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이야… 인맥 빨 미쳤네.”
“말투 좀 어떻게 해라.”
하정은 아무도 없는 공항 VIP 라운지에 앉아 음료를 홀짝이며 너스레를 부렸다. 시현은 마치 건달처럼 건들건들 말을 해 대는 하정의 모습에 이마를 쥐어 잡고 한숨을 내뱉었다.
얼마 전 신류하가 의뭉을 떨고 간 이후 곧바로 길드 가입 절차가 이루어졌다. 시현은 이제 공식적으로 글로리 길드에 속하게 됐고 그사이에 태운의 신분 세탁도 완료됐다. 미국으로 가기 위한 일정이 불안할 정도로 물 흐르듯 평온하게 이루어졌다.
“네가 어떻게 이런 분이랑 친분을 만들었냐. 참 세상 다시 볼 일이네.”
“에, 형님이 절 구해 주셨었거든요…! 저야말로 조금 신기하네요. 하정 님과 형님이 친구 사이셨다니….”
“아, 제가 이 친구 많~이 도와주고 있죠. 하, 이번에도 연차를 얼마나 썼는지.”
게다가 적극적으로 이번 일을 돕기로 한 규민의 도움으로 이렇게 편안한 비행까지. 어차피 길드원들이 다 같이 출국하는 걸로 신고가 되어 있어 같이 가야 했지만 어쨌든 편한 건 편한 거였다.
“저… 사실 하정 님 팬이었는데 사인 좀 해 주심 안 될까요?”
“저, 저도요!”
그러나 그 잠시간의 평온은 제 앞에서 신나게 떠들고 있는 일행들과 함께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규민과 유준이 갑자기 어딘가에서 작은 종이 쪼가리 같은 걸 꺼내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정의 얼굴이 박힌 포토 카드였다.
‘어쩐지 하정이랑 같이 갈 거라니까 몇 번을 물어보더라니.’
시현은 문득 규민과의 첫 만남이 하정을 도와주겠다고 게이트를 따라 들어갔다가 몬스터에 둘러싸여 있던 그를 구해 냈을 때란 걸 떠올렸다.
시현은 세상 질색 어린 표정을 하며 저들만의 세상에 빠진 이들을 멍하니 둘러봤다.
“아, 포토 카드. 에이, 쑥스러운데. 뭐, 주세요.”
그때 하정이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춰 왔다.
‘야, 봤냐?’ 눈동자에서 하정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시현은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스승님.”
그때 태운이 시현의 손을 가볍게 잡아 왔다. 시현은 제 손에 저절로 쥐어지는 음료에 태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다가 ‘픽’ 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어, 상덕아.”
“….”
모든 일이 물 흐르듯 흘러갔지만 그중 아주 작은 사건이 있었다. 신류하가 뒤를 쑤시고 다녔다는 걸 알게 된 덕분에 앞뒤를 맞추느라 태운의 신분을 다른 이름으로 위장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름이 김상덕이었다.
아름다운 얼굴과는 뒤지게도 안 어울리는 이질적인 이름이었지만 그만큼 너무 웃겨서 자꾸 생각이 났던 것이다.
태운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아, 그만해야지.’
공항에 오는 동안 틈날 때마다 놀려 댔던 시현이었기에 지금도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저 반응이 너무 중독적이었다. 태운은 제 앞에선 아닌 척하면서도 촌스럽거나 미적 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버티지 못했다.
어렸을 땐 안 그랬던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골라 준 옷들은 은근히 거절하고 꼭 제가 골라 입던 태운이었다.
시현은 여전히 뚱해 있는 태운의 등짝을 몇 번 찰싹찰싹 내려치다가 곧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규민의 말에 벌떡 일어섰다.
‘귀엽기는.’
그리고 그 와중에도 제 손을 놓지 않고 더욱 꾹 쥐고 기대어 오는 태운을 보며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비행은 무척이나 편안했다. 비록 기체가 떠오르며 펼쳐진 온갖 방어 및 언어 스킬에 놀란 시현이 벌떡 일어난 사건만 아니라면 말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거의 신발 벗고 비행기를 타는 것과 같은 꼴이었다.
‘제기랄, 개쪽팔려.’
그 모습을 겨우 제 일행들과 몇몇 승무원만 보았다는 걸 대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렸다. 시현은 조금은 우울해진 채로 공항 밖을 나섰다.
