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달려 이 원인을 찾아내 영향을 주는 이들을 추궁하고 해결 방법이 없다면 위협하는 것들을 모두 죽이는 수밖에.
시현은 보석과 얽혀 멍하니 앉아 있는 이를 내려다보다가 단번에 손을 움직여 이제는 암 덩이처럼 보이는 그것을 도려냈다.
응집석은 손짓 한 번에 바닥으로 떨어져 나와 몇 바퀴 구르더니 뒤쪽에 있던 다른 헌터의 발치에 부딪혀 멈추어 섰다.
우우우웅-
응집석이 떨어져 나오는 순간, 이 ‘쉘터’를 감싸고 있던 진법이 조금 뭉개지기 시작했다.
“하. 이것 봐라.”
동시에 거대한 공기의 떨림이 느껴졌다. 아니, 떨리다 못해 진짜로 소리를 내며 꿀렁이고 있었다. 시현은 응집석을 주워 들고 득달같이 달려오는 헌터들의 기운에 조소를 지었다.
콰앙!
시현과 태운이 서 있던 곳과 반대쪽에 있던 철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 미친 새끼들! 너네 대체 뭐야!”
그들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에 급히 달려온 듯 혼비백산한 얼굴로 빠르게 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해 줄 의무가 없던 시현은 단번에 지강을 흩뿌려 공격을 시작했다.
투쾅! 쾅!
“크윽!”
“컥!”
아무런 예고도 없이 뿌려진 강기들에 두어 명이 맞고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괜히 A, B급이 아닌지 대부분은 어찌저찌 피하거나 스킬을 써서 시현의 공격을 막아 내거나 반격을 해 왔다. 몇 개의 원거리 공격과 마법이 쏜살같이 다가왔지만, 시현은 몸을 왼쪽으로 돌려 흘리고 손으로 나머지 것을 쳐 냈다. 튕겨 나간 마법이 부딪힌 천장이 박살 나며 먼지를 만들어 냈다.
공격이 막혔지만, 시현은 그에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환영해 줄 겸 간단히 뿌린 내기였다. 겨우 이거에 다 나가떨어졌으면 오히려 실망을 했을 거다.
“이거 어디서 났지.”
“크읏… 대, 대체 너넨.”
꽤나 넓은 공간이었지만 이미 있던 20여 명의 헌터들과 뛰쳐 들어온 다른 헌터들 덕에 내부는 좁게 느껴졌다. 그래서 저들의 긴장감이 아주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시현은 저를 마주 보고 있는 레오의 턱선을 타고 내려오는 땀방울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핏-
아주 얇고 날카로운 것이 무언가를 베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붉은 핏줄기가 허공으로 뿜어져 나왔다.
“크학!”
“다시 안 물어본다. 이거 어디서 났지?”
일행 하나가 텅 비어 버린 다리 한쪽을 붙잡고 바닥으로 엎어져 괴롭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레오는 시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퀘스트를 완료하고 받았다. 보상으로 받았으니 살기 위해 마땅히 사용한 것일 뿐이야.”
그 대답을 듣자 왜 퀘스트가 단순히 몬스터들을 보내 위협하는 것에서 그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냥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이런 자들이 알아서 행동하도록 말이다. 살인을 한 자들에게만 그런 퀘스트를 내리고 그것을 더 부추긴다. 얼마나 쉽나. 복잡하게 계책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 당장 되돌려놔.”
시현은 이어지는 레오의 말에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저 말을 그대로 따를 거라 생각하고 뱉은 걸까 잠시 가소로운 의문이 들었지만, 시현은 이내 잠시 들던 방심을 빠르게 지워 냈다.
그 순간 시현의 표정에서 제 뜻대로 해 주지 않을 거란 걸 읽은 듯 레오 일행은 예고 하나 없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사마윤의 걱정이 과한 건 아니었는지 이들의 공격력은 제법 강력했다. 하나하나의 힘도 그랬지만 오래 맞춘 합이 저들의 공격력을 더욱 올려 주고 있었다.
시현은 한 손에 든 응집석을 더 단단히 움켜쥔 채 치달아 오는 마법 포격을 떨쳐 내고 단번에 내부의 가장자리까지 몸을 물렸다. 그리고 적의 진영으로 짓쳐 들어간 태운의 학살을 바라보며 재빠르게 전음을 날렸다.
{태운아, 많이 움직이지 말고 쉬어.}
저들은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니 몸 상태가 멀쩡치 않은 태운을 보호하고 자신이 움직이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바로 뒤에 있는 벽을 박찼다. 그 힘에 의해 몸이 앞으로 쏘아졌고 시현의 신형이 순식간에 넓은 내부를 가로질렀다.
그때, 마치 유리잔이 깨지는 것 같은 청아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은 제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공격하려던 발을 급히 멈추고 시선을 내렸다. 당장이라도 깨질 듯 크게 금이 간 보석이 보였다. 자잘한 실금은 제가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지금도 빠르게 생기고 있었다.
‘설마 숙주와 일정 거리 제한이,’
쨍!
생각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결국 응집석은 버티지 못하고 커다란 소리를 내며 가루가 되어 시현의 손에서 떨어져 나왔다.
사아악-
그 순간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응집석이 깨지자마자 막대한 양의 기운이 폭풍처럼 쏟아져 나와 주변과 몇 겹의 천장을 박살 내고 위로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노란빛을 띠던 보석과는 다르게 그 안에서 튀어나온 기운은 무척 불길한 검은색이었다. 그 검은 연기는 허공에 점점 모여들어서 순식간에 사람 상체만 한 크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태운아!”
