 높다고?”
“어, 게임이랑 비슷하지? 보통은 같이 다닐 수가 없거든. 근데 이상해. 엘프들이 웨어울프를 부린댔어.”
그렇기에 현 전투 상황은 계속 비슷한 곳에서 고착되어 있는 상태였다. 밀리지는 않지만, 게릴라 공격을 하며 야금야금 인간들의 전력을 깎아 먹는 엘프와 웨어울프 때문에 인간들은 보급선을 더 길게 늘일 수가 없었다.
“게릴라전이라….”
“네가 평야에서의 전투가 좋다며. 근데 애초에 평야에서 그 새끼들과 만날 수 있을지가 문제야. 야비한 것들.”
하정은 여전히 근심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하며 허허벌판을 쭉 둘러보고 있었지만, 시현은 그런 하정의 설명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아주 흐릿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게릴라전이라면 이쪽에서도 아주 익숙한 형태였으니까.
애초에 인원이 적은 쪽에서 인원이 많은 적을 상대하기 위해 행하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시현과 태운은 10여 년의 기간을 늘 저들보다 몇십 배, 몇백 배나 많은 인원을 상대로 싸워야만 했다. 한마디로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형태의 전투란 뜻이었다.
“걱정하지 마, 그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시현은 평소에는 허전하게 비어 있던 옆구리에 걸린 낯선 검을 슬쩍 움켜쥐었다.
푸르스름해 보일 정도로 하얀 검집, 누가 봐도 명검이라고 한눈에 알아볼 만큼 공들여 만든 검병과 검날.
이곳에 오기 전 레이첼에게서 뜯어낸, 아니 정당하게 받아 낸 명검이었다. 아마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 중 가장 등급이 높은 아이템일 것이다. 선뜻 주긴 했지만 미세하게 어린 아쉬움을 시현이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고작 아이템 등급 같은 거에만 의존해서 검을 고른 건 아니었다. 그냥 그전에 쓰던 검과 가장 유사한 형태와 균형을 가지고 있었기에 골랐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전에 쓰던 검이 명검이었던 것만큼 당연히 고른 검도 명검이었을 뿐이었다.
“후우…. 괜찮겠냐?”
“어.”
“아니, 너 말고 태운 씨 말이야.”
시현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돌아온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제 옆에 얌전히 서 있던 태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게도 정통으로 마주친 두 눈에서는 저를 두고 가면 원망하겠다는, 아주 단호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알 수가 있었다.
시현은 비식거리고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찮대.”
하정 또한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손을 한번 휘저었다. 더 말하지 않겠다는 뜻일 테다. 시현은 그런 무언의 대답에 저 멀리에서 소규모 전투가 일어난 걸 확인하며 곧바로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일단 저기부터 가야겠다. 조금 아슬아슬하네.”
“뭐? 어디…. 아, 너 그 안력 올려서 본다는 어쩌구 그거냐?”
“어쩌구라니 하, 진짜.”
“뭐.”
당장이라도 태풍이 불기 전의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였지만 뻔뻔한 태도는 여전했다. 시현은 똑같이 고개를 내저으며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자세를 취했다. 평소의 하정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보니 긴장이 적당히 풀리는 것 같아 나쁘진 않았다.
“나 먼저 간다. 상황 설명 부탁.”
“뭐?! 야! 같이 가!”
뒤통수에 하정의 경악 어린 목소리가 표창처럼 날아와 박히는 것 같았지만 시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장 저지선이 무너질 것 같은 곳으로 튀어갔다. 옆에는 태운이 나란히 속도를 맞춰 달려오고 있었다. 시현과 태운의 몸놀림은 누가 봐도 비슷해 보인다고 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흙먼지 하나 날리지 않도록 사뿐사뿐 지면을 밟는 발놀림이나 크게 움직이지 않는 상체와 팔까지.
그리고 정점은 어느 일정 구간에 들어섰을 때였다. 서로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같은 지점에서부터 양쪽으로 갈라져서 한 명은 저지선의 앞, 한 명은 저지선의 옆에 도달해 빠르게 땅으로 내려앉았다.
