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제가 잘못했습니다….”
시현은 단호하게 호통을 치며 넘어가려 하다가 태운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제 소매 끝을 슬쩍 잡아 오자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나오는데 애초에 제가 이 애한테 진심으로 화를 낼 수 있나. 그건 불가능했다.
“태운아.”
“예.”
“좋아. 네 마음이 그렇다는 건 인정할게. 그렇지만 태운아, 나는 아니야.”
밤새 생각해 왔던 대답이 시현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래, 여기서 잘 잘라 내야 했다. 비록 이 관계에 작은 균열이 생겼지만 금세 아물 것이다.
“진심으로요?”
멈칫. 시현은 다시 한번 되묻는 태운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눈을 꾹 감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응”
“알겠습니다.”
응?
시현은 순간 잔뜩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단번에 납득했다는 듯 물러서는 태운에 멍하니 돌아서는 넓은 등짝을 바라봐야 했다. 분명 제가 원하던 대로 되고 있었는데 기분이 무척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시현은 못 박힌 듯 멍하니 서 있다가 제 이성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머리통을 세게 쥐어박았다. 무척이나 아팠지만 몇 번이나 머리를 때려 가며 제정신을 차리라고 계속해서 되뇌어야만 했다.
‘이게 뭐지? 이럴 거면서 키, 키스는 왜 해?! 이러고 끝이야? 아니, 애가 왜 이렇게 발랑 까졌지? 원래 안 이랬는데? 뭐 여기 와서 영상 같은 거라도 잘못 봤나?’
그럼에도 시현의 사고는 아주 거침없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서, 설마… 경험이 있, 긴 뭘 있냐!! 아악! 더 생각하지 마! 충동적인 실수겠지!!’
태운은 천천히 계단을 밝고 올라가며 시현의 오두방정을 슬쩍 훔쳐보고는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와 입 끝을 끌어 올리고 큭큭 웃었다. 자꾸 튀어나오려는 소리를 시현이 들을까 싶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참 한결같으십니다.’
처음에는 진짜 어지럽도록 화가 나던 건 맞았다. 그러나 그 감정도 입술이 닿는 순간 이미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시현의 입술은 그동안 제가 막연하게 상상해 왔던 것보다 부드러웠고 따듯했다.
게다가 그동안 두려움에 떨던 게 무색할 정도로 의외였던 반응도.
“하아….”
입가로 낮은 숨이 흘러나왔다. 이런 모습을 이제서야 알게 되다니 무척이나 억울하게 느껴졌다. 태운은 눈을 휘어 가며 실실 미소 짓고는 시현이 그리 좋아하던 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다음에는 뭘 어떻게 할까….”
벌써 다음이 기다려졌다. 당연히 이제는 마냥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착한 아이인 척하면 그대로 착한 아이로 남을 뿐이라는 걸 이제는 너무 잘 알았으니까.
태운아, 착하게 살아야 해.
순간 제 안에 깊이 틀어박혀 있던, 시현이 몇 번이나 당부했던 말들이 희미해졌다. 태운은 제가 한 말에 흔들리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다가 도망치던 시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어우 씨, 깜짝이야. 이 좀비는 뭐냐 이거.”
하정은 정오가 넘어서야 느릿하게 침대를 벗어나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채 다 내려오기도 전에 소파에 나동그라져 있는 형체에 멈칫해야 했다.
눈 아래를 짙게 차지하고 있는 다크서클과 핏발 선 눈까지. 시현은 그 뒤로도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거실에서 널브러져 있던 것이었다.
도통 잡생각이 제 머릿속을 부여잡고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골 울려…. 소리치지 마….”
“와 씨, 이거 살아 있냐?”
“그럼 죽은 거겠냐. 안타깝게도 살아 있다.”
시현은 경악하고 있는 하정의 반응에 대충 대답해 주면서 눈알을 굴려 태운이 내려오나 안 내려오나 눈치를 봤다. 다행히 아침 이후로는 잘 피해 다녀 얼굴을 마주하진 않았지만, 자꾸만 태운의 기척에 신경이 쓰여 두통이 올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야, 정신 차려 지금 일정 바뀌었어.”
“뭐? 무슨 일정?”
“흑접 만나기로 했던 거 있잖아.”
