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아듣기 쉽게 다시 말씀을 올릴까요?”
태운은 텅 빈 거리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손을 휙 들어 올려 거칠게 기막을 펼치고 빠르게 입을 열었다. 늘 미지근하게 녹아 있던 붉은 눈동자에 순간 불꽃이라도 튀는 것 같았다. 시현은 저게 뭔지 알았다.
“아니, 그만.”
순간 공기의 흐름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흐름 사이로 차가운 결정이 내려앉았다. 누군가 조금만 움직여도 찌를 것 같은 날카로움이었다.
“너 그거 착각이야.”
시현은 손을 들어 올려 태운의 말을 자르고 그동안 미루고 미뤄 왔던 말을 드디어 꺼내기 시작했다. 왠지 명치가 지끈거리고 목이 부은 듯 욱신거렸지만 할 말은 해야만 했다.
“태운아, 잘 생각해 봐. 부모나 단짝 친구한테 느끼는 감정일 거야. 나도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랑 떨어지기 싫어서 늘 붙어 자고 그랬다?”
무엇보다 이 완벽한 관계가 무너지는 게 무서웠다. 인간과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관계 중 가장 어렵지만 단단한 게 무엇이 있을까. 시현은 그게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멀어지더라도 어쨌든 평생 떨어질 수 없는.
“…제 착각이다…?”
“그래. 물론 이해는 해. 내가 10년이나 널 업어 키우고 그랬으니 많이 의지가 됐겠지.”
물론 진짜로 업어 키운 건 아니었지만, 게다가 더 많이 보필을 받은 건 저인 것 같았지만 어찌 됐든 자신이 이 애의 보호자였단 말이다.
“그리고, 나이도 많고, 나는 남자고 그렇잖아.”
순간 태운의 표정이 아주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게 답니까?”
“그게 다냐니?!”
시현은 제가 쏟아 낸 ‘아니라는’ 이유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태운의 반응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절로 눈동자가 흔들리고 입이 말랐다.
하나 이런 상황에도 이상하게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였다. 시현은 뒤죽박죽한 머릿속과 제멋대로 발광하는 심장을 모른 척하고 고개를 잘게 흔들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태운의 기세가 심상치가 않았다.
“그럼 스승님이 알려 주세요. 부모한테도, 남자한테도 입을 맞추고 만지고 싶고 어디에도 놔두고 싶지 않은 충동이 드는 건 뭡니까? 그게 아니랬으니 설명이 필요합니다.”
“무, 뭐?”
태운은 눈을 반쯤 내리깔아 속눈썹이 반짝이도록 고개를 예쁘게 기울이고는 처연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느리게, 그러나 시현이 잡아챌 수 없도록 움직여 그의 뺨 위로 손을 올려놓고 살짝 쓸어내렸다.
“늘 생각했어요. 남자여도, 스승님이었어도, 당신이 나를, 자식 같은 걸로 여기고 있음을 알았어도 말입니다.”
순간 열심히 설명하던 것들이 하얗게 탈색되어 사라졌다. 시현은 딱딱하게 몸을 굳히고 멍하니 태운을 올려다봤다. 슬쩍 입술 끝을 스치고 간 손 같은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저 빨간 눈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제가 이상한 거예요? 제가… 나쁜 거예요? 알려 주세요.”
시현은 이어지는 물기 어린 목소리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이상하다 나쁘다? 그렇게 따지자면 이건 이상한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었다. 사실 시현도 대체 이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이제 싫어요?”
“아니, 싫긴 내가 언제 싫댔어! 그게 아니, 읍!”
그 순간, 인식도 하기 전에 입술 위로 말캉한 무언가 닿아 왔다. 제가 알아차릴 수도 없이 기묘한 움직임이었다. 당연했다. 태운의 실력이 저보다도 한참 위였으니까.
가뜩이나 과부하가 걸려 느리게 돌아가던 머리가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듯 딱 멈췄다. 그리고 그게 재가동을 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다물려 있던 입술을 가르고 침범해 왔다.
