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샤워는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사실 이미 씻는 건 끝났지만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게 맞았다.
문밖에는 여전히 태운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원하게 물을 맞고 나니 이제야 제대로 된 이성이 돌아와 정말 저 애를 볼 엄두가 안 났기 때문이었다. 제 마음도 같다 말한 것은 좋았지만 그 말과 이후의 모든 단계를 건너뛰고 냅다 입술부터 들이박은 게, 그리고 얌전히 받아들인 게 너무 말도 안 됐다.
정말 이럴 생각은 없었다. 제대로 고백하고 그동안 모른 척하며 힘들게 한 것도 사과하고 그다음엔 데이트도 하며 제대로 된 관계 형성을 하려고 했단 말이다. 그런데 밥을 먹기도 전에 밥상을 엎어 버렸다.
‘물론 좋긴 좋았지만…. 악!’
순간 아주 불순한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시현은 흠칫하며 벽을 콱 쳤다. 주먹 아래로 아주 작게 실금이 생겼지만, 시현은 그걸 알아챌 정도의 정신이 아니었다.
‘미친 자식아. 어른인 네가 잘 조절해야지 휘둘리면 어쩌자고.’
차라리 하정이 같이 있는 게 나을까 싶었지만, 이 오밤중에 하정을 불러서 거실에 있으라고 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
‘아, 젠장. 어떻게 하지.’
똑똑.
그때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던 시현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얼음처럼 굳었다.
“다 씻으신 거 압니다. 빨리 안 나오시면 문 부술 겁니다….”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시현은 허겁지겁 수건을 머리 위로 둘러쓰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당연하게도 커다란 인영이 그 앞을 막아서고 있었지만 수건 덕분에 시야가 대충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작은 방어막에도 괜히 마음이 놓인 시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아주 절묘한 손놀림으로 수건이 휙 하고 벗겨졌다. 시현이 어떻게 잡아채지도 못할 만큼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어엇!”
“스승님이 무슨 타조입니까? 얼굴만 가리면 다예요?”
멀쩡하게 식었던 피부가 점점 다시 달아올랐다. 물론 지금은 쪽팔린 게 원인이었다.
“머리가 안 말라서 덮어 둔 거거든?”
“흐음… 다 마른 것 같은데.”
태운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바짝 마른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어 와 두피를 손끝으로 살짝 긁어내렸다. 소름이 돋는 것과 동시에 나오기 전 습관처럼 내공을 돌려 몸의 수분을 다 날렸던 게 떠올랐다.
‘아, 미친.’
애초에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해 놓고 그것도 1초 만에 들켰다는 걸 깨달은 시현은 속으로 멍청한 저를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쪽팔렸다.
“왜 이렇게 귀엽지.”
그리고 이어지는 태운의 말은 정말 제 몸이 오그라들게 만들고 있었다. 시현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빙글빙글 웃고 있는 태운에게 버럭 말을 내뱉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징그럽게. 귀여운 건 너지. 내가 아니고.”
팩트는 팩트였다.
태운은 그런 시현의 말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푸스스 웃으며 시현을 덥석 껴안았다. 오랜만에 듣는 큰 웃음소리에 시현도 순간 놀라서 움찔했다가 이내 비식 웃었다.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이렇게 좋다는데.
그동안 매번 툴툴대고 까칠하게 굴고 아파하고 힘겨워하는 모습만 보다가 예전처럼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니 괜히 가슴께가 간지럽고 기분이 좋았다. 그래, 이제 이대로 다시 처음부터 차근히,
“하아. 계속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요.”
순간 몽글몽글한 감상이 태운의 말에 금세 깨졌다.
“키, 아니, 뭐가 됐든 이제, 안 돼.”
시현은 벌써 손을 움직여 제 등을 쓱 쓸어내리는 태운을 거침없이 뚝 떼 놨다. 슬슬 불만으로 차오르려 하는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 왔지만, 시현은 그 모습을 애써 모른 척해야 했다. 눈썹을 축 늘어트리고 입술을 불퉁하게 내민 채 손끝을 슬며시 잡아 오면 정말 말문이 콱 막혔기 때문이었다.
“왜요….”
“….”
절대 이유를 말할 순 없었다. 자신이 모든 게 처음이라 이런 관계에 대해 공부 좀 먼저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샤워하는 내내 했던 걸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관계라는 게 조금만 엇나가도 흐트러지지 않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절대로 이 관계를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기에 시현은 정말 처음부터 잘하고 싶었다. 물론 그래도 자신이 연장자이고 어른인데 자존심 상하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기 싫은 마음도 한몫했다.
“또… 말없이 밀어 내시려고….”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그러나 시현은 순식간에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며 울먹이려는 태운에게 약해져 단단히 결심한 것도 잊고 안절부절 입을 뻐끔댔다. 이걸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꾸 입을 다물면 애가 저렇게 서운해하는데 어찌할 바를 몰라 자꾸 식은땀이 났다.
“왜, 왜 그래, 울지 마.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요… 이유, 안 알려 주실 거예요?”
