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지금 오면서 아이템이라고는 찾아보지도 못했어. 그게 남아 있을 거라고 내가 어떻게 확신하지?”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건 제 스킬로 만든 것이니까요.”
“스킬?”
“하아… 그, 제 스킬 중 하나가 정보를 수집하고 보관하기 위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 능력입니다. 편법을 쓰면 아이템 같은 것도 보관할 수가 있었고요….”
예를 들면 인벤토리나 창고 같은 거란 말인가. 사마윤이 제 스킬을 죄다 까발리는 것에 조금 거부감이 드는지 머뭇거리며 말을 잇자 시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가 터지며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은 바뀌었지만, 아이템은 사라지지 않았다. 태운의 목에 걸린 목걸이나 하정의 반지 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스킬도 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아니, 오히려 게이트 발생의 여파로 제가 뿌려 놓은 귀랑 눈이 다 터졌는데 저렇게 확신하는 걸 보면 대충 그 상태를 알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가능성이 있어 보이긴 하네.”
“그렇지요!”
“좋아, 생각해 보지.”
사마윤은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시현의 대답에 화색을 띠더니 주먹을 꽉 쥐고는 마력을 휙휙 뽑아내기 시작했다. 찔끔찔끔 닳던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모양새였다. 이제야 좀 제대로 말을 들을 생각인 것 같았다.
사삭.
그때 잠시 대화가 끊어져 침묵이 깔렸을 때, 여기저기 깔린 그림자 쪽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동시에 태운의 발걸음이 멈추더니 어디서 뜯어낸 건지 모를 콘크리트 파편 두어 개가 망설임 없이 쏘아져 나갔다. 시현 말고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끼애애애액!”
“아, 미친 깜짝이야.”
그것은 피부가 벗겨진 것 같은 형태를 한 붉은색의 커다란 쥐였다. 빛을 비추자 근육 조직이 그대로 보이는 피부 위로 진물 같은 것이 흘러나와 빛을 반사하며 번들거리고 있었다. 꽤 혐오감이 들게 할 법한 생김새라 시현은 주변 일행의 상태를 둘러보며 괜찮은가 체크를 해야만 했다.
“으, 우엑.”
안 그래도 흉측한 생김새인데 태운이 던진 돌에 맞아 반쯤 터져 있으니 더 보기 안 좋은 꼴을 하고 있었다. 사마윤은 그것을 보는 게 역겨웠는지 등을 돌려 연신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아, 참.’
그걸 보기 힘들어할 것은 사마윤 말고 또 있었다.
시현은 아차 싶어 뒤늦게 미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헤… 저, 저걸로 물약 재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어, 뭐?”
그러나 튀어나온 말은 시현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고작 13살이라고 했던 아이는 그 특유의 멍한 얼굴로 쥐의 사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현에게 눈을 맞춰 왔다.
“저거 제가 가져도 돼요?”
“…….”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시현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첼은 조금 발걸음을 다그쳐 그 사체로 다가가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얼빠진 채로 있던 것은 하정도 마찬가지였는지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슬쩍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고 뒤늦게 아이 옆에 다가갔다.
“어어, 내가 해 줄게.”
“괜찮아요.”
미첼은 저를 도와주겠다고 다가온 하정을 바라보다가 옅게 미소 짓고는 다시 쥐의 사체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들이밀어진 손안으로 푸른빛이 피어나더니 반절로 동강이 난 쥐의 사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이 사그라들었을 땐 혐오스러웠던 쥐는 이상한 회색의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경험상 전투 계열 헌터들만 만나 왔다 보니 이런 생산 쪽 헌터들의 스킬을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건 정말 마법이라는 말이 어울리도록 신비한 장면이었다. 순간 이상한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그럼 그, 네가 만들던 건 뭐로 만든 거였어?”
“영혼쇠약제요? 음… 동물의 뼈랑, 피, 그리고 이상한 보석이랑….”
“아니, 미안. 괜히 물어봤다.”
뼈와 피라니. 조금 괴리감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은 저 13살에 겨우 가족 때문에 울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괜히 민망해졌다.
“참, 그리고 이거 몬스터 같아요. 이 스킬은 몬스터에게만 반응하거든요.”
순간 주변이 침묵으로 내려앉았다. 시현은 혹시나 하고 예상했던 상항이 펼쳐지자 행동의 방향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몬스터가 있다면 헌터인 규민과 유준의 생존 확률이 오히려 올라갈 거다. 그 둘이 따지면 마냥 약한 능력자들도 아니었고 외부의 적이 생기면 보통 사람들끼린 뭉칠 테니까. 몬스터의 상태도 딱히 위협적이지 않았기에 오히려 처음보다는 마음이 놓일 정도였다.
시현은 신체 능력이 일천한 사마윤과 아직 쇠약의 저주가 작용하고 있는 미첼을 보며 결정을 내렸다.
“방향을 잡을 순 있겠지? 네 아지트 쪽.”
“아. 그럼요! 당연합니다! 저희가 향하던 길에서 아주 조금 옆에 있으니 번거롭지 않습니다.”
“그쪽으로 가지.”
계획이 변경됐다. 어차피 가는 길이었으니까 아주 조금 짬을 내서 아이템을 탈탈 털어 오는 게 길게 봤을 때 도움이 될 듯싶었다.
***
“하아, 하아….”
시현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쥐들의 사체를 발길질하며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고 있는 미첼을 바라봤다.
처음 나타났던 한 마리는 간이라도 본 것이라는 듯 껍질이 벗겨진 쥐들이 틈만 나면 달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처리가 힘든 건 아니었고 미첼도 그것들의 공격에 당해 헐떡이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것보다 저주로 떨어진 체력이 큰 문제였다.