크아아아아-
얼굴 바로 앞에서 웨어울프들의 아가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마 곧 있으면 저 무지막지한 턱 힘을 이용해 제 눈앞에 있는 자의 목을 물어뜯을 게 분명했다. 시현은 태운의 걱정을 한구석으로 밀어 두고 곧바로 움직였다.
“놀라지 마세요.”
갑자기 잡혀 뒤로 던져질 이를 위한 예고였다. 물론 예고해 봤자 놀라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바지에 실례할 수도 있었지만, 배려야 목숨을 구해 주는 데에서 이미 끝났다.
시현은 남자를 던져 날린 한 손과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검을 꺼내 들었다. 발검하며 휘어지는 검날이 무척이나 유려하고 아름다워 보여 순간적으로 위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착각할 만한 우아한 동작이었다.
스걱.
하지만 우윳빛을 한 검은 조금의 자비도 없이 웨어울프의 아가리를 반으로 갈라 놓고 다시 검집 안으로 착 소리와 함께 들어갔다. 범인이라면 검이 나왔었는지도 모를 법한 아주 빠르고 깔끔한 발검과 납검이었다.
뿜어져 나오는 핏물과 함께 주변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역시나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순간적으로 너무 강력한 적이 나타나면 공격하지 않고 멈추는 것. 제 뒤에 있던 사람들도 멈춰 서긴 했지만, 어차피 공격 쪽만 멈추면 됐기에 시현은 딱히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뒤에 오는 사람이 해 줄 테니 조금 물러서 있으세요.”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이 있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시현도 딱히 들을 생각이 있던 건 아니었다.
슈각!
곧바로 검이 검집에서 튀어나왔다. 그것은 태운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쌍둥이 같은 몸놀림의 두 남자가 어렵게 풀려 가던 전투 현장의 양 끝에서부터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검이 한번 움직이면 웨어울프의 다리가 한 쪽씩 날아갔다. 어떨 땐 곧바로 머리가 박살이 나 즉사할 때도 있었고 어떨 때는 차라리 죽고 싶어지게끔 과중한 상처로 뒤덮인 웨어울프도 있었다. 물론 그들의 끝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죽음이었다.
오랜만에 함께한 격렬한 전투였다. 수없이 검이 휘둘러지고 피륙이 주변을 수놓았다. 누가 봐도 위험하고 잔인한 순간이었지만 시현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제가 돌아보지 않아도 당연하다는 듯 제 사각에 위치해 있는 태운. 그리고 당연히 제가 움직일 거란 걸 아는 듯한 거침없는 움직임까지. 레고처럼 딱딱 들어맞는 움직임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크아아아앙-
그때 얻어맞고만 있던 웨어울프들이 아까의 불규칙한 공격과 달리 마치 훈련이라도 받은 병사들처럼 규칙적인 방진을 짜서 덤벼들기 시작했다.
시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분명 지능을 가진 다크 엘프가 같이 있을 거라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멍청한가 했더니 그새 어디를 갔다 온 건지 자리에 없었던 것 같았다.
곧 머리를 찾은 웨어울프들은 아까처럼 쉽게 져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황이 악화됐냐라면 딱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냥 이 상황이 신기했다.
‘몬스터들은 서로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닐 텐데….’
그러나 그에 대한 프로세스를 따져 보기엔 지금은 딱히 좋지 못한 상황, 시현은 이내 상념을 털어 내고 태운과 시선을 교환했다.
최우선은 다크 엘프를 찾아 처리하는 것. 시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둘의 신형이 붉은 꼬리를 남기며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어딨냐. 이 약삭빠른 놈아.’
그 빛의 궤적은 멈추지 않고 길게 이어졌다. 우르르 몰려 있는 웨어울프들의 사이에 붉은 끈을 만들었다가 그 주변에까지 뻗어 나가 허공에 선을 긋고 사라졌다.
시현이 보는 세상은 꽤 느렸다. 그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빠른 속도로 주변을 살피는데도 다크 엘프의 신형이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태운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잠깐.’
그때 말도 안 되지만, 그렇기에 제법 가능성이 있을 법한 가정이 떠올랐다. 이들을 지시하고 있다는 건 정말 가까이에 있다는 건데 제 눈에 띄지 않는다니 이건 정말 불가능했다. 한 가지 경우를 빼고 말이다.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기운에 하나의 작은 기운이 겹쳤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