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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자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헌터란다-94화 (94/146)

#94

멈칫.

제 속에 자잘하게 엉겨 있던 것들을 다 뒤집어엎을 만큼 아주 큰 파문이 일었다. 보통 큰 파도를 맞으면 가옥이든 물건이든 다 휩쓸려 망가지지 않나. 그러나 제 마음은 오히려 차근히 가라앉고 있었다.

태운은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앞이 까매졌다가 다시 밝아지는 찰나가 영겁같이 느껴져 초조해졌다. 그러나 곧 온통 꽉 막혀 어둡던 곳으로 갈색빛이 비쳐 들었다. 태운은 그게 뭔지 아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스, 승님?”

“그래.”

“스승님.”

시현은 아직도 내기가 위험하게 넘실거리는 경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발을 옮겨 태운에게로 향했다. 처음엔 느리게 걷던 걸음이었다. 그러나 점점 가까워질수록 선명하게 얼굴이 보였고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그렇게 종국에는 달리는 모양새가 되고 있었다.

“미안해, 늦게 와서.”

저보다 컸지만 작았다. 시현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힘없이 서 있는 태운을 끌어안고 피에 젖은 머리통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몸의 잔떨림이 손바닥으로 닿아 있는 피부를 통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곧 그 떨림은 작게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섞여 밖으로 토해지고 있었다.

“흐으… 스승님.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울컥하는 감정이 틀어막은 목구멍이 화끈거렸다. 시현은 더 태운을 꽉 안고는 튀어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았다.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진짜야. 네가 뭘 잘못해.”

정말로 태운이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도 말이다.

물론 처음엔 괜히 나대서, 괜히 참견해서 멋대로 행동한 제 탓이라 자책했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다른 곳에서부터가 아닌가. 애초부터 사람들을 그렇게 모아서 생명력을 갈취하지 않고 죽이지 않았으면 되는 거 아니었던가.

시현은 조금 잦아든 훌쩍거림에도 여전히 토닥거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무를 거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기도 했고요….”

그때 제게 힘없이 안겨 있던 태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중간중간 끊어지기까지 해서 힘겨워 보였지만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태운아, 일단 병원에….”

“그런데 그거 아세요? 이게 참 익숙합니다. 비록 와닿는 강도가 다르다고 해도 늘 그랬어요. 스승님 옆에 있는 동안 이 감정들이 늘 저를 살리고, 또 죽였습니다.”

말문이 막혀서 어떤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제게 밀려드는 저 감정의 크기가 너무 거대해서. 그렇지만 부드럽고 따듯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럼에도 행복했어요. 당신이 어떤 마음이라도 좋아요. 그러니까… 곁에만 있어 주세요. 스승님, 저는 당신이 없는 세상은 생각할 수 없어요.”

“당신이 너무 밉습니다. 그래도 좋아해요.”

“사랑합니다….”

두서없이 이어지던 말이 점점 툭툭 끊어지고 작아지더니 결국 끝을 맺었다. 주변은 무척 고요했다. 시현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제 입을 막는 이것을 부수고 말을 해야만 했다. 시현은 눈을 꾹 감고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다시 한번 숨을 들이마셨다.

툭.

그러나 시현이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제 허리쯤에 힘없이 둘려져 있던 손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와 함께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태운아?”

시현이 급히 태운을 떼어 냈다. 그러자 그 커다란 몸이 힘없이 바닥을 향해 기울어졌다. 시현은 급히 몸을 다시 끌어안았다. 피에 푹 절어서 축축하고 무거운 옷자락의 감촉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장, 장난치지 마. 잠깐, 태운아. 태운아!”

급히 태운의 상태를 확인하려던 시현은 덜덜 떨리는 손이 배어 나오는 핏물에 자꾸 미끄러지자 결국 눈가를 적시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대체 왜 지금인지, 왜 태운이인지, 왜 자신인지 모든 상황이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다.

제발, 제발.

“야, 네가 정신 놓으면 어떡해! 안 죽었으니까 잘 봐!”

그때 호통치는 듯한 목소리가 시현의 머리를 툭 쳤다. 목표로 가지 못하고 한없이 헤매던 정신머리가 단번에 옳은 길로 안착했다.

마구 흔들리던 시현의 눈이 그제야 유심히 태운의 상태를 확인했다. 가늘긴 했지만 아주 미세하게 이어지는 호흡과 느리게 뛰고 있는 맥박.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일단은 살아 있었다. 그래, 내공이 저만큼이나 있는데 바로 죽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던 손이 우뚝 멈췄다.

“가자, 병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그건 태운이를 치료하는 것이었다. 그 무엇보다 이게 최우선이었다. 시현은 벌떡 일어서서 태운을 들쳐 업고 하정을 바라봤다.

“후우… 일단 나 잡아.”

시현은 고분고분 하정의 어깨를 쥐었다. 하정은 아직도 가늘게 떨림이 느껴지는 손을 내려다보고 한숨을 푹푹 쉬다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초록빛을 한 작은 보석이 하정의 손안에서 빛났다. 그 익숙한 생김새의 돌은 순간 하정의 알 수 없는 시동어에 갑자기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주 아주 익숙한 상황이었다.

“야! 이하정! 잠깐만!”

그러나 거대한 기의 폭풍이 순식간에 몸을 감쌌고 시현의 외침은 그 안에서 힘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잠시 후. 그 폐허에는 방금 까지도 생명체가 있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감돌고 있었다.

