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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자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헌터란다-103화 (103/146)

#103

“그, 미안합니다.”

시현은 얌전히 소파에 앉아서 사과를 건넸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차가운 분위기에 주변을 다시 훑고 뒷덜미를 느릿하게 긁적였다.

태운이 뚫고 들어온 곳은 공간이 어그러진 거처럼 너덜거리고 있었고 그 아래 바닥은 발산하고 있던 내기로 인해 까맣게 타들어 가 상처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태운은 그 사실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시현의 손만 잡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이 상황이 혼란스러운 건 시현도 마찬가지였다. 자다가 눈떴더니 제가 없어 득달같이 찾아왔다는 것이 걱정돼 말하고 있지 못할 뿐이지 당장이라도 어떻게 찾아왔냐, 그 검은 어떻게 된 거냐 묻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불청객이 들어와 대화가 끊겼지만, 다시 말씀드리자면, 아까 말씀 주신 대로 저희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레이첼의 말에 시현은 아직도 뚱한 표정을 하고 있는 태운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

“저도 같이 가지요.”

앞을 향하고 있던 시현의 고개가 휙 하고 옆으로 다시 돌아갔다. 제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무척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는 태운의 표정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설명이야 나중에 간단히 해 줄 생각이긴 했다. 죽어 간다는 말은 숨기겠지만 그만큼 몸이 계속 안 좋아질 거란 거, 그리고 이번 일을 할 수 있는 게 자신밖에 없다는 것. 분명 그거론 완전히 납득하진 못할 테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설명을 한다면 제 말에 따라 줄 거라고 그리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다.

“안 돼.”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마음 같아선 묻어 둔 말들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네 능력이 불안정하고 어차피 세네아즈들에겐 소용이 없다는 말이었다. 늘 출중한 능력으로 승리만 거머쥐어 왔던 태운이 그런 말을 들으면 자책하고 실망할 것이다.

“역시 제 능력이 온전치 못한 게 믿음이 가지 않아….”

그리고 태운은 그런 시현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간격 없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잔뜩 눈썹을 기울이고 의기소침해진 게 누가 봐도 많이 상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자 다시금 시현의 눈동자가 바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상황을 주시하며 조용히 있던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당신 능력이 온전하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상대하려는 자들을 이 세계가 아닌 외부의 존재들. 그들에게 힘이 닿는 이는 정시현 씨뿐이니 그만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기다리세요. 시현 씨가 일을 끝내면 당신의 문제도 해결될 테니.”

말이 길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를 박살 내는 데는 충분했다. 시현은 결국 얼굴 위로 손을 텁 소리가 나도록 올려 감싸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태운은 그런 시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 미동도 없이 단정하게 앉아 있는 레이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외부의 존재들이라….”

예상만 하던 것들은 확실해졌고 이제야 조그맣게 비어 있던 것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잡다한 생각들은 하나로 합쳐지고 원인과 결과를 도출해 냈다. 이제는 움직일 차례였다. 태운은 여전히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세네아즈의 영향력을 치우는 데에 도움을 주겠다. 내 목숨이 달려 있다니 내가 알아서 해야겠지. 그러니 다신, 스승님과 내 대화에 끼어들지 마.”

“뭐?”

태운이 말을 건넨 건 레이첼이었지만 시현 또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망치 같은 게 머리를 후리는 기분이었다. 저 입에서 나온 세네아즈라는 단어에 머릿속은 엉망으로 꼬여 들었다. 태운이가 대체 그들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던 건지 조금도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레이첼도 그 사실은 뜻밖이었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아무리 외부 존재들이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들의 이름까지 아는 건 이 단체 안에서도 두어 명이 채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너, 네가 어떻게….”

“지금은 저 믿고 따라 주세요. 이따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침묵을 가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떠듬대는 시현에게 태운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태운의 표정은 평소 같지 않게 무척이나 심각했다. 하다못해 바로 전이랑도 미묘하게 달랐다.

시현은 당장이라도 묻고 싶은 질문들은 속에 잘 갈무리해 놓고 얼떨떨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운은 그제야 걸고 있던 미소를 지우더니 곧 레이첼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들의, 세네아즈의 신체를 흡수한 적이 있다.”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사실은 이 방의 분위기를 다시금 얼어붙게 했다. 특히나 시현은 차마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경악한 얼굴을 한 채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세네아즈며 종말이며, 그리고 그자들을 쫓아낼 능력을 자신만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도 고작 만 하루가 됐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보다 익숙하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태운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자신이 태운에게 많은 걸 숨긴 만큼 태운도 제게 숨기는 게 없지는 않을 거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러나 이건 너무 커다란 비밀이 아닌가. 하지만 시현이 당혹감에 어쩌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동안 레이첼과 태운의 대화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 그걸로 충분히 설명이 다 됐습니다. 충분히 도움이 되겠군요.”

