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그때 부옇게 깔려 사방을 채운 기운 사이로 제 몸 주변을 맴도는 흐릿한 푸른 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자 잘 돌아가지 않던 머리가 몇 개의 기억을 천천히 의식 위로 밀어 올렸다.
‘이건….’
시현이 저 몰래 무언가 일을 꾸밀 때마다 주변을 맴돌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꾸 좆같은 일이 터지기 직전마다 보이던 것 말이다.
그 순간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던 정신이 아주 조금 맑아졌다. 그리고 이리저리 튀던 의지가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를 찾는다. 그 당시는 대체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저것에서 무언가를 잡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하, 그래 설마 스승님이 내가 싫어서 이랬을 리가 없어.”
태운은 배배 꼬여 가던 생각의 고리를 잘라 내고 일부러 소리를 내 웃었다.
늘 그랬듯 만약 이번 일에 저것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면, 아니 무언가 있어야만 했다. 이 용암처럼 들끓는 감정을 풀어낼 데가 필요했으니까.
태운은 눈물과 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점점 공간 너머로 사라지는 푸른 기운을 붙잡았다.
처음부터 잡혔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선천지기를 섞어 내기를 끌어 올리자 푸른 기운이 불꽃을 튀기면서 손에 가두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그 순간 그 푸른 기운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공간이 느껴졌다. 존재감은 아주 흐릿했지만 확실했다. 태운은 시현의 몸을 조심히 들어 침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두고 아직은 온기가 남아 있는 그의 뺨을 한번 천천히 쓸어내린 뒤 검을 들어 올렸다.
“맞아. 평생 내 옆에 있기로 했는데… 그럴 리 없지. 그래….”
선천지기가 섞인 내기는 원래 가지고 있던 제 내기의 붉은색이 아니라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어둡게 변해 있었다. 물론 그로 인해 조금씩 생명력이 닳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연검. 분절.’
이제는 거의 사라져 보이지 않는 푸른빛을 따라 태운의 시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이어 검은 내기로 휩싸인 검날이 그 시선을 따라 허공에 그어졌다. 지겹다고 느낄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다.
츠즈즈즉.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 검에 의한 상흔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방으로 작은 전류 같은 것이 튀었다.
그러나 그것도 찢어진 곳 안으로 처음 보는 공간이 보이자 멈췄다. 태운은 한번 시현을 바라보곤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발을 옮겼다.
“동굴?”
마치 진법 안에라도 들어온 듯 완전히 다른 환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동굴이긴 했지만,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 깎아 놓은 듯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온통 하얀 공간, 원래라면 느껴져야 할 자연지기조차 없는 이 기이한 곳엔 단 하나의 길만 자리하고 있었다.
태운은 자연스럽게 그 길을 따라 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않았을 때 태운의 눈에도 아스라이 보일 정도로 먼 곳에 낯선 존재감이 느껴졌다.
망설임 없던 여태까지와는 다른 한 걸음이 내디뎌졌다. 그러자 마치 공간이 접히기라도 하듯 양옆이 일그러지더니 태운의 손아귀 안으로 선명하게 뛰고 있는 맥박이 들어찼다.
“커헉!”
“넌 누구지?”
“네가 여길, 켁 어떻게!”
그자의 입에서 자신을 원래부터 알고 있다는 듯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순간 태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김새는 평범한 중원인의 모습이었건만 이상한 존재감에 경계심이 들끓었다. 게다가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파고드는 듯한 목소리는 더 심상치 않았다.
그때 그걸 느낌과 동시에 분명 제 손에 붙잡혀 있어야 할 몸이 모래처럼 무너져 내리더니 저 멀리에서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니, 모래보단 더 작은 분자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뭐, 이런 것도 좋지.”
태운은 이내 한쪽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쉬운 상대는 아닌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제 생각에 확신을 더하고 있었다.
스승님은 분명 저자의 농간에 말려든 게 분명했다.
손에 쥐어 있던 검이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목표는 이제 몸에서 빛까지 내는 수상한 존재였다.
검은 제대로 박혔다. 하지만 남자의 몸은 아까처럼 허물어지며 검을 바닥에 뱉어 냈고 꽤 떨어진 곳에 다시 나타났다. 그 모든 게 아주 짧은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럴 순 없어! 대체 어떻게 나를 공격할 수가 있는 거냐고!”
태운은 저자가 지껄이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곧바로 그대로 흘려 냈다. 그리고 꽤 위험한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는 빛의 구슬들이 순식간에 제게로 다가오는 걸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봤다.
물론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구슬들은 태운에게 닿기도 전에 모조리 절반으로 잘려서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다음은 다시 태운의 공세였다. 바닥에 그저 떨어져 있는 줄 알았던 검이 순식간에 검은 내기를 두른 채 의지라도 가진 듯 재빨리 움직여 이상한 존재의 등 쪽에서부터 찔러 들어갔다.
“크흑!”
