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오랜만입니다. 하정 씨.”
“신류하…? 당신이 여길 어떻게….”
하정은 제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한번 봤다가 어벙벙하게 주변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 죄다 박살 난 건물들과 그 사이사이 뭉개진 몬스터들의 사체. 그리고 어둡게 깔린 하늘과 균열들.
몇 번을 봐도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주변은 여전히 게이트의 내부였고 소수의 헌터들은 이 넓은 내부를 돌아다니며 구조에 한창이었다.
몇 번 눈을 깜빡여 봤지만, 그사이에 혼자 새하얀 옷을 갖춰 입고 꼿꼿하게 서 있는 이 남자는 여전했고 과하게 이질적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에 있어야 할 이 남자가 왜 제 앞에 있는 것인가. 하정은 입을 꾹 다물고 경계하듯 신류하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그런 하정의 반응에도 잠시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 별다른 수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급하게 말을 건넸을 뿐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군요. 제가 좀 급하거든요.”
“대체 뭐가 급하다는,”
“쉿. 일단 제 얘길 먼저 들어 주시겠습니까?”
“…그러세요.”
하정은 신류하의 저런 조급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늘 능글대고 여유를 부리는 모습만 봤기에 영 적응이 안 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류하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듣자 멍하게 풀린 얼굴이 급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라스베이거스에 게이트가 터지고 하루 뒤. 전 세계 각지에 폭발 게이트가 우후죽순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등급도 뒤죽박죽, 영향을 주는 범위도 뒤죽박죽이었다.
바로 당장 터질 정도로 극단에 다다른 게이트들은 아니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태의 시한폭탄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한국에는 처음엔 두 개 그다음 날에 또 두 개, 그렇게 지금까지 보름이라는 기간 총 30개의 폭발 게이트가 생겼다. 신류하와 셰어 길드, 그리고 다른 길드들과 헌터부의 활약으로 폭발 게이트가 터져 일반인들에게까지 피해가 가거나 하는 일은 아직 없었지만, 땅덩이가 크고 헌터가 모자란 나라들은 달랐다.
결국 완벽하게 클리어하지 못한 게이트들은 현실 세계로 몬스터들을 뱉어 냈다. 한두 개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그런 일들이 터지자 세상은 동시다발적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세계 각지에 있던 헌터들을 다 본국으로 소집하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규민 씨와, 유준 씨는… 응집석 덕에 다행히 휘말리지 않았더군요. 뭐, 많이 반대하긴 했지만 이미 제가 한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다행, 아니 응집석이요? 그게 뭐….”
이어지는 최악의 소식 중에도 그나마 다행인 소식은 있었다. 그러나 일행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안심할 새도 없이 처음 들어 보는 단어가 하정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물론 신류하는 하정의 궁금증에 대답을 해 줄 생각이 없었는지 깔끔하게 무시하곤 제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어쨌든 저는 그 개판인 상황에서 당신들의 일행들을 저기 한국까지 무사히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들의 이야기를 꺼낸 건… 협조를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 상태론, 힘들겠지만.”
신류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 상황은 그의 예상 밖이었다. 조금 피해를 봤을 수도 있겠다 싶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준비해 온 온갖 약물을 지원해 주면 문제없었고 그렇다면 바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낙관적이었던 걸까. 저들이 아예 정신이 나가고 실종이 됐을 거라곤 파악하지 못했다. 신류하는 조금 초조해지는 마음에 저 멀리 제정신이 아닌 태운을 보며 작게 혀를 찼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신류하는 다시 하정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무언가를 하나 건넸다.
“이동석입니다. 시현 씨를 찾으면 이 이동석에 마나를 밀어 넣으세요. 지정된 장소로 이동이 될 겁니다. 지금 상황을 타개할 사람은 시현 씨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부탁드립니다.”
순간 신류하의 표정과 목소리가 바뀌었다. 방금까지 들린 미묘하게 능글거리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음울했다. 하정은 조금 눈을 크게 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뵙죠. ”
그리고 신류하가 공간을 날아 허공의 균열 틈으로 사라지는 걸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응집석 때문에 휘말리지 않았다고?”
“어, 그랬어.”
제일 먼저 시현의 머릿속을 어지럽힌 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응집석의 존재였다. 어차피 계속 호텔을 전전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미국에 가져갈 때 챙겼던 짐 안에 응집석이 있었지만 딱히 필요할 거라 생각해서 챙긴 건 아니었단 말이다.
