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독으로 가득 찬 길은 꽤 길게 이어졌다. 처음엔 만만히 봤지만, 시현이 독공을 연마한 건 아니다 보니 독에 의한 피해가 조금씩 중첩되어 가고 있었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그에 비해 태운은 여전히 멀쩡해 보였다. 이런 데서도 저 아이와의 실력 차이가 크게 와 닿아 조금 씁쓸해졌다.
‘그러니까 그때도 못 밀어 냈,’
순간 시현은 걷다가 말고 제 뺨을 조금 세게 후려쳤다.
“스승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제멋대로 튀어 대는 머릿속이 정말 원망스러웠다. 시현은 이 와중에도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예쁜 붉은 눈에 애써 시선을 피하며 더욱 빠르게 발을 옮겼다.
‘연합 놈들 만나기만 해 봐.’
시현은 일에 집중하자 저 자신을 타이르며 곧 만나게 될 연합 놈들에게 이 화를 다 풀어내리라 주먹을 꾹 쥐었다.
길은 그 이후로도 한참을 이어졌다. 다행히 갈림길이 없어 헷갈리진 않았지만, 점점 더러워지고 난잡해져 가자 조금 의문이 들었다.
약을 만들거나 유통을 하는 곳이면 좀 깨끗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다못해 약을 뽑아내지 않더라도 본인들이 지내는 곳이라면 어느 정도 관리는 할 법도 한데.
시현은 저 앞에 널브러져 있는 더러운 인형을 잠시 들어 올려 확인하고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박스, 선반, 유리. 도통 관련성을 알 수 없는 것들의 나열이었다.
“스승님. 저 앞에 문이 보입니다.”
그때 태운이 물건들을 눈여겨보고 있던 시현을 불러세웠다.
“드디어 다 왔나 본데.”
생각보다 하정과 멀어졌기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시현은 주변에 버려진 쇠막대를 대충 뽑아 들고는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한 사람?’
무언가 장치가 되어 있을까 조심스럽게 다가간 시현은 작은 철문 안으로 느껴지는 단 한 명의 기척에 잠시 멈칫했다. 대체 이 단체가 어쩌자고 이러는 건지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단 한 명이라면 보통 강한 적이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안에 있는 자의 기척은 미미했다. 한마디로 딱히 강하지 않았단 뜻이었다.
시현은 태운과 한번 시선을 마주치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쾅!
쿠당탕탕. 찰캉!! 챙!
방금 난 소리는 시현이 문을 발로 차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잔뜩 힘을 준 게 무색하게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인 광경에 무척 당황했다.
방금 쏟은 듯한 액체가 들어 있던 냄비, 뒤로 넘어간 의자와 흐트러진 테이블, 그리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는지 작게 눈물이 맺혀 있는 여자아이가 눈 안 가득 들어왔다.
그 외에도 장난감이라든가 책 등이 주변을 채우고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건… 대체 뭐냐?”
어이가 없었다. 그중 제일 어이가 없는 것은 여자아이의 목과 양 사지에 걸린 사슬이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놀란 것도 잠시, 무감한 얼굴로 시현이 들고 있던 쇠막대를 보다가 묵묵하게 쏟아진 액체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진짜?’
시현은 벙찐 채 저와 태운을 본체만체하며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이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무리 둘러봐도 인기척은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이 애뿐이라는 건데 누가 봐도 흑막이 있을 것 같은 공간이 이 모양이자 약간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냥 있을 순 없던 시현은 최대한 나긋하게 말을 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어… 저 혹시 그 나쁜 아저씨들 본 적…,”
순간 제 행색과 손에 들린 쇠막대가 시선에 걸렸다. 이미 늦긴 했지만, 시현은 슬금슬금 막대를 등 뒤로 숨기고 다시 말을 이었다.
“없니?”
