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태운은 하정이 몸을 돌리자마자 앉아 있는 시현의 옆으로 위치를 옮겨 바짝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틈 없이 껴안고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특유의 건조하고 탄력 있는 피부가 뺨과 콧등, 입술에 차례대로 닿아 왔다.
후웁.
이내 크게 숨을 들이마신 태운은 제 머리통을 꾹꾹 밀어 내는 손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몸에 잔뜩 힘을 준 채 길게 뻗은 목을 입술로 꾹 깨물었다.
“읏, 잠깐, 잠깐만.”
하정이 있는데도 이렇게 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기겁한 시현은 태운을 다시금 밀어 냈다. 차마 크게 낼 순 없는지 그 와중에도 낮게 낮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태운은 목덜미를 붉게 물들이고 잔뜩 흔들리는 눈으로 하정과 저를 번갈아 바라보는 시현에 작게 웃었다.
“저 봐 줘요.”
그리고 어리광 부리듯 다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시현은 그런 태운을 어쩔 줄 모른 채 바라보다가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한숨을 푹 내쉬고는 품으로 파고드는 태운의 머리통을 슬쩍 감싸 안았다.
뺨에 닿는 손이 조금 뜨거웠다.
태운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보이는 빗장뼈 부근을 빤히 살폈다.
시현은 늘 몸부터 붉어지곤 했다. 그리고 나선 단정한 이마, 그다음이 되어서야 얼굴까지 붉어지는 것이다.
‘보고 싶다.’
한마디로 저 천 조각 안쪽은 이미 달아올라 있을 거란 뜻이었다. 그 모든 걸 하나하나 제 눈과 머릿속에 박아 두고 싶었다.
물론 그러려면 또다시 혼자 움직이려고 하는 스승님을 그 자리에 멈추게 만들거나 저를 떼놓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태운은 그가 미묘하게 어색한 행동을 할 때부터 망설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내공을 흘려 주변을 확인했다. 그렇게 그가 저 몰래 전음을 하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전음을 훔쳐 듣는 것쯤은 능력이 있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전음의 방식이란 내기에 음성을 실어 보내는 것이었고 쏘아진 내기를 파헤치는 건 제가 가장 잘하는 것들 중 하나였으니까.
시현은 물론 하정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음을 훔쳐 들어도 풀리지 않는 사실들과 그에 따른 의문들은 제게도 남아 있었다. ‘저 모든 말이 정말로 다 사실일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것들 말이다. 물론 사실이 어떻든 일단 시현이 이대로 제 곁에 있는 게 먼저였기에 고민은 짧았지만.
‘뭐가 됐든 절대 혼자 보낼 순 없어.’
일단 밤에 대답하러 간다고 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당연히 시현 저 혼자 가겠다는 말일 테다. 태운은 차갑게 내려앉은 눈을 번뜩였다.
자신은 스승님의 약점이었다. 능력의 고하를 떠나서 시현은 늘 저를 아끼고 소중히 다뤘다. 그런데 시현의 말 사이에 자꾸 등장하는 레이첼이라는 인간은 자꾸 제 목숨을 언급하면서 빠르게 움직이길 종용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흔들어 대는 통에 대화하는 동안 시현이 많은 것을 흘리고 캐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가서 저들의 속셈이 뭔지 아주 낱낱이 파헤쳐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만약 거짓이나 불온한 의도를 가지고 저를 들먹인 거라면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태운은 눈앞에 자리한 시현의 티셔츠 목 부분에 손끝을 걸어 죽 끌어 내렸다가 식겁한 시현이 득달같이 내뱉는 잔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
시현은 아직 몸이 좋지 않을 테니 푹 쉬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부득불 방으로 들여보낸 태운의 동태를 은밀하게 살폈다.
태운이가 비록 저보다 능력이 좋다지만 그것도 깨어 있을 때나 해당하는 얘기였다. 물론 잠귀도 밝아서 티 나게 움직이면 깨긴 했지만 그래도 내공을 다 회복하고 능력도 예전의 경지까지 거의 다 끌어 올린 자신이 맘먹고 은밀히 움직인다면 자는 동안은 몰래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다.
예전에 그쪽 세계에서 살 때도 몇 번을 이렇게 마을을 다녀오거나 짧은 퀘스트를 하러 다녀온 적이 있었다. 처음 하는 짓도 아니라서 딱히 긴장되지도 않았다.
‘아까 전에 잠금장치도 이미 싹 다 풀어놨지.’
혹시 몰라 티비도 틀어 놓은 상태였다. 저 백색 소음에 아주 미세한 소리는 손쉽게 숨겨질 것이다. 이중 삼중으로 만반의 준비를 한 시현은 천천히 일어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현은 조심히, 그러나 빠르게 움직여 밖으로 나가는 문을 슬며시 움켜잡고 밀어젖혔다.
그때까지도 특이한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현은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얼마 전 레이첼을 만나러 가던 길을 걸으면서도 기척을 한계까지 숨기는 걸 잊지 않았고 혹시라도 소리를 낼 만한 모든 것들을 피했다.
“후우….”
이제 그 계단, 그리니까 입구 앞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5분이면 올 걸 20분이나 걸려서 도달했다. 시현은 작게 숨을 몰아쉬곤 챙겨온 초록색 응집석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비장하게 발을 옮겼다.