“죄송, 죄송해요… 하아….”
쉴 틈 없이 움직이던 일행이었다. 아무런 말 없이 따라 잘 따라오길래 그래도 헌터는 헌터인가 싶었더니 아무래도 악으로 버틴 것 같았다. 시현은 곤란하단 듯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쉴까?”
“그럴까요?”
그 상황에 티는 못 냈지만 힘들어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사마윤은 재빠르게 동의를 표하며 슬그머니 하정의 근처로 다가가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은근히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 몇 개와 마크 몇 개를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아이템 덕에 지금까지 버텨 온 거였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라 가고 있었다. 지금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들은 정말 비상용이었기에 무한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마윤은 제게 남은 보호 마크들과 아이템의 상태를 가늠하며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꿀꺽 삼켰다.
“스승님도 잠시 쉬십시오. 제가 주변을 확인하겠습니다.”
시현은 천천히 자리를 잡고 앉는 일행들을 보며 주변을 탐색하려다가 태운이 제게 말을 걸어오자 쓰게 웃음을 지었다. 괜히 겪지 않아도 될 일들에 휘말리게 한 것 같아 미안했는데 또 나서서 궂은일을 하려고 하니 괜히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시현은 피가 조금 튀어 있는 태운의 상의 끝자락을 보다가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때,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듯 꼴 보기도 싫은 안내창이 다시 한번 눈 위로 떠 올랐다.
[제물을 바치세요!- 이 공간을 만족시키려면 생명력이 필요합니다. 근처의 인간들을 죽이고 생명력을 채우세요(2280/100000).]
[수급이 원활하지 못합니다. 경고가 시작됩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그사이에 또 누가 죽은 건지 생명력 수치가 꽤 올라가 있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보던 시현은 또 다른 안내가 이어지자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밥 먹듯이 게이트를 오갔던 하정도 비슷한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주변으로 수백 개의 기운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진짜 이거 미친 새끼네.”
절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시현은 엉덩이를 붙일 새도 없이 철근으로 만든 검을 뽑아 들었다. 일행들 또한 그사이에 제 위치에 맞는 자리를 찾아 섰다.
사사사삭.
쥐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려왔다.
“오른쪽!”
콰직!
마치 붉은색의 파도 같은 것이 옆에 있는 벽을 부수고 덮쳐들어 왔다. 시현은 그 역겨운 장면을 보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자세히 보니 물로 만들어진 파도가 아니라 다량의 쥐들이 뭉쳐 이뤄 내는 물결이었다.
“몰아치는 화염.”
그때 일행의 뒤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쥐 떼들의 중간에서 새빨간 불꽃이 피어오르며 일행이 있는 곳에 닿기도 전에 쥐들을 모조리 태우기 시작했다.
시현은 그 모습을 보며 머릿속으로 일행의 전력을 수정했다. 하정의 전투 방식은 사실 이곳에 들어와서 처음 본 것이었다. 시현은 생각보다 강력한 힘에 조금 놀라고, 예전에 하던 게임과 매우 비슷한 스킬이라 생각하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촤아아악-
그러나 감상에 빠진 것도 잠시, 시현은 검을 몇 번 휘둘러 왼쪽에서 다시 한번 쏟아지는 쥐들을 거침없이 두 동강 냈다. 하정과는 달리 피가 튀고 몸뚱이들이 쌓여 처참한 장면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지만,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시뻘건 조각들과 액체, 빛이 사방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튀는 불씨와 조각난 몸뚱이가 튀며 천장에 겨우 달려만 있던 마석 전구를 깼다. 하지만 하정이 계속해서 쏘아 대는 불에 어두워질 겨를도 없었다.
“태운아, 뒤!”
이미 양 벽이 박살 나고 골목이 작은 공터처럼 변했다. 그러니까 사방에서 튀어들어 올 공간도 많아졌다는 뜻이었다. 태운도 이미 감지했겠지만, 시현은 습관적으로 방향을 외치며 다시 한번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태운은 시현의 말을 들으며 무심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한 손을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그었다.
푸확.
순간 수십 마리의 쥐들이 천장에서 쏟아졌다. 그러나 그 무리는 마치 무언가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리고는 깩깩대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뭉개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 쥐들이 몬스터들이라고 해도 꽤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우웩.”
아니나 다를까. 세 면을 막고 있던 하정과 시현, 태운의 가운데에 미첼과 함께 움츠리고 있던 사마윤이 참지 못하고 신물을 바닥에 쏟아 냈다.
그때였다.
그림자 안으로 이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시현은 계속해서 밀려드는 쥐들을 슥슥 썰어 대다가 제 옆으로 생긴 새까만 그림자 위로 검을 강하게 쑤셔 박았다.
“키에에에에엑!”
“이런 씨, 다들 그림자 강하게 진 거 조심해!”
어쩐지 고작 이런 쥐 떼뿐일 리가.
시현은 어금니를 세게 즈려 물고는 제 그림자 위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다시 한번 난도질하고 성안을 펼쳤다.
[아귀(-) 그림자를 타고 다니며 먹을 것을 끊임없이 탐한다.]
그것은 대충은 인간의 형체를 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겉모습이 말라붙은 나무껍질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고 기괴해 보일 정도로 몸뚱이보다 기다란 팔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시체 쥐와 아귀라. 꽤 이름과 잘 어울리는 생김새네.’
아무래도 생명력이 필요하다는 이 공간의 속성이 대충 감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정의 능력이 양날의 검이 될 것 같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