그러나 아이는 자기를 한번 힐끔 보더니 제 입과 귀를 검지로 콕콕 찔렀다. 시현은 순간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아무래도 말을 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때 당황스러운 상황에 잠시 날아갔던 존재감이 다시금 느껴졌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태운의 눈치를 봤다. 상냥하게 건넨 말투와는 다르게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일단 누가 봐도 저 여자애는 잡혀서 사지를 결박당하고 입까지 막힌 채 일을 강요당하고 있어 보였지만 이제는 선뜻 발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그것을 눈치챘는지 태운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남이 구하고 싶어 죽겠으면, 저한테 입 맞춰 주고 가세요.”
“뭐???”
“왜요?”
아니, 얘기가 갑자기 왜 거기로 튀어!!
시현은 전혀 장난 같지 않은 태운의 태도에 딱딱하게 굳었다.
‘분명 그때 해결된 게 아니었나? 분명 태운이도….’
그러나 잘 생각해 보니 태운이는 제 말에 알겠다고 했지, 착각했다든가 다신 안 그러겠다든가 대화를 마무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태운아…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지 않을까…? 이미 뒤진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런 건 그래도…. 아니! 자꾸 눈앞에 이런 게 나타나는 걸 어쩌겠어. 응?”
시현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태운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어렸을 땐 잘만 해 주셨으면서.”
“그건, 네가 어렸잖아.”
“지금도 제가 어리다면서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건 맞긴 했는데 그거랑 이거는 조금 다르지 않나. 그러나 조리 있게 설명하기엔 시현은 꽤 많이 당황한 상태였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꺼려지시는 건지요. 예전엔 제 아래도 껍질이 벗겨지도록 만져 대시 더,”
“으아아아아악!! 아악!! 야! 알았어! 그만!”
이 미친. 그건 씻겨 주느라 그런 거였잖아!! 그때 넌 11살이었고! 이게 언제 이렇게 발랑 까져서!!
딱히 다른 의도를 가지고 말한 게 아니라는 듯 태운은 순하게 미소 지으며 얌전히 서 있었지만, 시현은 이제 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얼굴을 무턱대고 믿지 못했다.
뒤에서 제가 하는 짓을 보고 있는 아이의 귀가 안 들린다고 했던 것도 잊고 휙 눈치를 봐 가면서 태운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 울고 싶어졌다.
“빨리요.”
제 손에 막혀 태운의 말이 잔뜩 뭉개졌지만 그 뜻은 정확히 시현의 귀로 틀어박혔다. 순간 그냥 갈까 하는 생각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아,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해. 됐지.”
그러나 이거 때문에 그냥 지나치는 것도 웃겼다. 오히려 제가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은가. 그래, 태운의 말대로 어렸을 땐 자주 해 줬던 것이었으니 크게 민망해할 일도 아니었다.
‘지금도 저렇게 애처럼 떼쓰고 있는 게 그때랑 뭐가 다르다고.’
시현은 속으로 계속 거친 말을 되뇌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너 움직이지 마.”
“알겠어요.”
태운의 대답은 아주 빠르게 흘러나왔다. 시현은 눈을 꾹 감았다 뜨고는 기다렸다는 듯 연해 보이는 얇은 눈꺼풀을 살포시 내려트리고 얼굴을 살짝 내려 기다리고 있는 허연 얼굴을 바라봤다.
순간 내려가 있던 태운의 시선이 올라왔다. 시선이 마주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마치 늘어진 것처럼 천천히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시현은 태운의 눈 위로 텁 소리가 나도록 손을 세게 올려놓고 하얀 뺨 위에 박치기하듯 입술을 찍었다가 떨어졌다.
“됐지!”
“…입술에다.”
시현은 이어지는 태운의 말을 싹 무시하고는 덜걱대며 여자아이가 있는 곳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절대 도망치는 건 아니었다. 빨리 일을 해결하고 걱정하고 있을 유준과 규민이 있을 숙소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이러고 뭉개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 미안한데 잠깐 내가 네 상태를 확인해도 될까?”