이, 이게 지금 무슨…
제 머릿속이 만약 실체를 가지고 있는 세계였다면 이미 지진에 땅이 다 터져 용암이 흘러나오고 있을 거다. 그만큼 시현에겐 지금 이게 천지개벽 정도로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멍하게 얼어 있는 시현의 반응에 태운이 조금 더 고개를 돌려 입을 깊게 맞물려 왔다.
“으음!!! 하지,”
순간 입 안쪽, 어딘가에서부터 피부를 타고 아릿하게 쾌감이 치솟아 올랐다. 시현은 말도 안 되는 제 몸뚱이의 반응에 아연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려 제 양 팔을 포위하듯 붙들고 있는 태운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렇게 곧바로 밀어 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태운의 손이 시현이 움직이는 궤적을 이용해 밖으로 한 바퀴를 돌려 그대로 다시 양팔을 꾹 잡아 왔다. 동시에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연태운. 너,”
“좋다면서요.”
“아니 내가 언,”
다시 입술이 부딪혔다.
네가 싫지 않다고 한 거지 이, 이런 거까지 좋다고 허락한 건 아니었단 말이야!!
시현은 계속 뿌리치려 했으나 이화접목의 묘리를 사용해서까지 제 팔뚝에서 절대로 손을 떼지 않는 태운에 땅에 발을 강하게 붙이고 몸을 사방으로 비틀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소용이 없었다. 다시 한번 말랑한 것이 입 안으로 들어와 닿자 순간 사지에 힘이 슥 풀리고 뇌가 흐물흐물 풀려 갔다. 그러나 젖은 살이 문질러지는 소리가 귓가로 천둥처럼 파고들어 오자 시현은 애써 속으로 거친 말을 내뱉고 소리치면 눈을 꾹 감았다.
‘씨발, 정시현. 정신 차려 미친 새끼야!!!’
시현은 마구잡이로 흐르는 정신을 애써 주워 담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귀신같이 따라붙으며 떨어지지 않는 태운 때문에 오히려 벽을 등에 두고 갇힌 상태가 되고 말았다. 시현은 결국 태운의 복부로 주먹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머리나 가슴보다는 덜 아픈 곳이었다.
턱.
그러나 이미 사정없이 요동치는 마음으로 급히 내지른 주먹은 한 치의 피해도 주지 못하고 태운의 손에 붙잡혔다. 시현은 고개를 뒤로 빼고 태운의 양손을 내려치더니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대로 다시 한번 손목이 잡혀 이번에는 머리 위로 들려졌다.
“스승님, 아파요.”
“잠깐!”
“왜요?”
뭐, 아파요? 왜요???
시현은 태연한 태운의 반응에 어쩔 줄을 몰라 입을 떡 벌릴 뿐이었다.
솔직히 제가 크게 동요하긴 했다곤 하나 이렇게 조금도 힘을 못 쓸 줄은 몰랐던 시현이었다. 시현은 입술 위로 느껴지는 물기와 제 무력함에 충격을 받아 멍청히 서 있다가 저와 같이 축축한 입술을 하고 있는 태운의 얼굴을 보고 기겁해 급히 내공을 끌어 올렸다.
퍽.
붉은 내공이 옅게 둘러싸인 손이 태운의 손을 떨어트리고 이번엔 제대로 복부에 틀어박혔다.
“으으…. 스승님 저 죽이려고 그러십니까?”
“으아, 미친! 여태 잘만 막더니 이건 왜 안 막아, 멍청아!!”
그냥 물러서길 바란 거지 저렇게 맞고 아파하길 바란 건 아니었다. 조금 욱하는 마음에 내공이 꽤 들어갔을 터였다. 당연히 막거나 피할 줄 알았지, 이렇게 대놓고 맞을 줄을 예상하지 못했다. 시현은 고통 어린 얼굴로 복부를 붙잡은 채 허리를 슬쩍 구부리고 있는 태운을 보자 어쩔 줄을 몰라 손을 태운의 배로 가져다 댔다.
“생각해 보니까 차라리 스승님한테 맞아 죽어도 좋을 것 같아요. 죽여 주실래요?”
시현은 저 철없는 말에 얼굴이 울긋불긋하다 못해 시뻘겋게 물들 정도로 화가 났다. 망설임 없이 다시 한번 손에 내공을 실었다.
