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솔직히 그 5명을 제압하고 아이템을 가져오는 일은 무척이나 쉬웠다. 그들이 A급 B급이라도 달라질 일은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는 수십 명의 기운과, 태운이 알려 온 연합과의 연관성 때문인지 그 쉬운 일마저도 버겁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신의 광산도, 이규환도, 태운의 이상 현상도 다 게이트라는 매개를 가지고 문제들과 조우했었다. 순간 팔 위로 얕게 소름이 돋았다.
‘설마 이 게이트 자체도 연합과 관련이 있다고?’
시현은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이며 일행을 이끌고 비어 있는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그리고 주변으로 기막을 씌우며 입을 열었다.
“사마윤. 일단 여기 혼자 있어야겠다.”
“예?! 왜,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아….”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설명은 길지 않았다. 시현은 잔뜩 불안하단 얼굴로 손을 꿈질대는 사마윤을 등지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곧바로 손 위로 내기를 길게 뽑아내 바닥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바닥은 왜….”
“쉿. 이제 기막을 치울 거니까 입 다물고 있어.”
사마윤은 단답하는 시현과 제게는 눈길조차도 주지 않는 태운에게 차마 꼬치꼬치 캐묻지 못하고 속으로만 계속해서 투덜댈 뿐이었다.
***
즈즉.
몸의 크기에 맞게 뚫린 구멍으로 뛰어내리자 순간 비닐 같은 것이 몸에 달라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현은 불쾌함을 느꼈지만, 그와 동시에 기척을 숨기고 뒤따라서 들어온 태운과 함께 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태운이도 느낀 거 보니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긴말하지 않아도 눈을 마주치자마자 같은 기운을 느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딱히 진법 같은 것은 아니었고 이 근처에 깔려 있는 기운의 성질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진득한 안개처럼 퍼져 있는 기의 가운데에 그 20여 명의 인원이 그 유리 조각의 기운을 품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죄다 헌터들이라… 어쩐지 헌터들이 너무 없다 싶더니….’
산발적으로 흩어진 단서들이 점점 모여드는 기분이었다. 아직은 완전한 그림을 그릴 정도는 안 됐지만, 연합과 게이트가 관련이 있다는 가정을 한다면, 여기에서 그 목표를 조금이나마 밝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목표가 뭔지 알아낸다면 그 목표를 위해 힘쓰는 이들을 빠르게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고. 시현은 어금니를 강하게 즈려 물었다.
{태운아, 혹시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이상 생기면 바로 말해야 해.}
{걱정 마십시오.}
시현은 창이었지만 이제는 유리가 달리지 않은 구멍으로 뛰어들면서 태운에게 전음을 날렸다. 태운에게 미안한 말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그 애를 믿고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잘 붙어서 와.}
물론 그 사실을 티 낼 순 없었다. 그러면 서운해할 테니까. 시현은 태운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곧이어 복도로 보이는 좁은 길에 내려서며 앞에 보이는 작은 문을 열어젖혔다.
끽.
녹슨 문이 잠시 긁는 소리를 냈지만, 시현은 소리가 울려 퍼지기 전에 넓게 기막을 치곤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이제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레오 일행이 모여 있었다. 아무리 자신과 태운이 힘을 합하면 빠르게 제압할 수 있다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손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자신에게는 갑작스레 나타날 변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큰 긴장을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아예 내려놓을 순 없었다. 시현은 잠시간 얌전히 멈춰 서서 상황을 보다가 위에 있는 이들이 딱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다시 한번 손에 내기를 덮어씌웠다.
{스승님.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나 손이 바닥을 향해 움직이기도 전에 태운의 손이 부드럽게 시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순간 몸이 움찔 튀었지만,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군말 없이 양손을 뒤로 돌려 움켜쥐었다. 이런 와중에도 괜히 과민 반응 한 게 민망해졌다.
{어.}
시현은 조금 더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 대답에 평소 같았으면 조금이나마 서운하단 티를 냈겠지만 태운은 여전히 웃는 낯을 한 채 바닥에 손을 내려놓고 있었다. 곧 하얀 손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스걱.
콘크리트를 자른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예리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은 손쉽게 잘려 나갔고 아래로 또 다른 텅 빈 공간을 내보였다.
앞으로 두 층, 층이라고 부르긴 애매했지만 헌터들로 추정되는 이들이 갇힌 곳에 도달하려면 어쨌든 두 번을 더 내려가서 이 쉘터의 중앙 쪽으로 좀 더 가야만 했다. 시현은 망설임 없이 아래로 내려서는 태운의 뒤를 따라 어두운 내부로 들어섰다.
‘자연지기인가? 근데 느낌이 좀….’
안쪽은 밖에서 느껴졌던 것보다 더욱 강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능력자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과 가까워질수록 예의 그 기운이 점점 진해지고 있었는데, 진하다 못해 진득거릴 정도여서 무척 찝찝했다. 그러나 그게 자연지기처럼 느껴지는 만큼 마냥 나쁜 기분은 아닌 것 같아서 더 이상했다.