검을 맞은 존재는 다시 허물어졌다 나타났지만, 이번엔 타격을 받은 건지 아까와는 달리 꽤 괴로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스승님은 어디 갔지? 네가 한 짓이냐?”
일단 제힘이 먹힌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태운은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이게 무슨 개 같은, 너 대체 왜 아직도 멀쩡한 건데!”
멀쩡하다? 자신은 지금 멀쩡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도 족쇄처럼 매여 있는 시현의 말 때문에 끝의 끝까지 제정신을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태운은 제 질문에 답변은커녕 화만 내는 그 존재를 바라보다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곤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알겠다. 이 공간 자체가 너였군.”
작은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태운의 시선은 저 몸이 허물어져 새로 나타나기 이전의 장소, 정확히는 제 칼끝이 아주 조금 파고들어 간 바닥에 닿아 있었다.
“젠장!”
존재는 이제 빛에 가려져 사람만 한 빛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리고 누가 봐도 도망치려고 하는 낌새를 보이고 있었다.
태운은 피식 웃고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자연검. 흑해.
손을 중심으로 검은 기운들이 점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수는 얼핏 봐도 하나하나 셀 수 없을 정도. 하나같이 의지를 가진 듯 지글지글 꿈틀대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검은 안개처럼 보였다.
그와 동시에 빛 덩어리는 몇 번 멀리 몸을 움직여 떨어지더니 무언가 다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히 무슨 짓인지는 몰랐지만, 빛이 사그라들며 허공으로 빠르게 흡수되고 있었다. 그러자 공간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대충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제 초식이 조금 더 빨랐다.
“해(解)”
태운의 나직한 한마디가 울려 퍼지자마자 작은 점들이 쏜살같이 공간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온통 하얀 공간은 마치 어둠에 잡아 먹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반쯤 갉아 먹혀 사라졌을 때 빛 덩어리가 아닌 맨 처음에 봤던 사람의 형태가 허공에서 툭 뱉어져 나타났다.
태운은 여유롭게 그에게 다가가 다시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이제 대답을 해. 내 스승님 어떻게 했어.”
대답을 종용하는 목소리는 나긋한 듯했지만 빨간 눈동자는 살기로 번들대고 있었다. 팔다리가 한 쪽씩 사라진 채 헐떡대고 있던 존재는 그런 눈을 피해 컥컥대면서 악을 썼다.
“허억, 허억. 그 새끼는 지가 살던 세상으로 내쫓았지, 크흑, 그걸 억지로 보내려고 내가 얼마나! 씨발! 위대한 내가! 이딴 미물에게…. 컥.”
남자는 뭐가 그리 억울하고 믿기지 않는지 사색이 된 얼굴로 계속 이럴 순 없다고, 악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태운은 시현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알아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둥글게 휘어진 눈 안으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희열로 물들었다.
죽은 게 아니었어.
사실은 조금 두려웠다. 끝까지 찾아내겠다 다짐했지만, 그가 정말로 제 옆이 싫어 죽음을 택했다면 진심으로 죽고 싶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기뻤다. 너무 기뻐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온통 피로 물든 얼굴이었지만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이제 남은 건 스승님을 찾으러 갈 수 있는 방법이다.’
태운은 순식간에 흑해를 불러왔다.
“몸은 필요 없겠지.”
태운은 비식비식 웃으면서 고작 한쪽 팔뚝과 반쯤 사라진 다리를 달고 있는 존재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머리만 남긴 채 온몸을 삭제시키기 시작했다. 동시에 제 선천지기도 조금씩 닳고 있었지만,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디에서도 들은 적 없는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하지만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찢어질 듯한 소리는 이자의 비명이었다.
자신을 미물과는 다른 상위의 존재라고 여겼던 자는 점점 세상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처음엔 그저 아주 작은 실수였다. 제가 몰래 숨어 들을 수 있는 주인 없는 세상을 발견했을 뿐이고 그 세상에서 탐나는 씨앗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너무 욕심을 부렸던 건지 제한된 사용 범위를 조금 넘겨 버린 의지가 다른 것을 불러들였다.
보통은 다시 의지를 행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에 조금 욕심이 생겼다. 어차피 불려온 미물은 정말 하찮음 그 자체였고 제 의지는 어쨌든 저 목표물을 제 입맛에 맞게 만들어 낼 테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상황이 조금 이상해졌다. 목표물의 기운이 조금씩 흐려졌고 그 후엔 외부의 생명력이 미세하게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 늦기 전에, 제한을 걸어 놨다면 적당히 유용한 것을 쥘 수… 있었을, 텐데…. 차라리 다시….’
그 작은 것들이 모이고 모여 결국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는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던 거다.
태운은 물론 그딴 사정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시현을 찾으러 갈 방법만이 필요했다.
그 순간 태운의 눈이 회색으로 물들고 입과 손에서 같은 색의 기운이 연기처럼 퍼져 나왔다. 그리고 이제는 머리 말고 거의 남지 않은 자에게 흡수가 되기 시작했다.
-동기화를 시작할까요?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제는 눈을 회까닥 뒤집고 있는 놈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