이것도 그 일환이었다. 시현은 그새 물건을 정리하고 다시 냄비에 담긴 무언가를 만들어 대는 아이에게 친절해 보이도록 말을 걸었다.
끄덕.
시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에게 먼저 성안을 발동했다.
테너 미첼 [연금술의 마지막 후계(A)]
칭호 [미다스의 손]
체력-10(45)
근력-10(32)
민첩-10(56)
지력-102
마력-98
운-28
상태 이상- 쇠약의 저주, 감각 봉인(입, 귀)
눈앞에 떠오른 옅은 붉은빛의 창을 본 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 이런….’
아이의 상태는 심각했다. 상태창 제일 위에 적혀 있는 연금술이라는 단어에 대략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연금술로 무언가를 만들고 그걸 위해 이 어린애에게 저주를 걸어 묶어 두고 있었다는 걸. 사실 그 연금술로 만들고 있다는 게 뭔지도 대충 알 것 같았다. 시현은 이제 액체에서 가루가 되어 가고 있는 보랏빛의 무언가를 보며 다시 성안을 발동시켰다.
[괴로움과 음울함을 담은 영혼 쇠약제(A) - 섭취하는 자의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중독성이 강하니 주의할 것 (제작자:테너 미첼)]
저절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시현은 멍하니 저를 보고 있는 아이를 마주 내려 보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이의 눈 안 가득 무력함이 담겨 있었다.
“미안, 입과 귀를 막고 있는 걸 없앨 거야. 조금 아플 테지만 잠시만 참아 봐.”
끄덕.
고개가 끄덕여지자마자 내기가 넘실거리는 손이 아이의 등 뒤에 닿았다.
“태운아, 와서 이 애 좀 잡아 봐.”
입과 귀는 마력 같은 게 꽉 틀어막고 있어서 그것만 없애면 어찌 해결이 가능할 것 같았지만 저놈의 쇠약의 저주라는 것은 온몸 가득 안개같이 퍼져 영향을 주고 있기에 당장 없애기는 조금 어려웠다.
그러니 지금 저 마력을 없애면서 생긴 고통을 이 어린애가 버티기는 힘들 거다.
시현은 태운을 불러 아이가 발버둥 치지 못하도록 붙잡게 했다. 다행히도 태운은 말없이 고분고분 움직였지만 그럼에도 얼굴엔 옅은 불만이 느껴져서 한마디 해 주고 싶어졌다. 물론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사라졌지만 말이다.
“이거는 별로 안 힘든 거다. 알지?”
“알지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태운을 다시 한번 어르고 시현은 내기를 움직였다. 그리고 그 내기는 목과 귀에 나뉘어 들어가 꽉 막고 있던 뭉치를 내려찍기 시작했다.
그러자 멍하니 눈을 굴리고 있던 아이가 순간 덜컥 몸을 멈추더니 점점 강하게 떨었다.
아이는 꽤 고통스러웠던 건지 작은 손으로 제 목을 움켜쥐려고 했지만 그건 태운의 손에 붙잡혀 막혔다. 시현도 어린애가 저렇게 괴로워하는 걸 보기 조금 어려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현은 작은 몸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내기를 최대한 약하게 조절했다.
펑!
그 순간 미첼은 제 귀 안쪽에서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듯 몇 년간 들리지 않았던 진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기 괜찮니?”
아까 제 공간을 침범해 온 남자의 목소리였다. 미첼은 아직도 남아 있는 고통에 작게 헐떡대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빨리 도망가요.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저를 구해 주겠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곳에 있게 하면 안 됐다. 꽤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해 갈라지는 목소리에도 미첼은 열심히 경고를 뱉어 냈다.
“뭐? 그게 갑자기 무슨 말,”
그 순간 갑작스럽게 주변을 채우고 있던 공기가 중력이 바뀐 듯 무겁게 몸을 짓눌렀다. 그리고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