딛고 있던 바닥이 부서지자 급히 벽을 밟고 뛰어오른 시현은 콘크리트 조각과 뒤섞여 무너진 바닥으로 내려앉는 헌터들을 보다가 태운의 위치를 급히 확인했다.
“스승님!”
시현은 저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서 있는 태운을 보곤 입술을 깨물며 저 자신을 타일러야 했다. 저 애는 나보다 강하다. 그러니 나만 잘하면 된다.
계속 안 좋은 느낌이 머릿속을 채우려 들었지만, 이 상황에 그것에 몰두해 봤자 도움은 되지 않았다. 지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지금에 맞게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시현은 어지럽게 들려오는 일반인들의 비명에 정신을 차리고 저 위에 있을 일행들을 떠올리며 빠르게 잔해를 밟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마윤! 하정아!”
시현은 재빨리 원래 지냈던 층에 도달해 급히 일행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외침은 이제 사람 두셋을 합친 것보다 커진 검은색 홀에서 쏟아지는 기폭풍에 힘없이 흩어졌다.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조심성 없이 움직여 그 응집석을 깨트려 버린 게 너무나도 후회가 됐다.
“크윽….”
그때 사방이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과 살려 달라는 애원으로 시끄러운 현장 그 사이에서 작게 들려오는 신음은 시현의 귓속으로 날카롭게 틀어박혔다.
“태운아! 왜, 왜 그래!”
태운은 시현의 물음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기의 폭풍이 팍팍 터져 나올 때마다 다시 내공이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여러 말이 지나갔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내뱉을 순 없었다. 이 상황에 내 상태가 안 좋으니 날 두고 도망쳐라? 죄송하지만 그것은 죽어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시현을 이 상황 한가운데에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눈 안으로 저를 보며 제 이름을 외치는 시현과 그 뒤로 새카만 구멍이 겹쳐 보였다. 절로 욕설이 입 안을 굴러다녔다. 그래, 연기가 모여든 거였지만 저건 구멍이었다. 온통 까맣게 보였음에도 분명 저 안에 공간이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스승님! 이쪽으로!”
마음이 급해졌다. 전투에서 초조하게 구는 것만큼 삼류스러운 짓이 따로 없었지만, 태운의 눈에는 지금 보이는 게 없었다. 제힘이 또 미친 짓을 벌이기 전에 빨리 저것을 마무리해야 했다.
이 상황에 내기를 운용한다는 게 엄청난 무리수라는 건 알았지만 이 상태로 능력이 사라져 짐 덩이가 되는 것보단 나았다. 어차피 멀쩡한 몸으로 운용해도 이 정도의 힘을 쓴다면 며칠은 쉬어 줘야만 하는 기술이었으니 내상을 입든 말든 상관도 없었다.
‘자연검.’
제게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시현의 발걸음이 너무 느리게 느껴졌다. 그냥 주변의 모든 것들이 다 느렸다. 하다못해 초식을 내뱉는 제 입 모양마저도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야! 연태운! 안 돼!”
저 앞에 있는 홀과 견주어도 될 만큼 시꺼먼 내기가 태운이 들어 올린 손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모여들어 거대한 창의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태운의 입가로 핏물이 울컥 흘러나왔다.
내공을 다루는 게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억지로 내공을 움직여 대니 장기에 과부하가 걸렸고 사실은 이미 장기 하나는 파열된 것 같았다. 당분간은 몸이 말이 아닐 테지만 이것저것 재고 따질 겨를이 없다. 그 검은 홀 안에서 형체를 갖춘 무언가가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흔들림 없이 앞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2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검은색 강기의 창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가 내리그었다.
“거창.”
검은 창과 검은 구멍의 가장자리가 맞닿는 순간, 오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마치 홀로그램이라도 깨지듯 사방이 조각나며 균열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거나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이었다.
순간적으로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청력이 압력에 가로막힌 듯 멍멍해졌다. 내공은 과도한 운용에 용암처럼 들끓으며 혈맥을 뜨겁게 만들고 있었고 내장은 더 상한 건지 입 밖으로 다시 한번 다량의 핏물이 쏟아졌다. 그 와중에도 아련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작은 목소리와 긴박한 시현의 얼굴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왜?’
저 끔찍하도록 불길한 구멍은 제 공격을 맞고 사라지고 있었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 공간도 깨어지고 있었다.
‘근데 대체 왜 그리 절박한 표정을 하십니까 스승님.’
태운은 미치도록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서 잘 흘러가지 않는 사고를 열심히 움직이려 애썼다. 그러던 도중 검붉은 내기로 틈 없이 둘러진 시현의 손이 제 손에 닿는 순간 찬물에서 건져 올려지듯 정신이 일깨워졌다.
순간 몸의 위치가 바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몸은 이미 움직였지만, 머리가 그것을 느리게 받아들인 것이었다. 자신은 그 검은 공간이 찢어지며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던 균열에서 벗어나 반대쪽에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시현은 저를 당겨서 돌려놓지 않았으면 제가 휘말렸어야 하는 곳에 서 있었다.
“너 제정신 차리고 살아 있어. 내가 꼭 찾아갈 테니까.”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절규와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는 태운의 주의를 조금도 끌 수 없었다.
“연태운, 대답해.”
그 와중에도 시현은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태운에게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태운은 저도 모르게 알겠다고 대답하려 피범벅인 입술을 들썩였다. 그리고 잠시 쓰라린 눈을 깜빡였을 때, 시현은 결국 제 대답을 듣지도 못하고 균열 속 빛에 흔적도 없이 먹혀 들어갔다.
스승님은, 정시현은 그렇게 제 눈앞에서 또 사라졌다.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