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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자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헌터란다-93화 (93/146)

#93

등신, 존나 등신이다. 정시현 너는.

마치 벼락이 꽂힌 듯 기억이 물밀듯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제가 밟아 왔던 선택들과 그에 따른 결말들, 그리고 그에 또 이어지는 문제들. 아직은 우후죽순으로 떠오르는 기억에 혼란스러웠지만, 곧 가장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끝까지 저를 바라보던 절망 어린 붉은 눈이었다.

시현이 아직도 얼얼하게 아파 오는 머리를 한쪽 손으로 붙잡은 채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저를 바라보는 태운의 이마를 남은 한 손으로 꾹 내리눌렀다.

“하, 씨발.”

“왜…. 스승님, 왜 그러십니까.”

“스승님? 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하 개 같네.”

“무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이제 완전히 떠올랐다. 태운이는 이 당시에 저를 스승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툭하면 삐지고 툭하면 구석에 처박히곤 했었다. 이렇게 넉살 좋지 않았단 뜻이다.

그래, 굳이 따지자면 겉모습만 아이였지 저 성격은 지금의 태운이와 비슷했다.

아직도 머리는 아팠지만, 시현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니까, 흉내 내지 말고 꺼져.”

태운의 형태를 한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 빨리 되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시현은 이제 막 떠오른, 제가 한 마지막 말을 되새기며 급히 내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단전에 가득 들어차 있던 내기가 기다렸다는 듯 혈맥을 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욱신거리던 몸이 활기를 되찾고 기력이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시현은 그 모든 게 일어나는 찰나를 잠시 음미한 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기로 만들어진 검날을 들어 올려 저를 가로막고 있던 세상을 향해 내리그었다.

찌직.

마치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 같았다. 무언가 무너져 내린다거나 큰 폭발음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종이가 불에 타 재로 화하듯 이때까지 평화로워 보이던 세상이 하얀 불빛에 타들어 가 지워지고 있었다.

“어디서 우리 애를 따라 해. 기분 더럽네. 쯧.”

점점 지워지는 세상 뒤로 콘크리트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알고리즘 오류. 초기화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게 거의 다 사라졌을 때 눈앞으로 모음과 자음이 조금 이상하게 섞인 안내창이 떠올랐다. 내용을 못 알아볼 정돈 아니었지만 딱 봐도 무슨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시현은 잔재 같은 게 묻은 앞섶을 툭툭 쳐서 털어 내고는 급히 발을 움직였다.

자신과 떨어졌다고 혼자 덜덜 떨고 있을 태운이가 눈에 선했다. 게다가 내기도 오락가락하며 상태도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었나. 방금도 내공을 꽤 많이 소모해 조금 힘들었지만 잠시도 쉴 시간은 없었다.

***

“하 미친. 대체 어디야.”

처음 이 게이트에 들어와서 봤던 것처럼 얼기설기 엮여 이어진 길과 허름한 콘크리트 집들, 그리고 이리저리 튀어나와 있는 철근들이 시현의 발걸음을 가로막고 있었다.

솔직히 태운이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익숙한 기운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금방 찾을 수 있었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나 이 안에 뒤죽박죽 흐르는 내기가 태운이를 찾아내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공기 중에 자리한 기운들이 어딘가로 빠져나갔다가 들어왔다가 하며 이리저리 휘돌고 퍼졌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수류처럼 거칠게 흐르는 기운은 얼마 남지 않은 시현의 내기로 무시하기엔 조금 힘든 것이었다.

‘어쩔 수 없나.’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그리고 이 낯선 세상에 떨어졌을 때까지도 늘 하던 말이 있었다. 길 잃어버리면 괜히 혼자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내가 찾아가겠다고.

만약 태운이가 그걸 잊지 않았다면 아직 사마윤의 아지트가 있는 그 쉘터 근처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 장소를 눈으로 확인하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콰앙!

결정을 내리자 시현의 주먹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휘둘러졌다.

