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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자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헌터란다-101화 (101/146)

#101

이것저것 따지며 망설이고 있기엔 결국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게이트가 문제였다.

하나가 브레이크 되어 터지면 그쪽으로 인력을 몰아야 할 테고 그 와중에 다른 하나가 생기기까지 한다면 인력에 구멍이 난 만큼 피해는 중첩되고 막을 수 없어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나 혼자 편하게 뭉개고 있을 순 없어. 몸도 다 치료됐는데, 가서 일해야지.”

벌써 타국은 기하급수적으로 희생자가 늘어 가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금 한국은 잘 처리하고 있다지만 언제 빈 곳이 생길지 몰랐다.

시현은 당장이라도 돌아가려고 하는 하정의 태도에 단단히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또 이렇게 신세를 져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속 부채감과 죄책감을 일깨웠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로 애써 내리눌렀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나아가면 된다.

시현은 다시 한번 태운을 바라본 뒤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가 하정에게 전음을 날렸다.

[일단 내가 전음한 건 모른 척해 줘. 태운이가 모르게.]

갑작스러운 전음에 미세하게 움찔한 하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일 떠나겠다고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비밀스러운 얘길 할 것처럼 구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현은 일단 하정을 빨리 설득해야만 했기에 천천히 이해시킬 만한 시간이 없었다.

하정 또한 그 조급함을 느꼈는지 아주 잠깐 놀랐을 뿐, 원래 하던 이야기를 이어 가면서도 자연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긍정의 표시를 해 왔다.

“뭐, 하여튼 내일 바로 떠날 예정이니까. 그 전까진 좀 쉬려고.”

하정은 바로 하던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틀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푹 묻었다. 누가 봐도 무척 자연스러워 보이는 행동이었다. 시현은 그런 하정을 가리듯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이며 전음을 이어 갔다.

[부탁이 있어. 그리고 이걸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평소 같았으면 계속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을 하정도 이번만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는지 얌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시현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이 짧은 시간 안에 그 긴 시간의 기억을 설명한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그렇기에 이걸 믿어 줄지 확신은 없었지만, 뭐든 다 던져 봐야 했다.

[내가 드림 워크를 겪고 능력자가 됐다고 했지. 사실 아니야. 난… 그동안 아주 먼 곳에 갔다가 왔어. 아마도, 다른 차원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네가 믿기 힘든 얘기란 건 알아. 그렇지만 정말 진실만을 말하는 거니까 웬만하면 믿어 줬으면 좋겠어.]

움찔.

궁금했지만 딱 봐도 곤란해 보이는 시현의 얼굴에 그동안 모른 척해 왔던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시현이 평소 같지 않은 태도로 할 말이 있다고 했고 당연히 그동안 그를 보며 수상히 여겼던 기억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이제 좀 털어놓을 생각이 들었나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세상이라니.

하정도 이 말만큼은 너무 갑작스러웠는지 태연하게 얼굴을 유지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간 침묵이 이어지자 게이트도 있고 몬스터도 있는 마당에 뭔들 더 이상한 일이 생기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은 금세 가라앉았다.

하정은 금세 당황했던 안색을 평소처럼 되돌리곤 티비를 보는 척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을 꾸며 냈다.

[내가 당장 그동안의 모든 일을 세세하게 설명할 순 없어. 그렇지만 당장 말해 줄 수 있는 건 태운이가 점점 몸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과 그걸 해결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거야.]

분명 쉽게 믿을 순 없을 내용일 테다. 하지만 하정은 처음에 했던 반응 말고는 그 뒤로도 별다른 내색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시현은 그런 하정의 반응에 한시름 놓고 다시 그동안의 사정을 조금 더 설명했다.

물론 내용을 아주 많이 간추렸고 레이첼에게 들은 내용도 다 말하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는 겉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제 목표는 그 모든 걸 자세히 설명하는 게 아니었기에 설명은 과하게 길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만간 일을 해결하러 떠나야 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좀 부탁해.]

“와, 저거 미친놈이네~.”

이번엔 시현이 움찔했다. 티비 화면에서는 한참 말도 안 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하정이 진짜 저걸 보며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게.”

시현은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맞받아쳤다. 그러자 하정이 티비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홱 돌렸다.

너, 정말 괜찮은 거냐?

눈이 마주치자마자 하정은 입만 움직여 말을 건넸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시현의 눈에는 아주 선명하게 읽혀 들었다.

‘나는 괜찮다.’

이번 일만 해결한다면 정말 태운이를 살리고 이곳에서 안정적으로 함께할 수 있을 거다. 처음 목표도 단순히 편히 살게 하지 못하는 것들을 치우고 안온하게 사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 스케일이 무척 커지긴 했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괜찮아. 이번 일만 마무리하면 진짜 모든 게 좋아질 거야. 오히려 다행이지. 나라도 해결할 수 있다잖아.]

사실 태운에게 말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게 또 오해를 빚거나 관계를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 애가 죽지 않는 것이 제게는 우선이었다.

“그가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이쪽에도 섞이기 시작한 이상 어차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도 못할 테죠.”

