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그들은 당신의 데이터를 가지고 더 세상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막아 보려 했으나 그들은 아주 교묘하게 움직였습니다. 차원에 발을 들이진 않으면 그들도 바로 영향력을 발휘할 순 없지만 내가 조처를 하지도 못하니까. 그걸 이용한 것이겠죠.”
그때쯤부터 그들은 뚫린 길로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인해 채 온 다음 의지를 조금씩 심고 돌려보내는 걸 반복했다. 그리고 본인들이 이미 점령해 테라포밍을 마친 차원들을 게이트처럼 연결해 조금씩 목표로 삼은 차원의 영혼력을 흐트러트렸다.
한마디로 드림 워크가 시작되고, 세상이 게이트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부터란 뜻이었다. 시현은 그저 멍하니 바닥을 보며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사실 제대로 이야기가 머릿속에 들어오진 않았다.
그저 제가 죽지 않아서,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된 거라고. 그리고 태운이가 나를 찾으러 와서 죽을 위기에 처한 거고. 애초부터 둘은 같이 있으면 안 됐었다고. 이 문장들이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그래서… 대체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시현은 잠시 이야기가 끊긴 사이에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벌써 혼란과 패배감에 물든 얼굴을 한 채.
레이첼은 충격에 빠진 시현을 보며 빙긋 웃었다. 앞에 둔 사람의 표정과는 상반된 아주 예쁜 웃음이었다.
이 차원의 힘은 저 밖의 지식과 영혼력을 받지 않는 대신 이 세상을 지탱하고 이어 가는 것이었고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렇기에 세네아즈들이 깔아 놓은 저 이물질들에 타격을 주어 쫓아내는 건 이곳에서 살아온 자들로는 역부족이었다.
한마디로 몸속에 세균이 들어왔는데 맞서 싸울 백혈구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3년 만에 이곳에 돌아온 당신에게서 다른 게 보였습니다. 그들이 직접 쓴 의지력과 그걸 없애도 다시 힘을 쌓을 수 있는 가능성 말입니다.”
지금 활동하는 모든 능력자의 능력은 이곳에 차근차근 풀기 시작한 저들의 의지로 인해 발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파생된 것은 그 상위의 것을 공격하지 못한다. 아주 간단한 규칙이었지만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현은 그 씨앗을 다 거두어 갔음에도 본인이 가진 생명력을 기본으로 해서 능력을 미친 듯이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작은 기대가 확신이 됐습니다. 당신이 열쇠가 되어 줄 것이란 걸.”
시현이 그들이 꽤나 공들여 만든 게이트를 반쯤 깨부순 것도 모자라 그 피해에 휩쓸려 차원의 틈새에 빠졌으면서도 되돌아왔다. 그 확신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는 저 열쇠를 이용해 다시 세상을 되돌리는 것만 남았을 뿐이다.
***
달칵-
시현은 어떤 정신으로 밖을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앞으로 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멈추어 서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내 선택대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여기서도 나는 그냥 누군가가 정해 놓은 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였구나. 하.’
감정이 너무 뒤섞여 제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멀게 느껴지고 흐릿했다.
그게 왜 다 제 탓인 건지, 왜 제가 다 떠안아야 하는지 모든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고 화가 났지만, 그 분노의 가장 아래쪽에는 없앨 수 없는 자괴감이 깔려 있었다.
“그러니 가서 저 문들을 멸하십시오. 만약 저들이 다 물러간다면, 편법으로 이곳에 흘러들어온 작은 이물질 정도는 차원 사이클에 속할 방법이 생길 겁니다.”
뭐가 됐든 이미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이 됐고 주어진 길은 하나뿐이었다. 누구의 책임 때문이었고 사실은 이래서 그런 거였다는 가정들은 이제 쓸모없었다. 당장 제 손안에 태운의 생사가 쥐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하며 시간을 벌어 놨지만 제 선택은 결국 달랑 하나 남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뿐이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죽지만 않으면 돼. 힘들어도 언젠간 끝날 거야.’
결국 거래하겠다고 들어간 방 안에선 거래는커녕 부려 먹겠단 말만 듣고 왔지만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아니, 오히려 좋을지도 몰랐다. 태운의 상태가 왜 저러는 건지 원인도 알았고 타파할 방법도 찾아냈으니까.
배경이 이 차원이라는 걸로 거대하게 바뀌었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결국 저 사이비 놈들을 처리하고 안전하게 사는 것.
‘물론 태운이는 싫어하겠지만….’
설득하면 그래도 결국 이해해 주겠지. 그리고… 일단은 사과부터 하고.
시현은 어느새 도착한 방의 문을 노려보며 한숨을 푹 쉬고 문고리를 꽉 쥐었다.
“어, 왔냐?”
문을 열자마자 요란하게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정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냐?”
“배고파서.”
하정은 정말로 많이 배가 고팠는지 열심히 주방을 누비며 테이블 위에 찾은 음식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빵, 과자, 맥주가 꽤나 쌓여 있어 혼자서 먹을 수 있을까 걱정되는 양이었지만 시현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소파를 바라봤다.
등받이를 보이고 있는 가죽 소파 밑으로 조금 피가 흘러나와 있었다. 시현은 괜히 헛기침하곤 더러워진 바닥을 못 본 척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건가.’
레이첼과 대화를 하느라 시간이 꽤 많이 지났건만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하다니.
