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순식간에 접견실이 정리되고 차가 준비되어 앞에 소담하게 배치되었다. 시현은 그 음료를 한번 보고는 손도 대지 않고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일단 하나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뭐지?”
“빌런 연합은 전 세계 각지에 점조직으로 흩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제 능력은 어찌 됐든 제가 그 근처로 가야만 하죠. 그래서 그들의 본거지의 범위를 줄일지언정 의미가 있을 정도로 추려 내진 못했습니다.”
저스틴, 그러니까 사마윤은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부터 밑밥을 잔잔하게 뿌리기 시작했다. 시현도 그걸 알았지만, 그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며 곧 이어질 결론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딱 한 군데 제가 한눈에 파악하고 있는 지역이 있죠.”
“그게 어디지?”
“바로 여깁니다. 라스베이거스.”
시현은 옆에 있는 태블릿을 들어 올리며 무언가를 쿡쿡 누르는 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곳이 본거지였군.’
그 대단하다던 량조차도 제멋대로 약속을 미루는 이자의 일정에 맞춰 주지 않았나. 그렇다면은 최소 이 지역에선 이자가 한 수 위라는 뜻일 테다. 그건 이곳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선 전 세계의 돈이 활발하게 세탁되고 있습니다. 물론 연합의 돈도 말이죠.”
“카지노인가?”
“물론 그것도 있습니다만 아닙니다. 주로 약이죠. 일명 갈라테오스. 뭐 이름은 있어 보이지만 마약입니다. 그리고 아주, 아주 저렴하고 위험하죠.”
시현은 사마윤이 태블릿으로 띄워서 보여 준 알약의 낯익은 모습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것은 엊그제 길에서 만난 ‘가이드’가 꺼내 들고 보여 줬던 것과 형태가 거의 비슷했다.
‘아니, 그런 말단 유인책들도 몇 개씩 주머니에 넣어 놓고 팔고 있다니. 대체 얼마나 퍼져 있는 거야?’
범죄든 돈이든 뭐든 다 사람이 있어야 돌고 도는 거였다. 그런데 약 먹고 우르르 나가 죽는다? 처음이면 몰라도 결국엔 다 같이 죽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걸 그들도 모르지 않을 텐데 왜 저런 약으로 뒤도 보지 않고 자잘하게 돈을 모으는지 얼핏 이해되질 않았다.
“개벽 이전에도, 지금도 돈을 가장 잘 쓸어 모으고 세계 각지로 유통할 수 있는 빠르고 쉬운 방법은 약이었습니다. 게다가 갈라테오스는 만들기 쉬운 건지 공급이 끊이지도 않고 중독성도 아주 강력하죠.”
사마윤은 그 사실들은 읊으며 조금 얼굴을 굳혔다. 자신은 딱히 마약이든 범죄든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던 사람이었다. 어차피 어느 세상을 가든 다 똑같았고 저도 범죄에 발 들이고 있는 주제에 누굴 나무란단 말인가.
그러나 제게 피해가 와서 수익이 줄어든다? 그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저 약은 보통의 마약과는 달리 부작용이 크게 없는 대신에 생명력을 급하게 소모하게 했다. 인구가 줄면 중독성이 덜한 것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제 사업들은 꽤나 그것들에 타격을 받을 만한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이 약으로 생긴 돈이 연합으로 들어가고 그에 관련된 게 이곳에 있다… 이 말인가?”
“네, 맞습니다. 그리고 꽤 정확하게 위치도 추려 놨죠.”
시현은 빙긋 웃는 사마윤의 얼굴을 마주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거야 원. 제 라이벌 범죄자들을 처리해 달란 말이 아닌가. 우연찮게 목표가 겹치긴 했지만 이 와중에도 제 이익을 챙기려 머리를 굴리는 게 눈에 보여 웃음이 나왔다.