태운은 눈썹을 팔자로 축 늘이며 그 큰 눈에 눈물을 달고 저를 빤히 바라봤다. 촘촘한 속눈썹에 엉긴 눈물방울들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렸지만 떨어지진 않아 보는 사람을 애타게 했다. 하지만 시현은 그때까지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태운이 도톰한 입술을 삐죽 내미는 순간 얼굴에서 빛이 나며 시현의 망설임을 순식간에 불태웠다. 물리적으로 눈을 찌르는 게 아닐 텐데도 순간 미간이 좁혀지고 눈이 감겼다.
난 정말 망했어.
“아니, 내가 처음이라… 잘 몰라서, 그러니까. 좀…. 알아볼까 하고.”
시현은 결국 작게 웅얼대며 비밀을 털어놨다. 반쯤은 해탈한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자 더 민망해졌다. 아마 서울역에 가서 스트립쇼를 해도 이만큼 민망하진 않을 것 같았다.
태운은 그런 시현을 빤히 내려다보며 터져 나오려는 숨을 꾹 참아야 했다. 그동안 열반에 열 번은 올라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많은 것을 오랫동안 참아 왔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지금이 고비였다.
하지만 다시 얼굴을 붉히고 안절부절못하며 제 앞에서 꿈질대는데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차라리 아예 몰랐으면 몰랐지, 이제는 정말 거대한 충동이 앞뒤 모르고 날뛰고 있었다.
애써 꾸며 낸 처연한 얼굴도 점점 굳어 가고 입이 말랐다.
이제는 시현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대체 왜 저렇게 하나하나 모든 행동이 제 심장을 쥐어짤까. 왜 이렇게 사랑스러워서는 저를 미치게 할까.
“그, 그러니까! 좀 참아! 내가 제대로 공부 좀 해 볼 테니까!”
태운은 늘 그랬듯 한 발짝 물러섰다. 결국 시현에게 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번만은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지만 완전히 다 원하는 대로 해 드릴 순 없지.
태운은 안심한 듯 숨을 길게 뱉은 시현에 괜히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리고는 재빨리 입술을 가져다 댔다.
생각지도 못했는지 가느다란 호흡이 느껴졌다. 그 호흡을 한입에 삼키고 말랑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빨아들였다. 심통 난 마음이 조금은 잠재워지는 것 같았다.
***
얼떨결에 키스까지 하고 난 뒤. 시현은 다른 의미로 태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자꾸 입술만 확대되어 보이거나 멍해져서 남이 하는 말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처럼 말이다.
“야, 정시현. 내가 하는 말 다 알아들었냐?”
“어어?”
“하아… 이거 또 이러네.”
시현은 흘끔흘끔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하는 태운을 훔쳐보다가 퍼뜩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주 환멸에 가득 찬 시선이 보였다. 조금 민망해져 목덜미를 느릿하게 문지르던 시현은 미안하단 말과 함께 눈을 크게 떴다. 이제부터 집중하겠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하정은 그런 시현을 보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 이제 협회로 돌아가 보겠다고.”
“뭐?”
어찌 보면 예상했던 말이었지만 제대로 쉬지도 않고 하루 만에 떠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시현이었다. 게다가 지금 헌터 협회라고 해도 수상한 상황이지 않은가.
분명 제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빌런 연합, 그리고 그에 의해 부서진 일을 윗사람의 명령으로 급히 처리했다고 했다. 아무리 협회가 빌런 엽합을 쫓고 있다지만 충분히 의심이 가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친구를 적진일지도 모르는 굴로 아무런 조치 없이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하정을 막으려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조리 다 설명해야만 했다. 납득하지 않으면 행하지 않을 사람이란 건 제가 가장 잘 알았으니까.
“그쪽이 수상하단 건 알아. 그래서 나도 너를 도와주기로 했던 거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무단으로 계속 자리를 비울 순 없어. 특히 폭발 게이트가 계속 나타나는 이런 상황에.”
사실 오늘 아침부터 하정에게 미친 듯이 연락이 밀려들었다. 잃어버렸던 핸드폰을 찾고 다시 전원을 연결했을 때였다.
가장 처음은 규민과 유준이었다. 잠시 잊었던 게 미안할 정도로 그들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시현과 하정, 태운의 귀환을 환영했다.
“흐어엉. 형님 진짜 다행입니다. 저는 정말 다들 어떻게 되신 줄만 알고. 근데 이 자식들이 진짜 계속 협박을 하지 뭡니까! 당장 법적 보호를 박탈해 가겠다는 둥 어쨌다는 둥. 그런데 만약 진짜 그렇게 되면 형님이랑 태운 님이 돌아올 때 문제가 될 테고…. 훌쩍. 그렇다고 무시하기엔 어린 유준이를 혼자 둘 수도 없고…. 저희끼리 돌아와서 어찌나 죄송했는지, 아 지금 또 오라고… 하, 진짜 당장 형님을 뵈러 가고 싶지만….”
규민은 여전히 정말로 말이 많았다. 그러나 오랜만에 듣는 기다란 수다가 퍽 반갑게 느껴져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물론 턱을 괴고 저를 빤히 보는 태운에 금세 웃음을 멈춰야 했지만 말이다. 그 후로는 울음에 뭉개져 알아듣기 힘든 유준의 말을 열심히 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들과의 전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도 어찌 됐든 나라에 등록되어 있던 헌터였기에 쉬지도 못하고 게이트 처리에 끌려다니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들과의 전화가 끝나곤 온통 도움을 요청하는 연락이었다.
결국 하정은 반쯤 타의로 돌아갈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