순간 널브러져 있던 시현이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 세우고 하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량한테 연락이 와 있었어. 그쪽에서 내일 급한 일정이 생겼다고 미팅을 오늘로 바꿀 수 있겠냐던데.”
시현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오늘 별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바뀐 상황에 알아볼 정보들이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쩌겠냐. 우리가 을인데.”
“그건 맞지. 사실 이미 시간도 정해졌어. 걍 형식적으로 남긴 말이라는 거겠지.”
“열받네.
게다가 아무리 제가 타인의 도움을 받아 의뢰하려 하는 거더라도 이딴 식으로 깔아 보는 대우라니. 시현은 만나기도 전에 편견을 가지지 말자는 생각을 물리고 흑접의 주인이라는 자의 점수를 왕창 깎았다.
“어쨌든 그거 때문에 우리만 가야 하게 생겼어. 이제 두 시간 남았으니까 빨리 준비해.”
달갑지 않은 얼굴을 하던 시현은 급히 머릿속으로 정보들을 취합하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이 라스베이거스에 온 가장 중요한 목표를 해결해야 할 시간이었다.
***
현재 일행은 그쪽에서 보내 준 차를 타고 정해진 장소로 이동 중이었다. 차량은 무척 쾌적하고 좋은 향기까지 나서 편안했지만, 하정은 지금 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미간을 구겨트리고 있었다.
진짜 얘네 뭐 하는 거지?
맘 같아서는 사이좋게 파이어볼 하나씩 먹여 주고 싶었지만, 시현의 실력이 생각보다 좋다는 걸 안 뒤로는 아쉽게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차라리 위험하다고 숙소에 두고 온 유준이나 규민까지 있으면 덜 그랬을까 싶었지만, 곧 어차피 그들이 있어도 별 소용이 없었겠다 생각하며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시현은 모르겠지만 일단 저 남자는 누군가의 눈치를 볼 사람이 아니었다.
“태운아. 좀 떨어져라.”
“싫어요.”
“하아….”
시현과 태운은 한 시간 전부터 저러고 있었다. 차를 타기 전에는 저를 가운데 둔 채 은근히 피하고 쫓고 뱅뱅 돌았고 차를 타고 난 뒤에는 저를 앞에다 두고 저러고 있으니 안 빡칠 리가 없었다.
‘이거 무슨 일 있었네…. 이것들.’
흑접의 주인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다 와 가는데도 그 신경전은 이어지고 있었다. 시현이 평소엔 좀 얼빠져 보이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일에 관해서는 칼 같은 놈이었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는 하정이었다.
그렇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는데 하필 그때 태운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하정은 그들을 구경하던 걸 그만두고 슬그머니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즐겁다는 듯 눈을 휘며 웃고 있던 사람이 입꼬리를 천천히 내리면서 삭 표정을 지우자 뭔가 기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좀 꺼림칙한 사람이었다.
‘그래, 정시현 넌 저 이상한 놈 끝까지 책임지고 둘둘 매고 살아라. 불길하다 진짜.’
밖에다 풀어놓으면 뭔가 아주 큰 사고를 칠 것 같은 느낌이 있지 않나. 그에게선 그런 기운이 문득문득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조금 실례인가 싶어서 머릿속에서 시현과 태운을 몰아내고 슬슬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카지노를 바라봤다.
‘더럽게 화려하네 진짜.’
출발했던 호텔만큼 호화스러운 외관이었다. 외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온갖 장식들이 어찌 보면 천박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하정은 주차장처럼 보임에도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며 천천히 속도를 줄이는 차량에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주선을 해 주겠다는 량이 갑자기 바뀐 만남 때문에 동행하지 못해 조금은 긴장됐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그저 주선을 해 줄 뿐이고 딱히 대단히 무언가를 책임져야 할 처지도 아니었으니까.
“야.”
그러니까 저 빌어먹을 놈이 제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정은 심드렁하게 입을 뗐다.
그러나 때마침 티격태격하던 시현과 태운이 순간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하정의 부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쉿. 누군가 온다. 헌터야.}
시현은 잠시 멈칫했다가 아까와 별다를 것 없이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하며 하정에게 전음을 날렸다. 다가오는 이가 생각보다 강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 무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똑똑.
“누구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당신들을 초대한 분을 대신해 나왔습니다. 제 뒤를 따라오시지요.”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있던 남자가 다가와 차창을 가볍게 두드리고 문을 열어 인사를 건넸다. 시현은 속으로 언제나 움직일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춰 놓고 마주 고개를 숙여 목례했다.