물론 어차피 해야 할 일이기에 따로 딴지를 걸진 않았지만 한마디는 해 주어야 했다. 마교 놈들은 늘 그랬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주지. 그리고 잘 기억해 둬라. 네 유도에 따르는 게 아니라 내 필요에 의해 움직인 거라는 걸. 다음엔 차라리 대놓고 부탁을 하는 게 네 목숨 부지에 용이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사마윤은 몸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다시 바닥에 이마를 냅다 박아 대며 잘못을 빌어 왔다.
“스승님을 기만한 저자를 죽이고 싶습니다.”
그때 태운이 순한 얼굴을 하며 제게 허락을 구해 왔다. 시현은 이제 눈물을 흘리려고 하는 사마윤을 흘깃 보고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건, 일단 보류해 두자. 생각해 볼게.”
“스승님께서 그러시다면….”
하여튼 이런 데에만큼은 연기에 장단을 잘 맞추는 태운이었다. 시현은 그동안 칼같이 피해 왔던 것을 잊고 습관적으로 저를 올곧게 바라보는 태운의 머리통을 슬슬 쓰다듬었다.
물론 태운의 말은 진심이었지만 시현은 알지 못했다.
***
한 시간 뒤.
시현과 일행은 이 라스베이거스의 지하를 지탱하고 있는 하수도의 입구 중 하나의 앞에 서 있었다.
회색빛 콘크리트에 빼곡하게 도배되어 있는 그래피티와 이곳저곳 쌓여 굴러다니는 쓰레기들.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하늘 아래에 있다고 보기엔 꽤나 을씨년스러운 광경이었다.
“이곳입니다. 약들이 이곳에서 나온다는 정보가 들어왔습죠. 뭐가 됐든 이곳에 거점이 있을 겁니다.”
사마윤은 이마에 시퍼런 멍을 단 채로 조금 구부정하게 서 있어 나름 준수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무척 비굴해 보였다. 시현은 그런 모습을 무심하게 보다가 제 뒤에 있는 태운과 하정을 돌아보았다.
“하정이 너 갈 거야?”
“왜, 안 갔으면 좋겠어?”
“아니, 솔직히 여기까진 네가 신경 안 써도 되잖아.”
조금 정 없어 보였지만 맞는 말이었다. 같은 길드원도, 목표가 비슷한 것도 아니었다. 하정은 단지 흑접과의 만남을 도와주기 위해 온 것이었고 지금으로선 하정의 모든 일이 끝난 시점이었다.
“말 진짜 서운하게 하네?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데 그럼 친구를 두고 그냥 가냐?”
“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귀찮을까 봐 그런 거지.”
그러나 돌아온 하정의 반응은 시현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시현은 순간 제가 또 상처를 주는 말을 한 건가 멈칫하며 손을 내저었다.
“저…. 혹시 저도 갑니까?”
그때 눈치를 보고 있던 사마윤이 이때다 싶어 대화를 가르고 끼어들어 왔다. 그의 얼굴은 실실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가기 싫다는 기분을 팍팍 티 내고 있었다. 시현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가지.”
“예에….”
결국 아무도 이탈하지 않고 5명의 일행이 모두 빌런 연합의 중요 근거지일지도 모르는 곳으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우울한 기운이 깔린 곳이었다. 조금 걸어 들어가자마자 딱 봐도 약에 중독되어 몸을 망쳐 버린 노숙자들이 잔뜩 경계심 어린 눈으로 시현과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름한 행색과 퀭한 눈, 드러나 있는 팔다리로 보이는 온갖 상처와 흉터들이 누가 봐도 중독자의 행색이었지만, 그들 가운데에는 멀쩡해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갈라테오스의 중독자들은 꽤 피곤해 보인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겉모습만은 그래도 멀쩡합니다.’
그자들을 보자 들어오면서 들었던 설명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른 중독자들에 비해 꽤 공격적이죠.’
