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작았지만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용만은 아주 또렷하게 머릿속에 박혔다. 태운은 잠시 눈을 치떴다가 시선을 내려 시현의 목덜미를 흘끗 바라봤다. 연하게 달아오른 피부가 무척이나 선명했다.
고작 목소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 따위로 저 속을 다 알아낼 순 없겠지만 지금 뭔가 모르게 아주 작은 기대감이 싹텄다.
“그럼 안아도 돼요?”
“…그래.”
역시나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태운은 멍하니 내리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저를 안고 있는 시현을 마주 안았다. 한두 번 포옹을 한 게 아니었음에도 손끝이 덜덜 떨렸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맞닿은 몸을 통해 들킬 것만 같았다.
태운은 주책맞게 요동치는 제 심장에 헛웃음을 짓고는 품 안에 들어온 몸을 더 꽉 껴안았다.
“따듯해요.”
“내가 원래 체온이 높잖아.”
평소 같은 덤덤한 말에 입 밖으로 작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태운은 시현의 목덜미에 코끝이 눌리도록 깊게 얼굴을 묻고 느릿하게 문질렀다. 건조한 피부가 입술을 스쳤다. 이쯤이면 냅다 저를 밀어 낼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시현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있던 손을 움직여 토닥이듯 몇 번이고 등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너무 좋아요.”
순간 열심히 움직이던 시현의 손이 멈췄다.
“크흠…. 그, 그래.”
태운은 여전히 저를 안은 채긴 했지만, 슬그머니 등에서 손을 떨어트리는 시현에 껴안고 있던 몸을 먼저 떼어 내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바로 앞에 시현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옅게 물든 목과 이마, 그리고 이미 붉게 타들어 가고 있는 귀 끝. 그리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저쪽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의 방향.
어쩌면….
싹튼 기대감이 급격하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스승님은요?”
순간 주변이 무섭도록 고요해졌다. 제 안에서 요동치는 심장 소리만 선명했다. 그때 그 박동 위로 말소리가 겹쳤다.
나도. 나도 좋아.
속삭이듯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태운은 그런 시현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큰 눈을 반쯤 접어 예쁘게 눈웃음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시현이 방어할 새도 없이 얼굴을 아주 가까이 들이밀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기겁한 시현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둘 사이의 공간은 겨우 한 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야, 야.”
“스승님 얼굴이 빨개요.”
“네, 네가 얼굴 들이밀고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시현은 근처에서 느껴지는 호흡에 숨을 제대로 내뱉지도 못하고 우물우물 말을 내뱉었다.
이 애를 안 게 벌써 10년이었다. 그동안 가끔 별 감상이 다 들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날뛴 적은 없었다. 제 감정이 다르다고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지 한번 마음을 인정하자 언제 이렇게 꾹꾹 눌러놨는지 온갖 감정이 팝콘 터지듯 이리저리 튀어나오고 있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제 체취마저도 괜히 신경 쓰였다. 닿아 있는 태운에게서 나는 향기 때문에 제가 더 더러운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 옛날에 피에 푹 젖은 채 몇 날 며칠 동안 전투하며 온갖 꼴을 다 보여 준 사이였지만 지금은 그딴 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먼저 좀 씻을 걸 그랬나. 제길.’
시현은 속으로 생각 없이 태운이부터 덥석 안은 제 행동을 작게 자책했다. 그리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몸을 돌렸다.
“자, 잠깐만. 너 일단 몸은 괜찮아 보이니까 나 좀 씻고 얘기를,”
“싫어요.”
그러나 별 소용 없는 반항은 금세 무위로 돌아갔다. 시현은 태운에게 양팔이 잡혀 그대로 원래 자세로 휙 돌아왔다.
시현은 계속해서 시선을 피하고 있던 것도 잊고 태운과 정통으로 눈을 맞췄다. 흔들림 없이 단단한 붉은 눈과 마주치자 몸이 어딘가에 옭아 매이기라도 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태운의 눈은 언제 제가 눈치라도 봤냐는 듯 예쁘게 휘어 있었고 붉은 입술도 완만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입 맞춰 주세요.”
그 얼굴만으로도 충분했건만 쐐기를 박듯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시현을 멍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청천벽력처럼 때려 박힌 말에 시현은 몇 번 입을 뻐끔대다가 눈까지 뜨거워질 때가 되어서야 제 얼굴이 타들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이 발랑 까져 가지고….
태운에게 양팔을 잡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던 시현이 급히 주변을 휙 돌아보곤 하정이 들어간 방문을 바라봤다. 거리가 멀지는 않아 조금 큰 소리를 내면 들릴 만했다.
시현은 잡혀 있던 한 손을 뿌리치고 바로 앞에 다가와 있던 허연 얼굴을 슬쩍 뒤로 밀었다. 그 와중에도 손바닥에 닿아 뭉개지는 부드러운 살갗에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나중에.”
아무리 제가 마음을 인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지만 이건 너무 빠르지 않나. 그래도 조금 천천히 손도 잡고 포옹도 하고 뭐 그런 단계가 있어야지. 아무래도 조금 공부를 해야겠….