“그러니까! 그럼 어떻게 된다는 건데.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하시죠.”

“…이곳에서도 쫓겨나고 다시 돌아가지도 못한다면 갈 곳은 하나뿐입니다. 외 차원. 그리고 대부분은 버티지 못하고 소멸합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생각들과 고민들은 잊은 지 오래였다. 자괴감과 불안함 그리고 미안함과 좌절 등 켜켜이 쌓인 마음의 짐들은 일단 모두 뒤로 미뤘다.

[그러니까 좀 봐주라. 내가 진짜 꼭 보답할게.]

하정의 얼굴은 그사이에 꽤 지쳐 보였다. 시현은 그런 하정을 곁눈질하다가 쓰게 웃으며 눈을 감고 눈가를 꾹꾹 눌렀다.

그때, 운기 조직을 하기 위해 얌전히 가부좌를 틀고 있던 태운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그리고 여전히 티비의 소음이 들리고 있는 곳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런 태운의 얼굴은 조금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감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는 네가 하려던 대로 해. 스승님의 말은 신경 쓸 필요 없다.]

흠칫, 하정은 머릿속에 파고드는 낮은 목소리에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반응하며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곳을 바라보고 있던 붉은 눈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미친, 다 듣고 있었다고…?

하정은 온몸을 타고 오르는 소름에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표정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눈도 깜빡 안 하고 바라보고 있던 태운은 고개를 슬쩍 기울이고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내 건 내가 챙길 테니, 가.]

한마디로 방해하지 말고 꺼지란 말 아닌가.

하정은 입을 떡 벌리고는 무슨 가슴 아픈 생각을 하는지 눈썹을 팔자로 주욱 내리고 얼굴을 감싼 채 한숨을 작게 내쉬고 있는 시현과 태운을 번갈아 봤다.

훔쳐 들었다면 지금 시현이 어떤 생각으로 제게 그런 말을 했는지, 그리고 본인이 지금 어떤 상탠지 알 텐데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말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새끼 이거 미친놈한테 단단히 걸렸네.’

그리고 이어진 감상은 이것뿐이었다. 시현을 찾기 위해 다른 세상으로부터 왔다는 사실부터 묘했는데 다시 한번 확신이 들었다. 정시현이 조금 불쌍했다. 사실은 조금 끼리끼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마저도 금세 사라지긴 했지만.

하정은 여전히 깜빡이지도 않은 채 저를 보는 빨간 눈을 피해 슬쩍 고개를 돌리고는 벌떡 일어섰다.

꺼지라고 하시니 꺼져 줘야지. 오히려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애초부터 저런 걸 돌보라고 한 정시현이 미친놈이었다. 이제 빨리 방에 들어가서 미리 상황 보고를 받고 움직일 준비를 하는 게 심신의 평화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 벌써 들어가려고?”

누가 봐도 근심 걱정 달고 있는 사람처럼 눈을 감은 채 마른세수하던 시현이 벌떡 일어서는 하정을 따라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그래.”

“왜?”

아무래도 하정의 대답을 확실히 들은 게 아니다 보니 시현은 조금 더 설명을 해야 하나 마음이 급해졌다. 다시 전음이라도 보내 붙잡을까 망설일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언제 다가왔는지 알아채기도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 태운이었다.

“피곤하신가 보죠.”

태운은 상체를 기울여 뒤에서 시현의 앞으로 팔을 둘러 안고는 빙긋 웃으면서 어깨 위로 하얀 이마를 느긋하게 문질렀다.

하정은 절로 찡그려지려는 얼굴 근육을 붙잡고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피곤해서.”

“그랬냐… 들어가서 일단 좀 쉬어.”

시현은 한 손으로 제 어깨 위에서 하늘거리는 태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눈빛이 뭘 뜻하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가 갑작스레 말한 사실들에 충격을 받았을 텐데 미안하다, 걱정된다고 하는 그런 류의 감상들이겠지.

솔직히 자신이 아예 모르고 있다 얻어맞듯 알게 된 것도 아니었고 얼추 수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기에도 웃긴 상황이었지. 오히려 설명을 듣자 부분 부분 비어 있던 것들이 아주 칼같이 맞춰져서 속이 후련할 정도였다.

3년 동안 사라져 있던 것, 시현과 관련된 협회의 이상한 점들, 흑접 수장과의 관계, 아무리 드림 워커라고 해도 과하게 강하고 능숙한 스킬 운용, 그와는 상반된 무지와 살상을 하는 데에 망설임 없는 손속 등.

그런데도 아직 저런 반응이라니, 참 눈치도 없고 그게 여전히 정시현 같아서 절로 고개가 내저어졌다.

“들어갈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말해.”

하정은 뒤에 있는 놈이 잡아먹을 듯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제 앞의 시현을 보며 허 하고 숨을 내뱉은 뒤 몸을 휙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조금 더 빨리 꺼지라는 신호를 보내듯 당황 어린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으. 야, 야. 잠깐.”

저, 지긋지긋한 놈들.

하정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이제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문을 세게 열어 쾅 소리를 내며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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