“그러니 거래 내용을 바꾼다. 고작 몇 개의 지원을 받고 혼자 움직이지 않아. 대충 어떤 놈들이 이 짓거리를 돕고 있는지도 알고 있으니 네가 데리고 있는 것들까지 한꺼번에 움직여 속전속결로 해결한다.”

그날, 시현이 빛 속으로 사라지고 게이트가 깨져 가는 순간. 균열 안쪽에서 왠지 기시감이 드는 눈과 마주쳤었다. 그자의 눈은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태운은 곧 얼마 전 시현에게 살살 눈빛을 보내며 능글대던 이를 떠올렸다.

“그러니 스승님과 내가 신의 광산인가 뭔가를 박살 내는 동안 너희가 량차오샤의 본거지를 함께 털어 발을 묶는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지금도 저들이 자꾸 터트리는 폭발 게이트 때문에 인력을 맘대로 움직일 순 없어요.”

태운은 지긋이 레이첼을 바라봤다.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자 오히려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 말은 곧 정말 시현 혼자 달랑 보내 부려 먹으려고 했다는 것이니까.

한쪽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태운은 당장이라도 고작 그따위 전력으로 무언가를 해 보려 했냐 빈정대려 했다. 하지만 급히 끼어드는 목소리에 얌전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잠깐! 잠시만!”

시현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서야 정신을 붙잡고 대화를 멈췄다.

이제 당황스러움을 넘어서 어이가 없었다. 지금 이따위 상태로는 그 어떤 것도 선택하거나 결정을 내려선 안 됐다. 시현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잠시 시간을 주시죠. 제가 아무래도 모르고 있는 게 무척 많은 것 같거든요.”

표정은 저절로 딱딱하게 굳었다. 제가 한 잘못이 있다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제는 뭘 구하고 지키고 자시고 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태운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만들어진 세 명의 모임은 금방 파했다.

딱 봐도 좋지 않아 보이는 시현의 표정과 목소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제 뒤를 우물쭈물하며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태운의 존재 때문이었다.

시현은 터벅터벅 앞서 걷다가 제가 지내던 방의 문을 앞에 두고 덜컥 멈추어 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물기 어린 목소리가 어깨 너머에서 들려왔다.

“스승님, 저는 스승님이 제가 여기까지 찾아온 걸 알면 저를 싫어하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처음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당신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제가 어떤 상황이었든 함께 있는 것 말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그래도 저를 외면하지 말아 주세요.”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현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자신은 태운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그냥 모른 척하며 지내왔던 순간순간 동안 정말 많은 걸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아 본인에게 화가 난 것뿐이었다.

시현은 결국 몸을 돌려서 소리 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태운의 손을 잡고 그간 지내던 방이 아닌 옆방의 문을 열었다. 인기척도 없이 비어 있는 곳이었다.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그동안 너무 많은 걸 못 보고 있었던 내가 한심한 것뿐이야.”

“….”

태운은 크게 상심한 시현의 얼굴을 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잠시 망설여졌다. 하지만 이제는 더 미룰 수 없었다. 기억은 한순간에 해일처럼 밀려 들어왔다.

시기는 시현이 사라지고 난 바로 뒤였다. 그때 남은 거라곤 배신감과 절망뿐이었다.

***

‘스승님은… 날 버리고 떠날 수도 있는 거였어.’

어떠한 도검도 상처 내기가 힘들었던 피부를 가르고 손톱이 파고들었다. 꽉 쥔 주먹에선 곧 핏물이 새어 나왔지만 금방 시현에게서 흘러나온 피와 섞여 흐려졌다.

제 처지가 무척이나 처참하고 비참했다. 그는 간혹 언제든 떠날 사람처럼 굴었고 동시에 제 흔적을 남기는 걸 많이 꺼렸다. 하지만 태운은 그런 찝찝함을 모른 척해 왔었다. 그가 저를 두고 어디 가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제 오만이었다. 헤어짐은 이토록 쉬웠다. 날뛰던 심정이 비틀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명계든 어디든 뒤집어엎더라도 당신을 찾아내겠다. 그리고 절대 놓아주지 않겠어. 이젠 싫어하더라도 상관없으니까….’

음울한 기운이 이내 형상을 갖추고 주변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온기가 남은 시현의 몸을 꼭 안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태운의 얼굴과 몸이 안개 같은 기운에 가려졌다. 마치 그날 그 궤짝에 다시 가두어지듯 말이다.

‘그냥 다 그만둘까….’

문득 태운은 곧 머리가 어질하고 불쑥 치솟는 이상한 충동에 힘이 빠졌다. 방금까지도 당장 움직이려고 하던 의지가 점점 흐려졌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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