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그러니까… 제가 당신들이 종말을 저지하는 것에 힘을 보태라는 말입니까?”
시현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눈을 가늘게 뜨고 힘겹게 반문했다.
이제야, 이제야 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또 목숨을 걸고 커다란 전투를 치르라고?
안락한 앞길을 방해하는 것들을 혼내 주고 없애 버릴 생각이긴 했다. 연합의 정체와 위치만 안다며 오래 걸리지도 않을 일이었기에 큰 부담도 없었다.
그러나 뭐 종말을 막으라니. 혹 떼러 와서 다시 혹을 두 개나 붙이고 가는 웃긴 상황이 아닌가. 레이첼의 주장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었지만,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에 말려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공격에 가담한다고 쳐, 그걸 태운이나 이하정이 보고만 있을 것 같아? 안 돼. 절대 안 돼.’
저자의 말을 정확히 따지자면‘ 우리 세대’에는 괜찮다는 얘기 아닌가. 굳이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이기적인 생각이었으나 지금 시현의 머릿속은 그런 도덕적인 문제를 따질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그 S급 게이트에서 몇 날 며칠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길을 헤맸고, 그 와중에도 끊임없는 전투에 임했다가 어디 이상한 폭발에 휘말렸다. 그 이후로도 한참을 과거에 잠겨 있다 온 힘을 다해 겨우 풀려났고 겨우 찾은 태운의 상태 때문에 받은 충격까지.
솔직히 지금까지 생각이란 걸 하고 있는 것도 용한 상태였다. 급격하게 피곤함이 몰려왔다. 시현은 이마를 짚고는 레이첼을 흘낏 봤다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정보를 구할 곳은 많았다. 그래, 사마윤이 무사히 돌아갔다 했으니 그쪽을 통해서 움직여도 좋을 것이다.
“거절하지. 난 더 이상 목숨을 내놓고 싶지 않아.”
순간 레이첼의 눈동자가 조금 뿌예졌다. 원래도 푸른색이었던 눈동자라 크게 티가 나진 않았지만 가까이에서 눈을 맞춘다면 알아챌 수는 있는 정도의 변화였다.
“당신은 거절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다른 곳에서 온, 그 죽어 가는 이를 살리기 위해서 움직일 테니까요.”
“뭐? 지금 무슨 개소리를.”
“미래는 수만 갈래의 가지 중 가장 확실한 하나의 것. 그자는 이 차원에서 살 수 없습니다. 이대로 두면 죽을 겁니다.”
말투가 바뀌고 주변을 채우던 분위기가 확 바뀌었지만 다른 생각 할 새도 없었다. 정확하게 지칭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게 태운이를 뜻한 거란 건 모를 수 없었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서 손을 뻗었다. 당장 멱살이라도 잡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완벽하지 못한 상태의 시현은 레이첼 주변으로 순식간에 나타난 무언가들에 턱 막혀 멈춰야만 했다.
사람의 형태를 한 마네킹이었다. 몸놀림만 보아도 하나하나 초절정의 경지쯤은 되어 보이는 마네킹 8구가 레이첼의 주변을 단단히 가로막았다. 그중 가장 앞에 있던 자가 시현의 손을 힘겹게 붙잡고 있었다.
팔에 작게 금이 가고 있는데도 망설임 하나 내보이지 않는 그 이상한 것들을 보다가 시현은 작게 침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넌 뭐야.”
좆같았다. 가뜩이나 연이어 이어지는 말도 안 되는 사실들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다짜고짜 상대방은 태운이 죽을 거라는 저주 같은 말을 내뱉다니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다.
“설정 오류. 능력치를 재조정합니다.”
어디서 들어 본 듯한 말이었지만 선뜻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는 잡혀 있던 손을 거둔 채 앉았던 소파 위로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능력을 초기화하기 위해 저는 꽤나 많은 의식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당신을 쓰려면 그들이 사용하는 의지를 남기면 안 됐으니까요.”
제 능력치가 ‘초기화’됐다는 사실은 태운이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시현은 그제야 저 안에 든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시스템…?”
제가 뱉고도 어이가 없는 말이었지만 시현은 돌아올 대답을 알고 있었다.
“시스템보단 관리자라고 불러 주십시오. 원한다면 당신이 숭배하던 신의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제야 현실감이 물밀듯 밀려오며 코와 입을 막고 숨을 빼앗았다.
“그럼, 태운이가 죽어 간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레이첼, 그러니까 관리자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조금은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로 그저 정해진 말을 내뱉는 로봇 같은 모습이었다.
“씨발… 내가 어떻게 해야. 아니, 아까 하라는 거. 가서 싸우란 말이야? 그러면 돼?”
“정확히는 조금 다릅니다. 일단 이것부터 설명해야겠군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무척이나, 아주 강한 배타성을 가집니다. 그리고 아주, 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죠. 한마디로 벌레 따위라도 이 세상 굴레를 살아가던 것이 아니면 쉽게 속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시현은 이어지는 레이첼의 말에 결국 얼굴을 감싸고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태운의 상태에 대해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저것만으로도 짐작하기엔 충분했다.
