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야, 일어나!”
끄응….
시현은 귓속을 파고드는 날카롭고 쨍한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소리도 소리였지만 머리를 울리는 고통과 여린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에 계속해서 모른 척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단번에 일어났을 텐데 뭔가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워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누구…?”
“누구? 하, 진짜 어이없네. 뭐 됐어. 어차피 오늘부터 볼일 없을 테니까. 빨리 꺼져 버려, 거지야.”
8살쯤 됐을까. 퉁실한 몸을 가진 어린애는 나이에 맞지 않게 무척이나 표독스러운 얼굴과 말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시현이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게 못마땅했는지 아직은 작은 손을 들어 올려 거칠게 그를 일으키고는 문 쪽으로 밀어 내기 시작했다. 작은 손이 얼마나 우악스러운지 조금 방심했던 시현은 거센 힘에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힘이 왜 이렇게 세?’
시현의 몸은 그 손길에 얼떨결에 방 문가까지 밀려졌다. 그리고 열려 있는 문을 통해 거실까지 쫓겨나듯 발을 옮겨야 했다.
거실은 아주 넓었고 화려했다. 특히나 그 거실의 한구석을 장식하고 있는 피아노가 이 집안의 경제 상황이 어떤 수준인지 정확히 보여 주고 있었다.
‘아, 맞다.’
그때야 흐릿한 머릿속이 조금 개는 것 같았다. 오늘은 제가 입양됐다가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었다. 한마디로 파양을 당했단 말이었다. 자신이 강아지도 아니고 어이가 없긴 했지만 어쨌든, 어린아이에게는 어떠한 선택권도 있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지.
얼마 전 작은 사고가 있었다. 자신이 이 집안의 친자인 저 자식을 붙들고 엄청나게 주먹질했던 일이었다. 원인은 제가 이 집에 왔을 때쯤부터 시작된 괴롭힘 때문이었지만 결론적으로 몸이 다친 건 그 애였기에 굴러들어 온 돌인 저는 할 말이 없었다.
순간 그 애의 폭언과 괴롭힘을 꾹 참고 이 집에서 계속 버텼어야 했나 아주 잠깐 후회가 들긴 했지만 그건 얼마 가지 못했다.
“너 너희 엄마가 고아원에 버리고 간 거라며?”
“누가 그래? 아닌데?”
“다, 다 그렇게 말하거든! 뭘 물어봐? 그것도 몰랐냐, 멍청아?”
벌써 퉁퉁하게 살이 올라서 심술을 부리던 그 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다시 한번 그 애를 때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더 때려 주지 못해 아쉽기까지 했다.
부모의 애정을 독차지하고 싶어 저를 질투하는 건지 조금 까칠하긴 했지만 처음엔 이렇게까지 우악스럽게 대하진 않았었다. 그러나 제 입에서 나온 하나의 호칭에 꽤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았다. 그 애는 제가 어머니를 부를 때마다 마치 뭐라도 뺏긴 듯 얼굴을 구겼다.
이 집에 입양 왔으니 제게는 그저 당연한 호칭이었을 뿐이지만 저 애한테는 아니었던 거다. 자녀가 이미 있는 집안에서 이렇게 자신처럼 큰 애를 입양했을 때 생기는 흔한 부작용이었다.
하여튼 그때 이후로 계속 집안은 시끄러웠고 그것을 모른 척하는 양부모의 방치와 함께 저를 향한 모욕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물론 같은 8살이었던 시현도 그것을 참지 못했고 결국 이렇게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솔직히 억울했다.
이럴 거면 저를 왜 데려왔나, 왜 잘해 줄 것처럼 하더니 도로 빼앗아 가나 원망도 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들도 결국 금방 시들었다.
‘실망할 것도 없어, 어차피 남이니까.’
그래, 어차피 진짜 가족도 아니니 당연했다. 그러니 딱히 별 상처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다.
순간 머리통이 또 찌릿하며 아파 왔다. 그러고는 아까 잠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눈앞이 순간 흐려졌다. 시현은 작은 고사리손으로 머리통을 움켜쥐고는 여전히 옆에서 못된 말을 해 대는 자식을 모른 척하고 화장실로 발을 옮겼다.
***
시현은 순간 눈을 번쩍 떴다.
푹신한 침대도 아니고 좋은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좋은 침대에서 자던 것보다 더욱 상쾌했다. 창밖은 아직 새벽인 듯 여린 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지만, 더 자야겠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야.”
그때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찍 깨어난 건지 하정이 조금 부스럭대더니 말을 걸어왔다.
“왜?”
“너 왜 다시 왔냐?”
“그냥. 쫓겨났지 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하정은 잠시 기지개를 쭈욱 펴더니 상체를 일으켰다.
“너 같은 애도 다시 오긴 하는구나. 하긴 우리 나이에 입양 가는 거 자체도 힘들긴 하지.”
“할머니같이 말하네.”
“뭐? 죽을래?”
시현은 하정의 궁금증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곤 곧장 상체를 일으켰다. 일찍 일어난 김에 형들처럼 산책을 좀 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킥킥대는 하정의 웃음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곧바로 가느다란 팔이 목을 콱 잡고 졸라 오기 시작했다.
“아! 야! 야!”
“헤드락!!”
