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아, 씨.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시현은 누군가 머리를 발로 밟는 것 같은 고통에 머리를 툭툭 치며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낡은 시계의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게 들어왔다.
아, 시간이.
곧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한마디로 늦었단 뜻이었다. 순간 아르바이트를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두통도 잊은 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부랴부랴 움직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현은 멈칫하고는 섰다가 다시 침대 위로 다이빙하듯 몸을 뉘었다. 낡은 스프링에선 끼익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아, 이제 안 나가도 되지.”
그래, 어제부로 피자집에서 하던 알바는 끝이었다.
배달을 전문적으로 하던 집이었기에 따로 서빙을 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오후 파트 알바생이 바톤터치 해 주기 전까진 그 시간은 배달량도 많지 않았고 사장님 없이 늘 그의 아들인 매니저와 단둘이 시간을 보냈기에 나름 꿀 알바였던 곳이었다.
물론 그것도 그 새끼가 치근덕거리기 시작하고 나선 죄다 망가졌지만 말이다.
처음엔 은근한 언어 희롱부터였다. 물론 그 정도는 한 귀로 듣고 흘리면 되니까 참을 수 있었다. 고등학생 신분에 아르바이트를 찾는다는 건 정말 쉽지 않았고 밀리지 않고 임금을 주는 곳은 더욱더 흔치 않았으니까.
그러나 아무 말 없이 있던 게 문제였을까. 그 새끼는 슬슬 선을 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깨였고 그다음엔 허리였다. 친구들끼리 투덕거리다 보면 흔히 닿는 곳이라지만 그 느낌이란 게 있지 않은가.
물론 시현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순간부턴 참지 않았다. 단번에 사장한테 모든 일을 다 말한 뒤 욕 한번 걸쭉하게 내뱉곤 때려치웠다.
“아니, 표정이 너무 개더러웠잖아. 쯧.”
다신 그 손모가지랑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베어 냈었어야 했는데.
“…?”
시현은 순간 회상을 멈추고 순간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아무리 상상이래도 이건 좀 많이 잔인하지 않나?
제가 한 생각에 조금 진저리가 쳐졌다. 그러나 시현은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오랜만의 휴가를 즐기려 이불을 다시 덮어썼다.
어차피 시간이 났다고 누군가를 만나러 갈 수도 없었고, 만난다고 하더라도 딱히 이런 얘기를 해서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싫었다. 이런 감정들은 시간만 있다면 자연히 지워질 일이었다.
시현은 핸드폰을 들어 올려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뭐,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일단 갑작스럽게 맞이한 이 시간을 얼마나 유용하게 쓰느냐가 중요했으니까.
***
시현이 사라진 지 3일째.
빼곡하게 주변을 채우던 콘크리트 건물들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그 자리를 잘게 다져진 살점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태운은 벽에 천천히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리저리 지랄을 하던 내공은 다시 안정되어 있었지만, 내공만 안정되면 무얼 하나. 그걸 제대로 다룰 만한 정신머리는 지금까지 어디다 버려 놓은 것처럼 멀쩡하지 않은데.
마치 근처에 무언가 다가오면 공격하라는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는 로봇 같았다. 태운은 지킬 것도 없으면서 3일째 그 근처 자리에 서서 내내 맴돌고 있었다.
“미쳤네. 시발.”
그렇기에 하정은 아주 멀리에서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연태운을 감시만 하고 있었다. 저자가 만들어 둔 경계 안으로 들어가면 안면이 있든 제가 시현의 친구였든 변명할 틈도 없이 분명 단번에 목이 떨어질 테니까.
‘정시현 미친놈아, 니 진짜 어딨는데.’
하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수없이 뻗어 나간 균열과 딱지가 떨어져 나간 듯 군데군데 난 틈새로 비쳐 보이는 바깥세상, 아니, 제가 살던 현실 세계. 이런 현상은 그렇게 게이트를 나다녔어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며칠을 올려다봤지만 아직도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형태가 이상하게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있는 시체 쥐 몇 마리가 그새 하정의 근처까지 다가왔다. 하정은 그를 단번에 태우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얼마 전,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나고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연태운의 말에 걸음을 조금 옮겼을 때, 탈출구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게이트 안으로 외부의 헌터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 수백 개의 틈으로 말이다.
사실 이제는 틈이라고 말하기도 무색할 정도였다. 저건 그냥 양방향으로 열린 문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나라에서 파견한 헌터들이었기에 또 공격받는다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고, 내부의 사람들은 차근히 구조되기 시작했다.
기절한 사마윤과 전투력이 거의 없는 미첼을 빨리 밖으로 호송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안심한 것도 잠시, 조우한 헌터들에게 들은 외부의 상황은 하정을 다시 초조하게 만들었다.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셔야 할 겁니다. 아마 그쪽에서도 긴급 동원령이 내려졌을 테니까요.”
전 세계적으로 우후죽순 나타나는 폭발 게이트, 그리고 인력 부족. 자신들이 이 안에 갇혀 있는 동안 밖도 제대로 된 상태는 아니었단 뜻이었다. 그러나 하정은 당장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붙들고 세게 입술을 깨문 채 멍하니 서 있는 연태운을 바라봤다.