이 세상을 살던 이가 아닌 태운은 여기서 살 수 없다.
그동안 태운이가 겪었던 내공이 굳어 버리는 현상이라든가, 자꾸만 제 주변에 끼치는 나쁜 영향들이라든가. 그리고 잊었던 과거마저 다시 끌어 올렸던 이상한 현상들까지. 그 모든 이상이 하나로 합쳐져 저 말에 신빙성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절망적이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무슨 실수를 저질렀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편안히 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가능하다면… 그냥 태운이와 같이 그 평범함을 누렸으면 했을 뿐이었어. 큰 권력도 돈도 바라지 않았단 말이야.’
그런데 대체 왜.
사실은 태운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물론 제게는 현실이었고 떼 놓을 수도 없는 존재였지만 어쨌든 게임 속이었다. 그런 애가 현실에서 나타나다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이들이 말해 준 드림 워크에 관한 내용들은 그 의심을 점점 하나의 가설로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장소. 그리고 실존 인물.
그 전제 사항이 생긴다면 이 모든 일이 이해됐다. 자신은 차원을 넘어간 것, 태운이도 저를 찾아 차원을 넘어온 것. 그러나 그 가설이 잘 맞아떨어진대도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자신은 그 안에서 제 퀘스트를 위해 수천수만의 사람을 죽이고 또 죽였다. 진짜 게임에 있는 몬스터 처리하듯 아주 손쉽고 자비 없이 말이다. 그런데 그게 다 진짜 사람이다? 퀘스트가 아니다? 그 사실은 시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태운이는 천마가 되고 싶지 않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럼 난 대체 뭘 위해서….
손이 잘게 떨렸다.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시현을 비통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건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이 잘 가려져 있던 이 세상의 존재를 저 밖에 알렸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어진 말에 결국 시현은 반쯤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
세상은 여러 개의 다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각각의 차원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문을 걸어 잠가 차원 간 이동을 폐쇄하고 살지, 아니며 전부 다 열어젖히고 영혼력을 끌어다 쓰며 살지.
지구의 차원은 전자였고, 세네아즈들이 살던 차원은 후자였다. 폐쇄를 선택한 곳은 이제 그 안에 사는 생명체들 모두 영혼의 힘을 다룰 순 없게 됐다. 하나 무척 평안한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를 선택한 차원들은 외부의 침입과 끊임없이 맞서 싸우며 멸망을 등 뒤에 두고 살아야 하겠지만 능력을 발전시키고 번영할 것이다.
극과 극의 상황, 당연히 접점도 없었던 두 차원은 각자의 세상을 살아가며 질서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네아즈들이 본인들의 차원 관리자를 죽이고 외부의 영혼력을 탐내면서 급속도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엄청난 발전을, 아니 진화를 이룩했지만 그만큼 빠른 영혼의 고갈을 느꼈다. 이대로 가면 자신들이 만들어 낸 이 대단한 세계가 멸망할 길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다음부턴 그들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은 타 차원의 식민지화, 그리고 영혼력 갈취. 그것을 이루려면 강한 탐색 방법이 필요했다. 그것을 만들기 위해 또 수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들은 점점 더 급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근처 차원들을 침략해 영혼력을 싹 다 뽑아냈다. 외부의 영혼력은 이제 말라 가던 자신들의 차원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간혹가다 만나게 되는 강한 관리자의 차원은 세네아즈들이 발을 들이밀기도 힘들었고 그들을 꽤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힘을 내세워 쳐들어가던 방법을 다르게 바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른 차원 내부에 자신들의 마나를 흩뿌려 차원을 지탱하는 흐름을 뒤틀고 원래 살던 생명체를 뽑아내 자신들의 첨병으로서 세워 놓은 뒤 천천히 집어삼키는 것. 그들은 점령 차원에서 적당히 영혼력을 생산하게 만들고 일정량만큼 뽑아 오는 게 더 유용하단 걸 깨달은 것이다.
물론 자신들이 뽑아 가는 만큼 금방 멸망은 하겠지만 말이다.
***
“그들은 ‘의지’라는 걸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의지를 통해 드리워진 바늘에 무언가가 걸리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탐색한 영향에 당신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차원에 사는 사람들처럼 약해빠진 자들은 그들의 의지를 버티지 못해요. 한마디로 탐색에 걸려도 금방 죽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탐색의 영향을 받았는데 안 죽어서… 그래서 이렇게 된 거라고?”
“맞습니다. 당신은 외 차원에 도달하기도 전에 그대로 죽었어야 했습니다.”
내용만 보면 무척이나 잔인한 내용이었을 테지만 관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척이나 건조하고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 탐색에 걸려 외 차원으로 끌려간 건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 제대로 빠져나가기 전에 죽었죠. 그런데 정시현 씨는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물론 본인에겐 축하할 만한 일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더욱더 우리 차원의 존재가 드러났습니다.”
한번 만들어진 길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비록 시현을 쥐어 잡고 첨병으로 휘두르진 못했지만, 그가 타 차원으로 이동하며 생긴 틈으로 순식간에 영향을 확대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