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물렁물렁한 젤리 같은 걸 제치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찰나였지만 아주 익숙한 기분이었는데 시현은 금세 그 느낌을 어디서 겪었는지 알 수 있었다.
‘게이트.’
그래, 이것은 그때 느낀 감각과 아주 유사했다. 미국에서 휘말린 게이트가 펼쳐질 때, 이규환을 찾으러 그의 본가로 찾아갔을 때, 강원도에 있는 신의 광산에 들어갔을 때.
시현은 손에 쥔 초록빛 돌멩이, 아니 응집석을 부서져라 꽉 쥐었다. 이제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신류하가 속한 이 단체는 제게 알 수 없는 호의를 보이는 것 빼고 그 사이비들과 여러 방면에서 아주 비슷했다.
이쯤에서 제가 세웠던 여러 가설이 줄줄이 떠올랐다.
‘같은 아이템을 쓰고 비슷한 방식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제3의 세력은 아니란 뜻인가.’
‘같은 연합 안에서 대립하고 있는 사이라면. 그럼 내가 필요하다는 게 폭발 게이트 때문이 아니라 경쟁자를 처리하기 위해서?’
‘만약 그렇다면 윈윈이 될 수도…. 중요한 건 그들의 위치 정보다. 목적이 같다면 손잡지 않을 이유는 없어.’
사실 아직까진 제게 좋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다. 생각한 대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었으니까.
호의는 호의일 뿐 거래가 성사되지 않는다면 내용에 따라 그 자리에서 전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당연히 지금의 제 몸 상태로는 그걸 막아 낼 수 없었고. 그렇다면 큰 피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어느 정도는 양보를 해 줘야 할 것이다. 시현은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점점 줄어드는 빛에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일단 신류하를 떠봐야겠,’
“처음 뵙겠습니다. 정시현 씨.”
그러나 줄줄 이어지던 생각은 앞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뚝 끊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눈앞을 가리던 빛도 사그라들었다. 분명 안쪽에 도착한 것일 테다. 시현은 내부를 둘러볼 새도 없이 곧바로 공격 태세를 갖춘 채 제 앞에 서 있는 자를 보며 성안을 발동했다.
“제게 성안은 통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힘 빼지 말고 앞에 앉으시지요.”
정말로 성안은 통하지 않았다. 저 여자 말대로였다.
정보를 알 수 없다면 대강이나마 왜 그런지 이유라도 알려 주던 알림창이었다. 무슨 스킬 때문에 볼 수 없다든가 손상되어 안 된다든가. 그러나 지금은 그냥 묵묵부답이었다. 시현은 찰나간 당황의 기색을 비쳤다가 금세 무표정을 하고 반문했다.
“당신 뭐지?”
“먼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여자의 공손해 보일 정도로 정중한 사과는 시현을 다시 당황하게 했다. 시현은 당장이라도 내지를 뻔한 주먹을 꾹 그러쥐었다. 그리고 잠시 가늘게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고 지금까지 저들이 한 행동을 떠올렸다.
저들은 제게 협조를 바란다고 했고,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린 뒤 일행들을 구조해 준 데다가 약과 쉴 곳까지 제공했다. 자신은 최대한 피해 주지 않고 대화로 풀려고 결심하고 왔다.
동시에 아직 쓰러져 있는 태운과 잔뜩 지친 얼굴을 한 하정이 떠올랐다. 순간 훅 뜨거워졌던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뭐가 죄송하다는 겁니까.”
시현은 적대적인 태도를 거두고 덤덤하게 맞받아쳤다. 그에 제 맞은편에 서 있던 여자는 미세하게 미소를 짓고 그 가운데에 자리한 소파로 손을 내밀었다.
“일단 이 앞에 앉으시지요.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까요.”
시현은 그 손짓에 끝까지 앞에 있는 이의 기운을 가늠한 뒤 천천히 눈앞에 보이는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나 편하게 자리를 잡기도 전에 여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몸을 딱딱하게 굳혀야 했다.
“먼저, 정시현 씨 집을 부수고 피해를 준 것은 저희 쪽 실책이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집이라니. 잊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꽤 미뤄 둔 사항이었다. 지금은 빌런 연합 놈들의 뒤를 밟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옛날얘기가 끌어져 나오자 시현의 평정심이 깨지고 말았다.
“아니, 잠시만. 집이요?”
“정확히 말하면 연합 놈들과 저희가 부딪혔었지요. 그러나 원인 제공은 저희 쪽에서 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희는 시현 님의 정보가 필요했고 능력이 부족해 뒤를 밟혔으니까요.”
그래, 얘기는 들었었다. 같은 무리가 들어와 놓고 싸웠다고. 그래서 연합 내부에서 세력 싸움이 있을 거란 가설도 세우지 않았었나. 그러나 지금 들은 내용으로는 그 모든 게 엇나간 추측이었다. 이 사람은 연합과 자신들을 아주 철저히 구분해서 지칭하고 있었다.
“내 정보가 왜… 아니, 대체 이게. 허.”