“으, 먼지. 진짜 이렇게 무식하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천장을 막고 있던 콘크리트가 단번에 두어 층씩 박살 나며 커다란 구멍을 내보이고 있었다. 처음에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조심스러웠지만 지금은 딱 봐도 크게 잘못된 게 분명해 보였다. 이 상태라면 망설일 건 없었다.

[ㅇ ㅔ러! ㅇㅓㅣㄹ… 타,ㄹ]

시현은 눈앞에 보이는 안내창을 쓱 밀어 없애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목표는 하늘이 보일 만큼 천장을 뚫고 올라가는 것, 그리고 중심을 확인하고 그곳으로 가는 것. 아지트가 중심과 가까웠으니까 대충 그쪽까지만 가면 태운의 기운을 찾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소리를 듣고 어딘가에서 계속 시체 쥐가 튀어 올랐지만, 근처에 오기도 전에 터져 나갔다. 시현에겐 지금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주먹은 쉼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최소 10여 층은 박살 냈겠다 싶었을 때쯤 어두웠지만, 마석 전구의 빛과는 또 다른 빛이 비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비록 아직 게이트 안이었지만 건물 덩어리의 밖일 테다.

시현은 쉼 없이 휘두르던 주먹을 내리고 곧바로 바닥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이게 지금 뭐….”

그러나 처음에 움직이려 했던 계획과는 다르게 시현은 멍하니 건물의 옥상에 서서 위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뒤덮은 균열과 수많은 틈새, 그리고 그 틈으로 보이는 현대 건물들. 시현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자세히 보면 사람들마저 보일 것만 같았다. 아까 느꼈던 허공의 기운들도 저 틈으로 계속 드나들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현은 이 말도 안 되는 풍경에 조금 압도돼 못 박힌 듯 멈춰 서서 고개를 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짝.

그러나 곧 투박한 손이 뺨을 내려쳤다. 그러자 멍하게 멀어지던 정신이 반짝하고 되돌아왔다. 시현은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애써 고개를 내렸다.

지금 중요한 건 저게 아니다.

제 위치는 생각보다 중앙과 멀어 보였다. 이 방향이 원래 있던 곳으로 가는 게 맞다면 가능 도중 태운의 기척을 알아챌 수 있을 테다. 물론 확률은 크지 않았지만.

‘시간도, 내기도 이제 없어.’

시현은 주변을 향해 펼치던 기감을 거둬들이고 발로 내기를 더 집중했다.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은 경공, 즉 빠르게 달리는 거였다.

동시에 시현의 발이 옥상 콘크리트를 세게 박찼다. 몸이 허공을 가르고 다음 건물에 안착했다. 몇 번이나 그 행위가 반복되자 거리가 빠르게 좁혀 들고 있었다.

목표는 저 중간에 있는 원기둥처럼 생긴 건물이었다.

‘그때까지 제발.’

시현은 이제 탐색을 위해 사용하던 내기를 거두고 달렸다. 조금만 있으면 중앙 쪽일 거고 거기서 찾으면 된다고 철저하게 남은 내공량을 계산했다.

그때 심각할 정도로 폐허가 된 구역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자신이 달리던 방향에서 봤을 때 북동쪽, 따지자면 반대쪽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였다.

오면서 본 건물들도 멀쩡한 건 아니었지만 저기는 정말 심했다. 마치 거대한 몬스터가 밟고 갔나 싶은 정도로 한쪽 구역이 개박살이 나 있었다. 그걸 보자 순식간에 주변을 사정없이 박살 내던 검은 기운이 떠올랐다.

‘저기구나.’

결단은 빨랐다. 시현은 중앙을 단번에 지나치고 방향을 꺾어서 잔해만 남은 폐허 속으로 발을 디뎠다.

이제 정말로 내공이 많이 남지 않았다. 시현은 주먹을 콱 움켜쥐고는 세밀하게 내기를 퍼트려 탐색을 시작했다.

“큭, 쿨럭.”