괜히 이 주변을 잠식하고 있는 우울감과 죽음의 냄새가 제게도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이게도 과거의 기억들을 자꾸만 생각나게 했다. 시현은 작게 혀를 차고는 빠르게 발을 옮겼다.
“아,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합니다.”
십여 분 정도 걸었을까. 눈앞에 처음으로 갈림길이 나왔다. 거대한 하수도였기에 길이라고 명명하는 게 맞나 싶었지만, 시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걷는 사마윤의 뒤를 따랐다.
안 그래도 조금 전부터 아주아주 미세하게 자연스럽지 않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내기로 만든 진일 수도, 또 다른 마법의 영향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 앞에 무언가가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저 사람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때 하정이 의심 어린 눈초리로 열심히 태블릿을 보며 걷고 있는 사마윤을 노려봤다.
“거, 거짓말이라니요! 제가 어찌!”
사마윤은 그 얘길 듣자마자 아주 큰 모욕이라는 듯 찰나간 시현과 태운의 눈치를 보고 벌컥 화를 냈다. 아주 아주 억울해 죽겠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거짓말 아니야. 느껴져.”
“엥? 뭐가 있어?”
시현은 웅웅 울리는 목소리에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얼마 정도 걸어가면 하정도 느낄 테다. 시현은 조금 시끄러워진 분위기를 단번에 내리누르고 무리의 가장 앞으로 발을 옮겼다.
지금 시현은 사마윤의 거짓이 아니라, 분명 이런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는데도 지키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는 노숙자들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꽤 근거지에 다다라 가고 있을 거란 말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다니는 인간들을 그냥 놔둔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그것은 몇 번의 갈림길을 통과하고 나서야 해결됐다.
‘독이군.’
어느 일정 부분을 지나치자 아주 옅게 독 기운이 느껴졌다. 아주 치명적인 무색무취의 독이었다. 사용을 해 놓은 방식이나 독의 성분이 익숙하진 않았지만, 시현은 목구멍 안에서 느껴지는 씁쓸함과 손끝에 와 닿는 저릿한 감각 탓에 뒤에서 따르던 일행을 멈춰 세웠다.
“멈춰 봐. 앞에 독 있다.”
“뭐?”
한 발짝 앞. 하정과 사마윤은 바로 죽을 게 분명했다.
한마디로 거의 어떤 인물도 이 앞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A급에다가 독에 대한 면역이 강한 특정 직업이었다면 모를까 다른 이들은 아주 치명적으로 위험했다. 그제야 왜 지키는 인물이 없었는지 이해가 됐다. 앞에 깔린 독성은 잘못하면 지키던 놈들도 단번에 죽을 수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여기서 갈라져야겠다. 이 앞은 나랑 태운이밖에 못 넘어갈 것 같아. 하정이 너는 사마윤 붙잡고 감시해 줘.”
시현은 결론을 내렸다. 갈 수 있는 사람만 가고 아닌 사람은 여기서 기다린다. 아주 간단했다.
“예에?? 아니, 아직도 제게 신뢰가 없으신!”
“오케이, 알겠어.”
하정은 시현의 말에 확 불꽃을 피워 올리더니 사마윤의 손목을 낚아채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저기요. 여기서 움직이면 이 불꽃이 당신 온갖 구멍으로 파고들어 가 내장을 태울 겁니다. 그러니까 조심해요.”
“예에?? 아니! 시현 님!!”
사마윤은 하정의 살벌한 말에 잔뜩 울상을 짓고는 시현을 간절하게 바라봤다. 물론 시현은 가차 없이 고개를 돌려 앞을 뚫고 갈 생각뿐이었지만 말이다.
“스승님.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때 태운이 시현의 손을 슬쩍 잡고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시현은 다시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서며 잡힌 손을 빼내고 어색하게 툴툴댔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조금 아프기야 하겠지만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시현은 태운이 그걸 알고 있을 게 분명한데도 은근히 또 붙어 오자 집중력이 흐려져 몇 번 손바닥을 손톱으로 쿡 찔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