시현은 다시 한번 바닥을 베어 내고 있는 태운을 한번 봤다가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운을 슬쩍 움켜쥐었다.
‘뭐… 곧 결과가 나오겠지.’
{이제 바로 앞입니다.}
그리고 원래도 바짝 감각을 세우고 있었지만 이어지는 전음에 더욱 움직임을 조심하며 움직였다.
입이 조금 마르고 초조했지만 곧 연합이 대체 뭔 짓을 한 건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게 맞다면 연합의 정체와 지금 이 퀘스트를 우회할 방법 또한 추측해 낼 수 있을 거다. 시현은 거침없이 움직이는 흰 손에 시선을 고정하고 조각난 돌가루들이 쏟아지자마자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씨발… 이게, 지금 뭐,”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작게 음성이 흘러나왔다. 제 실수를 깨달은 시현은 재빠르게 입술을 꽉 즈려 물었지만 요동치는 감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20여 명의 헌터들은 일정 간격을 두고 ‘앉혀’져 있었다.
사지가 결박된 채 바르작거리고 있는 이들은 어디서부터 연결되었는지 모를 관 같은 걸 하나씩 입 안에 꽂은 채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박은 강해 보이지 않아 헌터들이라면 오래 걸리더라도 끊어 낼 수 있어 보였는데 이들은 그럴 의지마저 잃은 것처럼 보였다.
아주 처참한 광경이었다.
{스승님. 저기.}
그때 제 옆에 같이 멈춰 있던 태운이 언제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조금 오른쪽으로 움직여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풀고는 재빠르게 태운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 그의 손끝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모두가 처참한 상태였지만 태운이 가리킨 이 사람은 그중에서도 가장 상태가 심각했다. 입에 관을 물고 있진 않았지만, 그의 등 뒤로는 다른 이들과 연결된 수십 개의 관이 쑤셔박혀 이어져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사실 그뿐이라면 이렇게 아연하지도 않았을 거다.
보석은 남자의 쇄골쯤에 얽혀져 있었다. 피부는 마치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린 뒤 굳은 것처럼 뭉개져 보석의 가장자리를 감싸고 있었고, 보석에서부터 핏줄 같은 게 그물처럼 뻗어 나와 남자와의 결합을 견고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건 무슨 숙주에게 달라붙어 있는 기생충 같잖아….’
제가 보기에도 조금 역겨운 광경에 입 안으로 수많은 욕설이 나뒹굴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게 그 기운을 품은 것 같습니다.}
손끝을 따라 다시 한번 시선이 움직였다. 머리가 분노로 어지러워 태운이 처음 설명해 줬던 미세한 그 기운이 잡힐까 말까 했다. 솔직히 처음엔 인간이란 모름지기 권력에 미치는 생물이기 때문에 저들이 이 작은 쉘터를 차지하고 싶어 헌터들을 잡아 놓았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게다가 뭔가 알 수 없는 공간까지 찾아냈으니 더 욕심이 났을 테고.
그래서 유리 조각의 기운이 대체 왜 저기에서 느껴지나 의문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태로 만들어 놨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시현은 심호흡하며 분노를 힘겹게 눌러 내리고 성안을 펼쳤다.
[응집석(87%) - 기운을 한계까지 빨아들였다가 단번에 뱉어 내는 씨앗]
낯익은 단어였다. 어디선가 한번 들어 봤던 이름이었는데 한 번에 생각나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던 시현은 순간 번뜩이는 하나의 기억에 덜컥 멈춰 서야 했다.
‘이거… 신의 광산에서 가져온 거랑 이름이 똑같잖아…?’
호텔에 두고 온 캐리어에도 이와 똑같은 게 하나 있었다. 별다른 특이점은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는데 여기서 갑자기 그 아이템의 활용법을 알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럼 저 ‘기운’이라는 게 사람의 생명력이란 말인가.
시현은 떨어져 있던 몇 가지 단서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처음 저 아이템을 얻은 신의 광산에서도 그들은 용병들을 모아다가 연료 취급을 하며 그들을 죽였고, 지금 이 게이트의 퀘스트가 원하는 것도 생명력이었다. 게다가 연합과 관련된 걸로 느껴지는 아이템도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생명력을 모아서 대체 뭘 하려고? 뭐 사이비답게 신이라도 부르려고? …아니, 잠깐.’
그들의 목표를 확정 짓자 저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순간 그 연합과 관련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이가 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게 떠올랐다. 등 뒤로 순식간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태운이 너 내기에는 영향 없어?}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흘러간 찰나의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
답은 없었다. 태운이는 제게 거짓말을 하지 못했고, 전음을 듣지 못한 것도 아닐 테니 의미는 대충 전달이 됐다. 시현은 그제야 제가 숨을 멈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씨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평소라면 힘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연합에게, 알 수 없는 무리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시현에게는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길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사방에 자리한 벽이 천천히 조여들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