그러나 제가 퍼트린 내기가 어딘가에 부딪히듯 튕겨 나왔다. 시현은 제 기운을 튕기는 공격적인 내기에 몸에 타격을 받고 몇 번이나 기침을 내뱉어야만 했다. 남은 내공도 얼마 없고 몸 상태도 형편없어 조금 고통스러웠지만, 시현은 그 와중에 옅게 웃고 있었다.

“찾았다.”

비록 공격적으로 사방에 퍼져 있었지만, 자신이 저 기운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시현은 몇 번 더 잔기침을 내뱉고는 한 줌 남은 내공에 의지해 저를 기다리고 있을 제자에게 달리기 시작했다.

***

어두웠다. 사방은 온통 가림막에 가려져 있었고 답답했다.

태운은 제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묻었다. 귓가로 웽웽대는 소리가 파고들어 와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아니, 무언가를 부르고 있었다.

흥얼거리듯 낮게 가라앉은 소리였지만 태운은 그게 동아줄인 마냥 쉬지 않고 입에 담고 있었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음계는 엉망이었지만 그건 동요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시현이 저를 눕혀 놓고 자장가라며 불러 주곤 했던 노래였다.

그러나 그 중얼거림은 제가 뿌려 둔 내기를 두들기는 공격에 끝을 맺지 못하고 멈췄다.

이곳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데 자꾸 저를 내쫓기 위해 좆같은 것들이 밀려 들어왔다. 화가 났다. 조용히 그를 기다릴 뿐인데 왜 저를 가만두지 못하고 덤벼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빨리 처리하고 얌전히 그를 기다려야지.

태운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아.”

시현은 열심히 뛰다가 도통 흐려지지 않는 위험한 기운에 멍청하게 멈추어 섰다. 경계라고 보일 정도로 칼같이 구분되어 있는 곳, 그리고 그 안쪽.

지옥도라도 펼쳐진 듯 수를 셀 수도 없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살덩이들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사람을 안 죽여 본 것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이건 인간도 아닌 몬스터였지만 조금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저 바보가….”

연태운은 그 시체들 한 가운데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안력을 돋아서 저 안쪽 깊은 곳에 있는 태운을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저 애가 자신과 떨어지면 많이 불안해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심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된 상황이 오로지 제 잘못은 아님에도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다.

시현은 곧바로 손에 내기를 두르고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 경계에 닿기 전 스파크와 함께 손은 강하게 튕겨 나왔다.

너무 강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견고한 힘이었다. 순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죽 흘러내렸다.

그때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시현은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다 터지고 박살 나서 어지럽게 돌이 쌓여 있는 폐허, 그 사이에서 커다란 잔해를 헤치고 하정이 뛰어나왔다. 사마윤과 미첼은 어디에다 둔 건지 혼자였지만 시현은 친구의 안위를 알게 되자마자 조금은 마음이 놓여 작게 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하정아!”

“정시현!”

“너 대체 어떻게,”

“미친놈아! 그딴 말 할 시간에 일단 저거 좀 빨리 막아!!!”

그러나 시현의 반가움을 담은 인사는 제대로 꺼내지기도 전에 퍼렇게 질리는 하정이 급히 쏟아 낸 말로 뚝 잘렸다.

어느샌가 쭈그려 앉아 있던 태운의 신형이 얼마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제야 그 애의 몰골이 눈 안 가득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하얗고 반질반질하던 피부는 조금 질려 보일 정도로 허예져 있었고 몇 날 며칠 잠도 못 잔 건지 푸석해 보였다. 그리고 어둑하게 내려앉은 눈 밑과 불그스름한 눈가, 퀭한 눈동자가 심각한 상태라는 걸 알리고 있었다. 이런 얼굴은 시현도 처음 본 것이라 충격에 입이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눈가가 핑 하고 아려 왔다. 얼마나 힘들었던 건지 감히 가늠해 볼 수도 없었다.

시현은 미세하게 한쪽 다리를 절뚝대며 걸어오는 태운을 보며 남은 내기를 다 끌어모았다.

“연태운! 내가 정신 차리고 있으랬지!”

옅게 내기가 실린 외침은 머릿속에 박힐 만큼 크게 사방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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