일단은 전투를 하러 온 건 아니니까.
그렇게 안내된 넓은 방은 호화스럽긴 했지만 지하였다. 무슨 일이 있을 때 퇴각하기가 녹록지 않다는 뜻이었다. 시현은 저들만 두고 나가 버린 남자의 행방을 예상하다가 습관처럼 주변을 둘러보며 방의 구조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방에 들어온 지 벌써 20분이나 지났어. 언제 오는 거야?”
그러나 그것도 없이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는 게 고역이었는지 하정은 뻐근한 몸을 연신 돌려 대며 불만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시간도 먼저 정해 놓고 그에 맞춰 차까지 보낸 사람이었다. 그래 놓고 얼굴은 이렇게 늦게 비춘다고? 누가 봐도 이 거래에서 제가 우위를 가져가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뻔하지. 이런 정보 취급하는 놈들 하는 짓이야.”
시현은 계속해서 달라붙어 오는 껌딱지 같은 태운을 다시 한번 가차 없이 밀어 내고 심드렁하게 답했다.
“어째 잘 아는 듯이 말한다?”
“엉? 아…. 인터넷에서 봤어. 심리 뭐 이런 거.”
“그래?”
인터넷이 아니라 사실은 피부로 느끼며 체득한 것이었지만 시현은 끝까지 모른 척하며 말을 돌렸다. 어차피 곧 그자들이 들어올 것이었다. 이것보다 초대한 이를 더 방치하게 되면 보통은 거래가 파투 될 확률이 아주 커졌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대화가 지나가고 대략 5분여가 지나자 멀리에서 여러 사람의 기척이 우르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희를 이쪽에 데려다준 남자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무인부터 마법사까지. 이 머리에서 파장이 나오는 남자는 초능력 같은 걸 쓰는 건가.’
대략 15명은 되어 보이는 꽤 강한 무리였다. 규민과 유준을 숙소에 두고 온 건 무척 잘한 선택인 것 같았다. 시현은 상황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렀을 때 어떻게 제압할까, 자연스럽게 저들과의 전투를 시뮬레이션하며 대비책을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잘게 털어 냈다.
‘전투하러 온 거 아니다, 정시현. 그냥 거래만 하고 갈 거야.’
그때 달칵하고 문고리가 돌아갔다. 그리고는 어찌나 관리가 잘된 건지 조금의 소음도 없이 두꺼운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늦어서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누가 봐도 꽤 값이 나가겠구나 하는 화려한 정장을 차려입은 자가 무리의 정점에 서서 호탕하게 인사말을 건네 왔다. 시현은 반듯하게 머리를 만져 올린 중년 남자의 손을 마주 잡고는 짧게 목례했다.
이자가 주인이 아니군.
무척이나 흔해 빠진 수법이었다. 저를 대신해 부하를 마치 주인인 것처럼 앞으로 내세우는 것 말이다. 꽤나 정보를 다루는 단체다운 짓을 하지 않나. 시현은 제가 주인인 것처럼 연기를 하는 남자의 뒤에 서 있는 보좌관을 지나가듯 바라봤다가 튀어나오려던 실소를 삼켰다.
“혈천마검…?”
그러나 그때, 시현은 이곳에선 들려와선 안 되는 낯익은 별호에 순간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러나 그것도 찰나였다.
슈아악-
순간적으로 시현의 내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내부에 있던 장식품들이 공중으로 떠올라 눈 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쏘아져 날아갔다.
툭, 털썩. 털썩.
“히익!”
붉은 내기에 감싸여져 있는 물건들이 제대로 맞으면 단번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사혈, 고통과 마비 등의 효과를 줄 수 있는 요혈들에 정확히 겨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보좌관인 척하는 남자 말고는 죄다 점혈을 맞고 우르르 바닥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현이 손을 쓸 것을 감지한 태운의 소행이었다.
넓은 공간에 제 일행 세 명과 경호원까지. 그 많은 인물이 들어차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무거운 침묵이 내부를 가득 채웠다.
“넌 뭐지? 어떻게 내 별호를 알고 있지?”
“야! 시현아!”
하정이 시현의 갑작스러운 살수에 놀라 벌떡 일어섰지만 붉은 기운이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시현의 눈은 아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