***

후우웅-

심플한 흑백의 가구들로 채워져 있는 넓은 사무실. 창문이 열려 있는 것도 아니건만 거센 바람이 어디에선가부터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찾아냈나….”

바람에 색이란 게 있을 리 만무했지만 분명하게 저 앞으로 몰려들고 있는 바람에는 초록빛이 물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세 명의 모습이 점점 형태를 갖춰 가고 있었다. 안락한 가죽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홀짝이던 남자는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형태에 천천히 일어섰다.

초면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지 싶어 가까이 가려 발을 옮기는 순간.

스각.

형체 없는 무언가가 목줄기의 표피를 베고 지나갔다. 저 엉망인 상태로도 이렇게 공격할 수 있다니 순간 솜털이 솟고 오싹했지만 남자는 금세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을 하고 빙긋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시현 씨.”

“뭐야 이거.”

온몸은 상처투성이에 남은 내공도 한 줌뿐이었지만 시현은 방심하지 않고 사방을 경계했다.

공간을 뛰어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밖에 없었다. 주변 또한 한국에서 흔히 볼 만한 잘 꾸며진 사무실이었고 저 남자가 제 눈앞에 있다는 게 그 가설을 더 확실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시현은 제 앞에서 그 느끼한 얼굴로 빙글대며 웃고 있는 신류하에게 손을 내밀며 공격하겠다는 의사를 남김없이 내비쳤다.

“으음, 급해 보이는데 이거 받아요.”

신류하는 시현의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긴 막대 모양으로 생긴 물건을 던졌다. 유리로 된 듯한 투명한 원기둥 형태의 병, 그리고 그 안에 잘게 찰랑이고 있는 액체. 포션이었다.

시현은 단번에 쳐 낼 준비를 하려다가 마음을 바꾸고 그것을 잡아 들었다. 어찌나 정확하게 던졌는지 손안으로 빨려드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독이거나 문제가 생기면 넌 죽는다.”

“예, 예. 그러니 빨리 정리하고 이야기를 좀 하죠. 저도 바쁘거든요.”

끝까지 느물대는 말투에 시현은 미간을 팍 찡그렸지만, 행동은 거침없었다. 그사이에 성안을 썼지만 정말로 문제없는 물건이었고 당연히 온 신경은 태운에게 향할 뿐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태운에게로 향할 줄 알았던 포션이 유리로 되어 있던 마개가 뽑히자마자 순식간에 시현의 입 안으로 조금 흘러 들어갔다.

‘진짜 문제는 없군.’

상태창은 표면적인 정보만 알려 줄 뿐이니 백 프로 믿을 순 없었다. 그동안 당한 게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 의심이 무색하게도 일반 포션과 비슷한 효과를 내며 시현의 몸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시현은 흘낏 신류하를 바라보곤 조심스럽게 태운을 바닥에 눕힌 뒤 남은 물약을 태운의 입가로 흘려보냈다.

포션은 태운의 입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흡수되며 빠르게 몸을 회복시켰다. 허옇게 질려 있던 얼굴에 혈색이 돌고 호흡이 조금이나마 고르게 바뀌고 있었다.

“후우….”

시현은 그제야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럼 이제 대화 좀?”

“아니, 일단 일행이 쉴 공간이 필요해. 그리고 그 포션 하나 더 넘겨.”

언제 경계를 바짝 세웠냐는 듯 요구가 줄줄 튀어나왔다. 물론 무턱대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회복 효과가 이렇게 빠르단 건 꽤 구하기 힘든 상급의 포션이란 뜻이었다.

게다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대화하기 위해 여태 기다려 준 데다 요구하는 조건들을 다 맞춰 준다… 그것은 제게 꽤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절대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대화를 할 땐 하더라도 몸을 다 회복시키고 만반의 준비를 다 할 생각이었다.

“후우… 좋습니다.”

대처는 무척이나 빨랐다. 신류하는 역시나 포션을 하나 더 준비해 놨는지 망설임 없이 던져서 건넸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신류하의 전화 한 통에 남자 하나가 급히 들어와 일행을 어딘가로 안내했다.

방으로 보이는 문이 두 개, 욕실로 보이는 문이 하나, 그리고 작은 거실과 부엌, 마치 아파트 하나를 떼어다가 둔 것 같은 공간이 눈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기본적인 생활은 다 되실 테지만 다른 게 필요하다면 불러 주시죠. 저는 그냥 이 비서라 부르면 됩니다. 그리고 시현 님은 바로 저와 함께 가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죠. 인사만 하고 따라가죠.”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 원래 이렇게 말을 잘하는 건지 설명은 무척이나 매끄러웠다. 제가 요구했던 모든 걸 일사천리로 제공해 줬는데 더 이상 못 가겠다 버티기도 좀 뭣해서 시현은 별다른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가 걸어온 자리를 따라 길게 이어진 핏자국을 뒤늦게 발견하곤 조금 머쓱한 얼굴로 다시 사과를 건넸다.

“그리고, 바닥은…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괜히 돈 주고 클린을 걸어 놓은 게 아니니까요. 그럼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달칵.

이 비서의 대답은 칼 같았다. 시현은 태운을 조심스럽게 소파 위에 눕힌 뒤 조금 뒤통수를 긁적였다. 문이 닫히고 이제 완전히 세 명만 남자 하정을 바라봤다.

“어떻게 된 거야?”

“시발… 나도 모르겠다.”

하정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자신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확실하게 대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보다 더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를 위해 차근히 설명을 해야 했다. 완전히 자기편인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얘기를 하러 가는데 저렇게 아무것도 모른 애를 보낼 순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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