“알겠어요.”
구구절절 이어지던 생각이 끝을 맺기 전에 대답이 들려왔다. 역시 태운은 제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시현은 그동안 조금 말썽을 피우긴 했지만, 여전히 착한 태운의 태도를 보곤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착하, 읍.”
순간 입술이 부드럽게 부딪혔다.
시현은 눈을 커다랗게 부릅뜨고 코앞에 놓인 가지런하게 내려앉은 속눈썹과 높은 콧대를 멍하니 바라봤다. 눈을 감아야 한다 어쩐다 하는 이성적인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입 안으로 침입하는 촉촉한 살덩이에 저절로 눈이 콱 감겼다.
미친.
온몸이 감전이라도 당한 마냥 저릿했다. 제 뒤통수에 닿은 손이 머리칼을 헤치고 들어오자 두피까지 뜨겁게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이성이 밀어 내야 한다고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지만, 살과 살이 맞닿고 비벼지자 정신은 훽 하고 어디론가 날아가고 말았다. 순간 몸이 어딘가로 훅 꺼지는 것 같았다.
입 안을 느릿하게 휘저으며 유연하게 움직이는 존재감에 시현은 나무토막처럼 눈을 감고 굳어 버렸다. 그러나 곧 제 혀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에 크게 움찔 떨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걸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걸 놓치면 정말 어딘가로 끌려갈 것만 같았다.
‘시발, 너무… 좋아.’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잠시 입이 떨어졌다가 방향을 틀고 다시 붙었다. 분명 밀어 낼 타이밍이 있었지만, 시현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붙잡은 팔뚝을 더 세게 쥐었다.
타액에 젖은 입술이 몇 번이나 붙었다 떨어지며 작게 촉촉대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 소리마저도 자극적이었다.
‘미친, 미친.’
그때 시현의 허리에 둘려 있던 태운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말 못 할 곳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시현은 그제야 어딘가로 내다 버렸던 정신이 급격히 되돌아오는 걸 느꼈다.
“자, 잠깐!!”
하나의 덩어리처럼 바짝 붙어 있던 둘이 휙 하고 떨어졌다.
온종일 전투를 해도 딸리지 않던 호흡이 흐트러져 숨이 막혔다. 시현은 바닥을 노려보며 힘겹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태운의 뒤에 있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도망이었다.
태운은 경공까지 써 가며 화장실로 들어가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문을 닫는 걸 얼떨떨하게 보다가 타액으로 젖어 촉촉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픽 하고 웃음 소릴 냈다.
시현은 문틈 새로 들려오는 그 웃음소리를 싹 모른 척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좋았지만 민망하고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쟤는 대체 어디서 저런 걸 배운 거야?’
그때 미국에서도 느꼈었지만, 이상하게 이런 것들에 능숙한 것 같았다. 아무리 태운이 배우는 것마다 초단기로 습득하고 모든 무공마저 손쉽게 익혔다지만 그런 오성이 이쪽으로도 발휘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아, 씨 몰라. 일단 씻자.”
시현은 벌떡 일어서서는 옷을 턱턱 벗으면서 터덜터덜 샤워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계속 그 생각만 하다간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옆으로 보이는 거울에 시선이 갔다.
그 안에 보이는 저의 몰골이 말도 안 되게 추했다. 얼룩져 보일 정도로 여기저기 울긋불긋하게 달아오른 얼굴과 몸은 둘째 치고,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미세하게 부어서 붉어진 입술이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꼴이 아주 선명하게 가관이었다.
입술이 젖었….
“으악!”
시현은 옆에 걸려 있던 수건을 순식간에 잡아 쥐고 거울로 내던졌다. 비록 수건이 중력에 의해 힘없이 세면대로 떨어져 내리는 바람에 거울이 다시 시현을 비추었지만, 시현은 고개를 팩 돌리고 샤워 부스로 쏙 들어갔다.
‘미친, 얼굴이 무슨.’
지금은 얼떨결에 휘말렸지만 다신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진 않겠다 마음을 먹었다. 시현은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힘겹게 쓸어내리고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자꾸만 입술과 하반신을 맴도는 저릿한 감각이 가시지 않았기에 미칠 것 같았다.
‘이게 맞나?’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도 멀쩡한 20대 남자니 당연한 반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 미세한 반항은 수없이 밀려오는 그동안의 기억으로 인해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졌지만 말이다.
‘그래도 내가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했는데…. 아니, 아니다.’
더 이상 예전 일을 더 끄집어내면 정말 저 자신을 신고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시현은 그 유명한 경찰 캐릭터에게 자신이 잡혀 끌려가는 상상을 하다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느릿하게 샤워기 손잡이를 들어 올렸다.
“진짜 미친놈인가 나.”
방금까지 누군가가 샤워했다는 걸 알려 주듯 곧바로 따듯한 물이 쏟아졌다. 시현은 그 사실에도 움찔한 저 자신에 한숨을 푹 내쉬며 제 머리통을 몇 번이나 내려쳐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