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어쨌든 도움을 주셔서 무척 감사합니다.”
“하하, 다 원하는 게 있어서 이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도 사람이라고요. 아시겠죠, 하정 씨?”
“아하하… 아무래도 제가 또 공무원이라….”
“부담 느끼지 마십시오.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뒤에 거절하셔도 저는 괜찮습니다.”
하정은 다정다감하게 이어지는 량의 화술에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한국에 버티고 있었던 이유에는 직업에 대한 책임감이 가장 컸지만 그중 시현의 문제도 어느 정도 지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도 없어지지 않았나. 량의 제안이 조금 솔깃하게 느껴졌다.
“아, 참. 오기 전에 들었는데 이곳을 참 마음에 들어 했다죠? 이 바로 위쪽에 펜트하우스가 있는데 이곳에 머무는 동안 쓸 수 있도록 조치를 해 두겠습니다. 모쪼록 편히 지내시기를.”
량은 정중히 말하곤 시현에게 시선을 돌려 한 번 더 눈을 둥글게 휘어 웃어 보였다. 시현은 순간 멈칫했다가 어색하게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팅 일자는 3일 뒤입니다. 시간은 정해지면 따로 사람을 시켜 알려 드리겠습니다. 불편한 게 있으면 연락하십시오. 제 연락처를 벌써 지운 건 아니겠죠, 하정 씨?”
“하하. 그럼요.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해요. 량.”
“별말씀을. 아직 제 제안은 유효하답니다.”
분위기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판이했다. 들었던 설명과는 다르게 경호원은 세 명이 끝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는데 실제로 만나니 꽤 소탈하게까지 느껴졌다.
나름 이런저런 이득을 계산하고 끌어들일 줄도 알았고 나름 입에 발린 소리도 할 줄 아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현은 끝까지 예의를 차리던 량을 떠올리며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봤다가 이내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어차피 저자와 만나기로 했던 목표는 반쯤 이뤘으니 이제 얼굴을 볼 일도 거의 없을 테다. 시현은 그것을 3일 뒤에 있을 흑접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억지로 생각의 방향을 비틀었다.
‘흑접은 아주 초반에 제가 도움을 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연락의 끈이 생겼죠.’
량의 말로 따지자면 완전한 동업자 정도의 관계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다 믿을 수는 없긴 했지만 말이다. 시현은 적당히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두고 정보를 어떻게 물어야 제대로 뽑아낼 수 있을지 고심했다.
“으아아. 저희 근데 밖에는 안 나가요?”
그러나 그런 생각의 실타래를 싹둑 자른 규민이 시현을 붙잡고 징징대기 시작했다.
현재 일행은 량이 잡아 놓았다는 펜트하우스로 옮겨 온 상황이었다. 처음 그 안에 발을 들였을 땐 어찌나 오두방정을 떠는지 한참을 빨빨대고 돌아다녀 정신이 사나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 시간여가 지나자 곧 질린 건지 이제는 밖을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규민 혼자면 몰라 유준까지 은근히 눈빛을 보내 오는 통에 시현은 곤란해지고 있었다.
“난 쉰다. 나 보지 마.”
그리고 아주 타이밍 좋게 하정에게서 단호한 거절의 말이 튀어나왔다. 시현은 뭐 씹은 표정을 하곤 제 앞에 나란히 앉아 눈을 똘망똘망 뜨고 바라보는 시선에 결국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하… 잠시만이에요.”
“이야아아!!! 유준아, 성공했다. 하이 파이브!”
그리고 마치 자신들의 계략이 성공했다는 듯 신나서 하이 파이브를 하는 둘의 모습에 결국 작게 실소를 내뱉었다. 그래, 저렇게까지 좋아하는데 밖을 구경시켜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앞당겨서 일해야겠어.’
그러나 태운의 분위기가 아까부터 뭔가 이상해 시현은 그를 슬쩍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태운아, 너도 나갈 거지…?”
끄덕.
태운은 티가 나도록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분명 차에서도 나쁘지 않았는데 이 짧은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예 자신과 떨어져 있겠다는 둥 이 먼 타국에서 가출할 생각은 아닌 것처럼 보여 속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
밖은 마치 사람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전히 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온갖 거리가 소리와 색채로 뒤덮여 있어 침착한 사람도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들 법한 분위기였다.
흐음…. 이쪽에 헌터들 마켓 같은 게 있다고 들었는데.
시현은 신나서 앞장서고 있는 둘이 혹여나 길을 잃지는 않을까 살피면서 주변에서 쏟아지고 있는 정보들을 머릿속에 담았다. 이때도 아까와 같이 비행기에서 받아 온 다회용 통역 마크가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형! 저, 저는 카지노는 못 들어가겠죠…?”
그러나 갑자기 들려온 발칙한 말에 주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시현은 멍하니 그 질문의 주인을 바라봐야 했다.
“뭐, 뭐? 카지노?”
유준은 흔치 않게 경악하고 있는 시현의 얼굴에 찔끔 몸을 움츠리곤 규민의 뒤에 슬쩍 숨으며 모른 척을 하고 있었다.
시현은 순간 제가 들은 게 맞나 몇 번을 생각해 보다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쪼끄만 게 어디서 카지노 얘길 해.”
“아, 안 어린데… 아니, 그냥 여기가 그런 게 유명하다고 해서요…. 헌터들은 된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무척이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시현의 표정은 풀릴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어린 헌터들도 전투를 하고 수백억씩 돈을 벌며 사회생활을 하는 시대였다. 능력 발현은 나이를 가리지 않았었으니까. 그렇지만 아직도 과거에 반쯤 머물고 있는 시현의 입장에선 절대,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하하. 우리 맛집 가요! 여기에 진짜 대단한 셰프가 있대요. 그분이 보조계 헌터인데 식재료들이 아주 살아 움직인다더라고요.”