최근에 자주 보던 레슬링의 기술 중 하나였다. 시현은 캑캑대다가 하정의 등짝을 꽉 꼬집었다. 그리고 꽥 소리를 지르며 힘이 빠지는 하정의 팔을 홱 떨궈 내고 벌떡 일어났다. 그 소란에 함께 자고 있던 애들이 칭얼대며 눈을 비볐지만, 괜히 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어른들끼리의 문제도 많아 보였고 보육원의 환경도 열악했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안했다.
시현은 하정에게 똑같이 헤드락을 걸었다. 그리고 곧 항복을 외치는 하정의 목소리에 씨익 웃고는 손을 탁탁 털며 다시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산책은 내일 해야지.
이불을 덮자 잠은 금방 다시 몰려왔다. 아까 깬 것이 이상한 거라는 듯 금방이라도 눈이 감길 것 같았는데 그 와중에 뭔가 찝찝한 감각이 가시질 않았다.
‘아, 뭔가 까먹은 것 같은데, 뭐였지?’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까먹고 놓고 온 물건도 없었고 밥도 엄청나게 잘 챙겨 먹고 있었다. 왜 이런 불안감이 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뭐, 됐다.’
일단 그게 뭔지 알아내는 것보단 얼른 자는 게 급했다. 시현은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
처음은 부정이었고, 지금은 두려움이었다.
태운은 멍하니 서서 시현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고 계속 자신을 다그쳤지만 그렇다고 사라진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온몸이 가늘게 떨려 왔다.
파악할 수도 없는 이상 현상을 일으킨 기 폭풍은 건물 덩어리를 거의 반파시킨 뒤 사그라들었고 그에 드러난 허공은 천천히 균열을 퍼트리며 게이트의 이상을 알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죽을까….”
결론을 내렸다. 모든 건 부정할 수 없이 다 제 탓이었다. 제가 더 강해서 단번에 그것을 베어 버렸더라면, 아니, 정신이라도 제대로 방비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그저 스승님과의 일상이 너무 즐거워서 다른 것은 생각지 못하고 정신을 빼놓고 다녔던 저 자신이 너무 혐오스럽고 원망스러웠다.
어디에서도 스승님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은 마치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나마 그때는 시현이 남기고 간 것이 있어 그걸 기반으로 흔적을 찾았다지만 지금은 제 손안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상실감뿐이었다.
“너 제정신 차리고 살아 있어. 내가 꼭 찾아갈 테니까.”
그 순간 시현이 사라지기 직전까지 신신당부하고 간 말이 떠올랐다.
스승님, 기다리면 올 거예요? 진짜 절 버리지 않고 찾으러 오실 건가요? 제가 또 잘못했는데도요?
몇 번의 물음이 불쑥 튀어 올랐지만, 그에 대답을 해 줄 이는 이곳에 없었다. 이 같은 잘못은 처음이 아니고 두 번째였다. 아니, 세 번째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신은 단 한 번도 그것을 제지하지 못했다. 그를 다시 만난다고 하더라도 제 이 지겨운 실수에 실망해 저를 내칠 것만 같아 불안하고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눈물이 허연 볼을 타고 흘렀고 점점 숨이 막혀 왔다.
“태운 씨! 정신 차려요! 시현이는 어디에!”
옆에서 들려온 하정의 물음에도 태운은 멍청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누가?
그때 텅 빈 것처럼 캄캄했던 머릿속에 하나의 명제가 들어섰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느냐. 순간 헐떡이던 숨이 훅 하고 멈추고 얼어붙었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니! 연태운 씨 어디 가냐고요! 대체 이게 뭐 어떻게 된 건데!”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답답한 가슴을 퍽퍽 쳐 대며 소리치는 하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태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앞에는 아까부터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망가진 상태창이 오류라는 내용을 표시한 채 떠 있었고 기존의 몬스터와는 다른 듯 비슷한 듯한 기운이 흐릿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래로 가지런히 내려가 있던 손이 움직여 흥건히 젖은 입가를 쓱 닦아 냈다.
“여기서 벗어나라.”
낮게 흘러나온 말과 동시에 아직도 이곳에 살아남아 있는 것들의 목숨이 작은 검은 물방울에 관통돼 손쉽게 스러졌다. 스피커가 꺼지듯 자잘하게 들려오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입가로는 다시 검붉은 핏물이 흘러나왔지만, 오히려 목줄기를 옥죄는 고통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미친….”
연태운은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금 초점이 흐릿했고 얼굴은 가면을 씌운 듯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그게 다라면 하정도 무슨 개소리냐며 시현이 그렇게 아끼던 그를 데리고 게이트를 빠져나가려 했겠지만,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주변을 휩쓸고 사라진 검은 것에 소름이 돋아 저절로 뒷걸음이 쳐질 뿐이었다.
제게 이곳을 벗어나라고는 하지만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님을 너무 잘 알았다. 이때 벗어나지 않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가.”
태운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더니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기운에 압도돼 딱딱하게 굳어 있던 하정은 천천히 그 손끝이 향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난히 균열이 많이 가 있는 곳이었다.
“언니….”
하정은 제 손을 꽉 쥐는 작은 손길에 빠르게 제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태운을 향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 기절한 사마윤을 둘러멘 채 미첼과 출구로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