시현은 짧게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차근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응집석이 게이트라는 새로 만들어진 공간을 박살 냈고, 아예 그 게이트라는 공간에서 벗어나게도 만들고… 순간 그동안 겪었던 응집석과 관련된 상황들이 차례차례 중첩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게이트라는 공간을 만드는 것도?’
그 조그만 게 그 커다란 공간을 부수고 영향에서 비껴가게도 한다는데 만드는 것도 못 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는 거지?”
“맞아. 거의 확신하는 것 같았어.”
물론 아직도 신류하가 왜 제가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있을 대화에서 본능적으로 그동안 제가 겪었던 그 알 수 없는 일들의 진상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정보만 잘 준다면, 게이트를 처리하러 다니라고 일을 시키는 것도, 뭐 빡시게 이리저리 구르라는 것도 다 할 수 있다.
‘빨리 태운이의 이상 현상을 풀어내야 해. 아니면 위협이 될 만한 걸 다 죽이든가.’
시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아직도 눈을 감고 있는 태운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일단 내가 아는 건 이게 다야. 난 이제 좀 씻을 테니까… 바보처럼 휘둘리지 말고 말 잘 하고 와라.”
말투는 투박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이 느껴졌다. 물론 하정은 시현의 대답을 듣지 않고 곧바로 발을 옮겼지만.
하정은 점점 멀어졌고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딱히 제 비밀을 파헤치려고 하지 않았지만, 눈치는 빨라서 필요한 부분에는 딱딱 조언을 해 주는 배려에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야, 태운이가 내가 좋대.”
시현은 곱게 눈을 감고 누워 있는 태운을 바라보다가 이제 막 문을 열어젖히는 하정에게 뜬금없이 말을 던졌다.
“새삼스럽긴.”
“그냥 아니고, 가족 같은 거 아니고.”
“안다고. 그걸 넌 이제 알았냐?”
역시나였다. 저만 빼고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 알면서 모른 척한 건 자신이었다. 한심하고 웃겼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냐?”
“나한테 지금 연애 조언을 구하는 거냐?”
“네가 연애라곤 중1 때 3일 사귄 것밖에 없다는 건 나도 알지만, 그냥 물어보는 거다.”
“하하, 뭐래. 이 찐따 모쏠놈이.”
저절로 입 밖으로 쓴웃음이 튀어나왔다.
“넌… 가족 놀이 적당히 하고 사람 마음 제대로 봐. 등신아.”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태운이에게 가진 제 감정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깨어지면 외로워지니까, 이루어져도 결국 시들 테니까. 그렇게 집착은 할 대로 하면서 가족이란 이름으로 한 발짝 떨어져서 이기적으로 굴고 있었던 거였다.
뭐가 어른이고 보호자란 말인가. 자신은 아직도 그때 그 어린애에서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다. 정말 최악이었다.
시현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곧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시현은 무언의 재촉을 한 귀로 흘리며 태운에게 손을 뻗었다. 뺨이고 머리고 피가 안 튄 데가 없었지만, 손은 거침없이 태운의 뺨을 쓸어내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서 넘겼다.
‘그래, 이제는 나도 자랄 때가 됐지….’
곧 느릿하게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그리고 상체가 조금 기울더니 방금까지 문질러 댄 뺨 쪽으로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작은 접촉이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기다려. 금방 해결하고 올 테니까.”
이제 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시현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이제 가시죠.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제부터 제게서 일 미터 이상 떨어지지 마십시오.”
이 비서는 시현의 사과에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붙어서 따라오란 말과 다르게 딱히 별다른 장치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자신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시현은 눈을 티 나지 않게 가늘게 뜨고는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대략 오 분간 걸음을 옮기며 상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섰을 때. 시현의 경계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 비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초록색의 엄지손가락만 한 보석. 이곳에 올 때 하정이 사용한 그것이었다.
“자, 이걸 지니고 올라가십시오.”
“…저 혼자서 말입니까?”
“제가 워낙 바빠서.”
이 비서는 아주 거침없었다. 이 위로 가면 분명 신류하가 있을 텐데, 그리고 자신이 꽤 강하다는 걸 알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게 제 상관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표정만 봐선 잘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계속 말을 하고 있어 봤자 괜히 속만 어지러워질 게 뻔했다. 시현은 재빨리 남은 내공과 몸 상태를 확인하곤 곧바로 위로 향하는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여기기까지 와서 뭘 망설일까.’
물론 당장이라도 공격할 태세를 갖추는 건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