애도 아니고 자신이 챙길 필요는 없었지만, 문제는 저 빌어먹을 놈의 정신머리였다. 그는 적아를 가리지 않았다. 당연히 그가 정해 놓은 경계를 넘어선 자는 죽을 테고 일은 어마어마하게 커질 게 분명했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자신은 남아서 다른 이들이 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그래도 그렇지, 게이트 보스라니 시발.”
자신이 만들어 낸 핑계였지만 빈곤한 상상력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저 넓은 공간을 자신이 죄다 마크하면서 경계 넘어가지 말라고 관리를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다행히 헌터들은 무척이나 조심하며 가까이 다가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선 구조도 거의 끝나가 출입이 뜸해지고 있었고. 그러나 여건이 된다면 당장이라도 수백 수천이 쳐들어와서 연태운을 죽이고 게이트를 클리어하겠다고 나설 것 같았다. 뭐가 됐든 빨리 저 자식의 목줄이 필요했다.
캬악-
순간 머리가 배에 달리고 다리가 이상하게 뒤틀려 있는 시체 쥐가 하정에게 달려들었다. 하정은 아무렇지도 않게 불꽃 화살을 흩뿌려 날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 무척 답답했다.
자박.
그때 조금 떨어진 쪽에서 나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은 좀 안 오는 것 같더니. 후….’
아무래도 또 헌터들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하정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 근처는 오지 말라고 윗사람이 말 안 해 줬… 어?”
“반갑습니다.”
정말 이곳에서 만나리라곤 단 한 번도 예상해 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앞뒤 없이 펑펑 일어나는 일에 정신이 없어 당장 눈앞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있었건만 그 모든 게 허사가 되고 말았다. 하정의 머릿속은 그전보다 오히려 더 엉망으로 엉키고 있었다.
***
똑똑.
소리만 들어도 꽤나 조심하고 있는 듯한 노크 소리였다. 당연히 깊게 잠들어 있던 시현을 깨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내부에서 반응이 없자 다시 한번 노크가 이어졌다. 노크는 거의 10번쯤 두드렸을 때쯤 잠시 멎었다.
“스승님!”
시현은 그제야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평소와 달리 몸이 무겁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화경에 든 이후로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으… 일어났어.”
“씻을 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니, 그런 거 하지 말라니까.”
태운이는 참 자신이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굳이 힘든 일을 먼저 해 놓고선 제 반응을 살피곤 했다. 가끔은 다람쥐 같아서 귀여웠지만, 저 어린애가 계속 눈치를 보는 건 탐탁지 않았다.
오늘도 나가서 하지 말라고 일장 연설을 좀 해야겠군.
시현은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느릿하게 방문을 밀어젖혔다.
밖은 무척이나 화창했다. 나무로 만든 울타리를 감싸고 있는 울창한 나무들과 조금은 허름하긴 했지만 단정하게 정리된 안마당. 그리고 저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작은 아이.
순간 웃음이 나왔다. 안 그런 척하고 있었지만, 눈이 땡그래서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시현은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빛을 피해 왼쪽으로 한 발짝 옮긴 뒤에 가지런하게 준비된 세숫물을 바라봤다.
“태운아, 너 오늘도 새벽에 일어났어?”
“….”
“더 푹 자라니까. 자꾸 그럼 키 안 큰다?”
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던 눈동자가 슬쩍 돌아가 옆을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말랑한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솔직히 너무 귀여워서 더 놀려 주고 싶었지만, 이제는 저 이상 하면 온종일 입을 다물고 말을 안 할 걸 알았기에 이쯤 해 둬야 했다.
“하여튼 네가 종도 아니고 자꾸 이런 거 하지 마. 다음에 또 그러면 혼난다.”
물론 비슷한 말을 벌써 열댓 번은 한 것 같았고 단 한 번도 혼낸 적이 없었지만, 시현은 또 엄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알겠습니다. 심려하지 마십시오.”
제 허리까지밖에 안 오는 녀석이었지만 얌전히 수긍하는 모습을 보자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언제 이렇게 어른스러워졌지.
시현은 곧바로 픽 웃으면서 결 좋은 까만 머리를 북북 흐트러트렸다. 괜히 가슴께가 간질간질하고 자꾸 입꼬리가 씰룩댔다.
“으으, 스승님!”
“윽.”
그때 머리가 지끈하고 아파 왔다. 가뜩이나 몸 상태도 좋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고통이 느껴지자 절로 몸이 휘청였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시현은 순간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기감을 펼치고 확인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건 평범한 현상이 아니었다.
독? 아니면 사술? 뭐가 됐든 걸리기만 해라.
저절로 표정이 굳었다. 그러자 태운이 불길함을 느꼈는지 시현의 한쪽 팔을 부여잡고 잔뜩 울상을 했다.
“스승님!”
마구 흔들리는 앳된 목소리가 널찍한 앞마당을 채우고 사라졌다 다시 이어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몸은 무겁고 머리는 찌를 듯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 와중에 이상하게 잠이 오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 졸리다고? 갑자기?
“안 되겠습니다. 스승님.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 안으로 들어가서 쉬십시오.”
그 순간 당장이라도 주변을 살펴보려 튀어 나가려고 했던 시현의 움직임이 딱딱하게 멈췄다. 그리고 제 팔뚝을 붙들고 방 안으로 데려가려 했던 작은 아이에게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