그때 험악해지려는 분위기를 가르고 규민이 슬쩍 주제를 돌렸다. 시현은 다시 한번 유준을 엄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규민 씨가 삽니까?”
“예? 그, 그럼요!!”
“가죠.”
시현은 사실 나오자마자 대충 몇 군데를 같이 돌아봐 주고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도 시간이겠다 밥도 먹고 움직이기로 마음을 바꿨다.
규민이 쏜다고 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유명한 식당이라고 했던 곳으로 발을 옮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시현의 계획이 다시 바뀔 상황이 찾아왔다.
“헤이! 친구들 혹시 헌터?”
가무잡잡한 피부에 노란 머리를 한 외국인 하나가 무리 가장 뒤에 있던 시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뭐지?”
시현은 갑작스러운 상황일 만한데도 자연스럽게 반문했다. 어차피 아이템처럼 보이는 걸 이리저리 두르고 있는 규민과 흔치 않은 백발을 하고 있는 유준 때문에 누가 봐도 금방 알아챌 만했다. 사실 아까부터 저희를 주시하고 있는 놈이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실력도 딱히 별 볼 일 없어 보였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에이 놀라지 말라구. 혹시 가이드 안 필요해? 내가 정식 가이드들보다 싼데 말이야.”
그러나 저렴하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솔깃한 시현은 어디 한번 이어 가 보라며 턱을 까딱였다.
가이드. 보통은 도시나 유명한 관광지를 알려 주는 이들이었지만 이곳에서의 가이드는 아주 조금 달랐다.
그들이 안내해 주는 곳은 쉽게 말해서 지하세계였다. 범죄를 의뢰하거나 장물 아이템 거래, 홀로 움직이는 헌터들을 위한 소개소 같은 곳들이 모인 장소였다.
안 그래도 이런 놈들을 찾아야 한다는 하정의 말이 있어 이따가 천천히 둘러보려 했건만 먼저 찾아온 기회에 티 나지 않게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얼마지?”
“오! 이렇게 쿨한 친구를 봤나! 좋아 저렴하게 해 주지. 자, 인당 300달러야. 어때, 저렴하지?”
그러나 이어진 말에 시현의 올라간 입꼬리는 제자리를 찾다 못해 땅을 향해 뚝 떨어졌다.
‘300달러면 넷이 다 해서 1,200달러, 환율 따지면….’
시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규민과 유준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맛집은 둘이 가야겠다. 나는 태운이랑 따로 어디 좀 갔다가 올게.”
“앗! 저도!! 돈은 제가!”
그러자 규민이 움찔하더니 득달같이 말을 건네 왔다. 그러나 그것도 이어진 시현의 전음에 다시 입 안으로 쏙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요. 혹시 모르니까 밥 먹고 바로 호텔로 돌아가요. 하정이한테도 전해 주고요.}
대충 시현이 뭘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쪽으로는 도움은커녕 괜히 짐 덩이가 될 거라는 사실도. 당장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안타까웠지만, 규민은 시현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자, 두 명.”
시현은 얌전히 수긍하는 둘을 등지고 미소를 지었다. 비록 하나도 온화해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오… 뒤에 두 명은?”
“두 명.”
외국인은 계속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아쉬운 티를 팍팍 내며 다시 한번 권유하려 들었다. 시현은 다시 손가락 두 개를 보이며 단호하게 두 명이란 말을 내뱉었다.
“음… 좋아. 당신은 이런 거에도 쿨하네. 자 이걸 받도록 해.”
바스락거리는 종이가 딱 봐도 허접해 보였다. 시현은 그가 넘긴 종이를 받아 들고 접힌 부분을 조심스럽게 펼쳐 들었다.
그러나 홍보지같이 생긴 종이에 적힌 내용은 중요한 말은커녕, 지금 길바닥이나 쓰레기통을 뒤지면 나올 것 같은 흔해 빠진 것이었다.
“그건 티켓이야.”
순간 차갑게 내려앉으려던 시현의 눈 안으로 이채가 비쳤다 사라졌다. 그제야 왜 인당으로 돈을 뜯으려고 했는지 이해가 됐다.
“그걸 가지고 있어야 스트리트가 보여. 사실 별거 없지만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도 하지. 자 좀 더 해 줄 말이 있어. 들을 거야?”
“당연하지. 잠시만 기다려.”
아무래도 추가적으로 하려는 말이 길어질 것 같았다. 시현은 멀뚱하게 서 있는 둘을 배웅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규민 씨, 그래도 우리 넷 중에선 둘째 아닙니까. 그러니까 너무 조심성 없이 다니지 말고 사기 조심하고 절도 조심해요.”
“아하. 그런 건 괜찮아요! 제 물건들은 다 절도 방지 스킬이 새겨져 있었거든요! 형님이야말로 조심하십쇼!”
시현은 순간 걱정하듯 뱉었던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었다.
부자들이란…
“하여튼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합시다.”
“예, 형님!”
“형… 조심해요….”
이 와중에도 유준은 무언가 답답한지 무척이나 우울한 얼굴이었지만 시현은 단호하게 손을 까딱이며 둘을 돌려보냈다. 한참이나 지나서 몸을 돌리는 둘을 바라보다가 다시 따분한 표정을 하는 남자에게 발을 옮겼다.
“로미오와 줄리엣인 줄 알았어.”
“닥쳐. 할 말이나 해.”
“어우, 까칠하네. 오케이. 사실 내가 할 말이라기보단 당신들의 질문을 받을 거야. 사실 이곳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오는 친구들도 많거든.”
“그게 뭐지?”
남자는 음흉한 표정을 짓더니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