“너 더 맞아. 이 배은망덕한 놈아.”
그러나 그에 기다렸다는 듯 하얗고 반질반질한 얼굴을 무방비하게 들이미는 통에 덜커덕 멈춰 서고 말았다. 제가 방금 손을 뻗었으면 진짜로 그대로 맞았을 것이고 저 허연 얼굴은 멍투성이가 되다 못해 치아 몇 개 정도는 나가떨어졌을 거다. 시현은 아연한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직도 제가 싫어요?”
시현은 그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답도 못 하고 제대로 떼어 내지도 못하고 제겐 방법이 없었다. 결국 순식간에 몸을 돌려 태운이 펼친 기막을 헤치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
‘정시현, 미친 새끼야. 왜 대답을 못 하고 도망쳐.’
시현은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근처에 있는 가장 높은 건물의 꼭대기에 침울한 얼굴로 쭈그려 앉아 있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아직도 이해되질 않았다. 나름대로 조사의 물꼬를 트기도 했고 처음 가졌던 목표로 순조롭게 향하는 중이었다. 아까의 일은 정말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분명 아침까지는 멀쩡하지 않았나. 이곳에 온 지 고작 6시간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다.
제 기분과는 달리 밤하늘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쾌청하고 별도 많이 보였다. 시현은 이제는 까맣게 내려앉은 하늘을 보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니, 알았잖아. 일부러 모른 척한 거였잖아.’
순간 그 애가 그동안 해 왔던 행동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게이트에서 갑자기 나타났다든가, 제가 알려 주지 않은 것들을 알고 있다든가, 그리고 마치 예전부터 그래 왔다는 듯 제게 거짓 없이 마음을 표현한다든가.
결국 자신은 그동안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속내로 태운의 진짜 사정은 계속 모른 척해 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은 금방 없어질 거야….”
그 와중에도 잠시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찰나간 들었지만, 시현은 고개를 금세 내저었다.
온갖 생각이 폭죽처럼 터져 나가 머릿속은 이미 폐허였다. 시현은 한숨을 내쉬며 끌어모은 무릎 위로 얼굴을 푹 묻어 버렸다.
이대로 태운이를 볼 자신이 없었다.
‘스승님. 진짜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사실 헷갈리는 거 아니에요?’
도망치는 순간 머릿속을 파고들어 왔던 전음이 온몸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시현을 괴롭혔다. 계속 울려 대는 저 물음에 지금도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워졌다.
아니라고, 아닐 거라고 단언하면 저 깊은 속 안에서 진짜? 하며 되묻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사고가 뚝뚝 끊겼다.
너 사실은 유난히 그 애한테 집착하고 있잖아.
그건… 아끼니까, 그리고 그 애한테는 나밖에 없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거였다.
“….”
시현은 얼굴을 감싸 안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떡하냐고 진짜.”
배덕감이 온 마음을 난도질했다. 시현은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럴 땐 운기도, 뭣도 안 됐다. 그러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도록 몸을 빡세게 굴려야 했다.
시현은 그렇게 만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왔다. 미친놈처럼 공터를 파헤치고 몸을 혹사했더니 그나마 머리가 비워져 홀가분했다.
‘내일이면 흑접과 만나야 하고, 알아볼 것도 자세히 검토해야 하니….’
그러나 그 와중에도 시현은 제 기척을 한계까지 끌어 내려야 했다. 아직은 태운과 대면하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넓디넓은 펜트하우스는 복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잠을 잘 수 있는 방은 2층에 있었다. 당연히 이 이른 아침에 1층에 내려와 있을 인물은 없을 게 분명했다. 시현은 마치 도둑놈이라도 된 듯 슬금슬금 움직여 문손잡이를 돌렸다.
끼익.
“늦으셨네요.”
“으악!! 아!!”
그러나 제 예상과는 다르게 기척도 없이 가만히 문 앞에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태운에 시현은 꽥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왜 이제 오세요? 또 저를 버리시려고요?”
“야!! 내가 언제 버렸다고…!”
아니, 저 자식은 민망하지도 않나.
시현은 고구마라도 목구멍에 처박은 듯한 답답한 가슴팍을 두어 번 쿵쿵 내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