심장이 아릿하고 초조해졌다. 분명 아직은 괜찮을 거라 했으니 심각한 상황은 아닐 거다. 포션으로 잘 회복도 됐으니 이제 단순히 피곤해서 자는 걸 수도 있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시현이었지만 감정은 숨길 수 없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멈칫.
온갖 잡다한 걱정에 빠져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던 시현은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있어야 할 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급히 소파로 다가갔다.
여기저기 묻어 있는 핏자국. 그것 말고는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태운이는?”
시현은 곧바로 하정이 있는 주방으로 몸을 틀고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하정에게서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저 끝에 있던 문이 달칵 열리며 옅은 수증기가 빠져나왔다.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조금 놀란 듯 동그랗게 커진 눈과 살짝 초췌했지만 혈색 도는 얼굴. 시현은 짧게 숨을 몰아쉬고 저벅저벅 태운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태운이 그만큼 뒤로 물러섰기 때문이었다.
시현은 저를 피하는 듯한 모습에 조금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덜컥 멈추어 섰다.
‘나를 피해…?’
평소 같으면 먼저 스승님 하고 다가와야 했는데 저 큰 눈동자를 슬그머니 옆으로 굴리면서 눈치를 보듯 멀어지는 걸 보자 순간 울컥하고 감정이 터져 나왔다.
“자꾸 피할 거야?!”
문을 열기 바로 전까지 마음을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사과하려던 각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방금까지 레이첼에게 들었던 내용들과 태운이 절 찾으러 와서, 그래서 이런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그 모든 걸 뒤덮을 정도로 속이 상했다.
왜 몰랐을까. 왜 괜찮을 거라 생각했을까. 고작 나를 피한 거 하나로도 이렇게 감정이 날뛰는데. 이렇게 심장이 뛰는데.
시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 얼굴을 휙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뛰듯이 다가가서 태운의 양팔을 움켜쥐었다.
“좀 봐 봐.”
양손이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을 휙 넘긴 뒤 커다란 몸을 휙 돌렸다. 꽤 큰 상처가 있었던 등허리쯤의 옷을 확 들쳐서 확인한 시현은 다시 몸을 휙 돌렸다.
‘확실히 타박상이나 자상 같은 건 남지 않았네. 그 약물 좀 최대한 많이 뜯어내야겠어.’
이왕 험하게 몸을 굴릴 거 그만큼 있는 거 없는 거 싹 다 긁어서 움직일 참이었다. 시현은 효과가 꽤 좋아 보이는 물약을 뜯어낼 목록 가장 위에 올리고는 비식 웃었다.
“몸 상태는 어때. 괜찮아?”
끄덕.
딱히 큰 대답은 없었다. 태운은 여전히 시선을 돌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순간 실내가 어색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그, 나는 먼저 들어간다.”
그때 그 침묵을 가르고 하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새 뭘 더 찾아낸 건지 품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양의 음식들과 맥주가 들려 있었다. 천하의 하정도 이 분위가 무척이나 어색하고 민망했던 건지 대충 말을 남기고 급히 발을 옮겼다. 누가 봐도 이 공간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이의 행동이었다.
하아….
시현은 하정이 들어가자마자 다시 조용해지는 내부에 괜히 어색하게 뒷 목을 문지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안 반가워?”
“그럴 리가 있습니까….”
누가 마치 혼이라도 낸 마냥 시무룩한 목소리에 시현은 허리에 손을 턱 올려놓고 태운을 빤히 바라봤다. 얼마 전만 해도 제 손목을 부서져라 쥐어 잡고 기절하기 전까지 좋다고 좋다고 하던 놈이랑 아주 다른 사람 같았다.
사실 제일 처음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었다. 계속 게임 타령만 하며 정작 중요한 사실은 외면해 온 자신 대신에 태운이 많은 걸 감당하고 있었단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축 처진 모습을 보니 미안하단 말보단 고맙다고, 나도 네가 좋다고, 그 말부터 해 주고 싶어졌다.
시현은 태운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꽉 붙잡아 시꺼멓게 멍이 들었던 손목을 떠올렸다. 그리고 손에서 느껴진 간절함도. 고민은 무척 짧았다. 시현은 포션 덕에 이제는 멀쩡해져 하얘진 손목을 한번 슥 문지르곤 태운을 덥석 껴안았다.
“근데 왜 그러고 있냐. 누가 혼냈어?”
태운은 시현이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올지 예상하지 못했는지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무슨 기둥이라도 된 마냥 멍청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태운은 제가 한 짓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미친놈처럼 한곳을 배회하던 것. 심마에 빠지기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 그리고 그거 때문에 하마터면 스승님에게 큰 해를 끼칠 뻔한 것도.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그렇게 핑계를 대고 싶었다. 제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실수였다고. 그러나 마지막에 적나라하게 내비친 원망과 애정을 갈구하는 마음까지는 거짓이 아니었다. 마음이 조급했을 뿐 실수도 아니었고.
그렇지만 이따위로 스승님에게 부담을 지워 주고 협박하듯 제 마음을 받아 달라고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소파 위에서 눈을 떴을 땐 제가 충동적으로 저지른 행동을 곱씹곤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가물가물한 시선 안에 들어왔던 시현의 마지막 표정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제가 그렇게 담아 둔 말을 다시 쏟아 냈을 때 그의 얼굴이 어땠더라.
태운은 저를 안고 있는 시현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면서도 마주하기 두려웠다.
또다시 저를 밀어 낼까?
“…평소 같았으면 잘만 안아 달라고 했을 거면서.”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말이 제 귓가에 나지막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