마음은 정했다. 가서 알겠다고 말을 전하고 최대한 저들의 모든 지원을 싹 끌어모아 최대한 일을 빠르게 끝낸다. 그리고 그동안 태운과 하정의 거취를 맡기고 안위를 돌봐 달라고 거래 내용을 더해야 했다. 그리 부담이 될 만한 내용은 아닐 테니 받아들여질 확률도 높았다. 시현은 조금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쓸고 가는 기운이 사라지자 눈을 번뜩 떴다.
“빨리 결정하셨군요.”
“…대신 필요한 게 있습니다.”
이제는 조금 익숙한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은 그에 망설이지 않고 생각했던 바를 풀어놨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모든 걸 다 서포트하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말을 하는 자는 레이첼, 그러니까 마치 모든 걸 아는 것처럼 말하던 그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간의 기억은 흐릿하나마 유지하고 있다고 했으니 말을 하는 것이 딱히 어렵진 않았다. 어차피 그자는 더 이상 말하기 힘들 거라 했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레이첼과 의견을 나눠야 할 테다. 시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조건에 대해 늘어놨다.
“먼저 태운과 하정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기, 약물 등 전적인 지원이 있어야 할 겁니다. 저는… 최대한 이 일을 빠르게 끝낼 생각이거든요.”
뭐가 됐든 남이 시켜서 하는 것보단 본인이 간절해서 움직이는 게 더 효율은 좋을 것이다. 목표는 다르더라도 그곳으로 향하는 수단은 같았으니 전폭적인 지원도 이미 생각하고 있던바,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레이첼은 단단히 결심한 듯한 시현의 대답을 들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그때 망설임 없이 대답하던 레이첼의 말이 멈췄다. 그리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파에 시현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최근에 본 현상과 아주 비슷한 방식이었다. 시현은 빠르게 주변을 스캔한 뒤 레이첼의 근처로 물러섰다.
‘어떻게 단 하루도 평화롭지 않을 수 있지?’
새삼 이 불안한 하루하루가 체감됐다. 그러나 곧 공간이 사람 키만큼 찢어지고 누군가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시현의 얼굴이 아주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태, 태운아….”
태운은 한쪽 손에 아주 익숙하게 생긴 검을 하나 들고 있었다. 검신까지 검은색 일색인 검은 태운이 들고 있어도 조금 크다 싶은 정도로 길었는데 그 검신을 타고 검붉은 내공이 위험해 보일 정도로 진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저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검이었다. 왜냐면 성인이 된 태운을 위해 개고생하고 얻어 낸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서프라이즈로 주겠다고 몰래 움직였다가 들켜서 태운이를 울게 만든 그런 추억이 깃들어 있는 물건이기도 했다.
‘저건… 분명 게이트에서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고….’
그 순간, 태운이 다시금 게임 캐릭터 따위가 아님을, 그 게이트가 진짜 존재하던 다른 세상임을 떠올렸다. 그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태운이 천천히 입을 뗐다. 그리고 그와 동시의 시현은 한숨에 그에게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 자꾸 왜 혼자 움직이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좋다면서요. 그거 다 거짓말이었어요? 정말 상처받을 것 같아요.”
“아니! 태운아, 그게 아니고….”
레이첼은 누가 봐도 하나도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눈물만 대롱대롱 매달고 있는 태운과 그거에 또 지나칠 정도로 과민 반응 하는 시현의 모습을 황당하게 쳐다봤다.
일단 이공간을 저렇게 찢고 들어올 거라고 예상도 하지 못했지만 들어와서 보이는, 한편으론 희극 같기도 한 모습은 자꾸 제대로 된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방금까지 주변으로 칼바람 날리면서 모든 걸 지원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것처럼 저를 내려다보던 남자와 저 앞에서 쩔쩔매는 남자의 괴리감에 순간 제가 꿈을 꾸나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레이첼은 갑자기 무언가 작용이라도 한 듯 가라앉는 혼란에 다시금 냉정하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저, 잠깐. 일단 대화부터 해야겠는데,”
그러나 모든 혼란을 내리누르고 힘겹게 꺼낸 말은 아주 철저히 무시당했다. 저절로 말끝이 작게 흐려졌다.
“태운아. 너 진짜 울어? 아니, 진짜 내가 설명할게. 네가 생각하는 거 다 아니야. 진짜야.”
“자다 일어났더니 스승님은 또 없고… 진짜, 미워요.”
“뭐? 야아… 다음부턴 안 그럴게. 진짜 약속.”
언제 저 앞까지 다가갔는지 녹은 젤리처럼 딱 달라붙어 있는 둘은 마치 이곳에 다른 이라곤 없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크흠! 이만! 좀! 앉아서 대화를 하죠!”
사실은 저자가 정시현의 일행이기에 그나마 이렇게 보고만 있는 거지 안 그랬으면 당장 이 건물의 모든 인원을 호출해도 될 정도의 비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태평히 들러붙어 있다니. 이상하게 열이 받았지만 일단 상황을 빠르게 정리해야만 했다.
시현은 그제야 누군가 있다는 걸 자각한 건지, 머쓱한 얼굴을 하고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