“갑작스럽겠지만 저희도 어쩔 방도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들어갔던 게이트가 S급이 되었기 때문에 원인을 알아야만 했으니까요. 그 시기에는 원래 S급 게이트가 나와선 안 됐어요.”
신류하와 대화하며 최대한 정보를 빼먹겠단 각오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현은 그동안 가려져 있던 사실들을 일방적으로 주입당하며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이름은 레이첼, 책갈피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걸로 몇 번이나 반복된 삶을 살았죠. 아니 꿈을 꿨다고 할까요.”
레이첼은 ‘개벽’이 터지자마자 드림 워커가 되었다. 처음엔 제가 꿈을 꾸는 거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게이트 사태가 터지긴 했지만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주변 환경까지 모든 흐름이 똑같았으니까. 그러나 처음 죽음을 경험했을 때, 그리고 다시 시간을 되돌려 살아났을 땐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삶은 한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반복할수록 점점 이 개벽 현상이, 그리고 게이트들의 폭주가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난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 게이트 사태를 주도하는 자가 있었다. 레이첼은 절망했지만, 오히려 정확히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 선택으로 인해 수억의 사람이 희생되고 가족과 친구들마저 죽어 나가는 상황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 물론 자신은 이걸 저지해 보겠다고 죽어라 노력했다. 그러나 한 다섯 번쯤 부모님이 죽어 가는 걸 보고 난 뒤엔 모든 결심이 흔들렸다. 머릿속은 점점 ‘포기’라는 단어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때 정말 이상하게도 사명감이라는 게 생겼습니다. 내가 포기할 걸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에요. 물론 그다음부턴 그게 제 원동력이 됐죠. 그렇지만 참 이상했습니다.”
원래는 있지도 않던 사명감이 갑자기 왜? 이런 타이밍에? 너무 부자연스럽지 않나.
“그때부터 다른 무언가의 개입이 있구나를 완전히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때 숨겨진 비밀을 조금 알게 됐죠.”
레이첼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머릿속을 파고드는 정보의 홍수에 입을 콱 막고 주저앉아야 했다. 하지만 그 존재는 레이첼이 충격을 받든 말든 가려진 지식을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주입하고 있었다.
세네아즈, 그리고 차원의 식민지화.
자신이 쫓던 그자는 진짜 적이 아니었다. 아니, 적은 맞았지만 최종 윗대가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존재에 의해 영향을 받아 수동적으로 움직인 것과는 다르게 그자는 세네아즈라는 외 차원 존재에게 자발적으로 투신했다. 한마디로 시작부터 달랐었다는 거다.
대체 왜 제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왜 자신이 이런 거대한 책임을 지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는 없었지만 당장 그다음부터는 실전이었다.
레이첼은 드림 워크에서 깨어나자마자 제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서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피해받은 이들을 은밀하게 모으고 단체를 구성했다. 물론 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자신은 있었습니다. 반복하면서 얻은 노하우, 비록 실패하긴 했어도 그동안 쌓은 경험이 있었으니까. 시작점이 같다면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지진 않겠다고 생각했죠.”
“잠깐, 잠깐만요.”
레이첼의 이야기가 대략 30분을 넘어갔을 때까지도 얌전히 듣고 있던 시현은 이제 한 시간이 다 되어 가자 급히 손을 내밀었다. 오래 걸릴 거란 얘길 듣긴 했지만 이제 시작이라니.
처음 들어 보는 단어와 존재의 나열에 관심을 가진 것도 잠시였다. 이 사람의 드림 워크 일대기를 내내 들어 주기엔 자신은 마음이 급했다. 언제 태운이가 깨어날지 모르는데 또 자리를 비워 뒀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않나. 시현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당신이 그동안 어떤 일을 해 왔는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제 협조랑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겁니까.”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잘 굴러갈 줄 알았던 계획이 게이트가 생기는 바람에 고작 3년 만에 아주 크게 틀어졌다고.”
순간 시현은 레이첼이 말꼬리를 잡고 끼어들었음에도 입을 꾹 다물었다. 또 저 F급 게이트였다. 처음 언급됐을 땐 황당했지만 다시 한번 그 이름이 귀에 들어오자 조금 초조해졌다. 태운이 게이트에서 나왔다는 걸 저들이 알 수 있을 리는 없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그 게이트 이상의 원인을 대강 예상하던 시현이었기에 저절로 어색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요.”
“추궁하자는 건 아닙니다. 그동안 저희 쪽에게서도 당신의 행보를 지켜봐 왔으니까. 하지만 일이 급박하게 흘러간다는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고 저희는 도움이 필요해요.”
레이첼은 시현은 다시금 바라보더니 따라 놓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더욱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연합은 이 세상에 세네아즈들이 도달하길 바라고 그렇게 움직이고 있죠. 그렇다면 당장 우리의 세대에는 아니더라도 이 세상은 천천히 영혼력을 빨리고 종말에 달할 겁니다. 그들이 이곳에 정말로 씨앗을 심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아까 본인이 말했던 대로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절절한 감정이 제 마음속에는 조금의 영향도 주지 못하고 힘없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