“푸핫. 아, 정시현 존나 웃겨. 미친놈.”
“고마해라….”
그리고 하정은 제 우울한 심정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시현은 슬쩍 태운의 눈치를 보고는 마주치려는 시선에 급히 고개를 팩 돌리고 어색하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 개웃겼네. 일단 여기서 택시 타고 바로 만나기로 한 곳으로 이동할 거야. 가는 동안 대충 그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지 설명해 줄 테니까 머릿속에 잘 새겨 놔.”
하정은 시현의 투덜거림에도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곧 택시를 타자마자 음성 차단 스킬을 펼치고 아까와는 달리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앞으로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오늘 당장 량차오샤를 만나게 될 거라는 건 이야기해 줬었지? 그자는… 좀 복잡한데 헌터 등급 자체는 높은 자가 아니야.”
량차오샤는 B급 헌터였다. 따지자면 마냥 낮은 등급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높은 등급도 아닌 자였다. 그런데도 이자가 왜 홍콩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그의 출신에서 나타났다.
그자는 세상이 바뀌기 전부터 홍콩의 모든 부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애초에 부자인 사람이었다. 사실 말이 홍콩이지 그자가 휘두르고 있는 재력과 권력은 나라를 가리지 않았다.
“홍콩에 유명한 헌터들은 다 그자의 밑에 있어. 근데 진짜 재밌는 점은 돈이 많은 거 하나가 아니야.”
돈은 헌터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자들이 능력도 없던 옛날부터 어떤 자에게 후원을 받고 있었다면? 정말 누군가의 상상 같은 일이었지만 그것들이 진짜로 일어난 것이었다.
량차오샤는 마치 옛 귀족들이 그러하듯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여러 인물에게 후원을 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자들이 하나같이 높은 능력의 각성자가 된 것이다.
“그자들을 량차오샤 키즈라고 불러. 하… 사실 나도 스카우트 명목으로 명함을 받았긴 한데….”
“그래서 흑접도 그것과 관련이 있을 거란 얘기야?”
“…맞아. 일단 내 생각은 그래.”
시현은 하정의 진지한 표정에 입을 꾹 다물고 창가에 슬쩍 기대서 지금 들었던 이야기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만 보면 무척이나 무서운 이였다. 무력과 정보력을 다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게다가 계속해서 능력이 좋은 이들을 스카우트하려고 한다는 움직임까지 있다니.
아직은 흑접이 그 키즈라는 것에 엮여 있는지는 확신할 순 없었지만, 시현은 생각보다 더 커다란 조직과 관련이 있자 절로 긴장감이 차올랐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흑접이라는 이름조차 한자 문화권에서나 쓸 만한 이름이 아니던가.
“그리고 일단… 능력이고 뭐고 다 떠나서 인성이 좋아. 자기 재산 아낌없이 써서 초기 게이트 사태 때 물자 조달을 했었거든. 도움받은 국가만 두 자릿수가 넘어가.”
“미쳤네.”
“미쳤지. 원래 가지고 있던 의료 재단을 통해 의약품을 각지로 지원한 것부터 시작해서 아낌없이 돈을 풀어 댔으니까. 그 도움받은 나라 중엔 우리나라도 있었거든.”
“허….”
“우리나라에는 신의 광산이 있었잖아. 강원도가 지금 이렇게 살 만해진 것도 초반에 헌터들을 지원해 준 게 커. 뭐, 사실 개벽전에는 삼합회 출신이네 어쨌네 말이 좀 있긴 했는데 신빙성은 없어 보이고.”
시현은 제가 살아온 세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인물에 조금 멍해졌다. 그자의 행보가 참 놀라웠다. 마치 어떤 소설의 주인공 일대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하정이 누군가를 이렇게 고평가하다니. 하정은 안 그래 보였지만 저보다 더 경계심이 철저한 이였다. 애초에 누군가에 대해 말을 자주 하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지금 상황이 더 특이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설명을 들으면 그 모든 게 이해가 가기도 했다.
얘기만 들으면 무슨 성자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시현은 그가 마냥 좋게 생각되지 않았다. 인간은 무조건 대가를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물질이든 제 만족이든, 아니면 종교적인 신념을 위한 것이든, 그 모든 건 자신의 필요에서에서부터 시작됐다. 아무런 대가 없이 그 모든 걸 풀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단순히 소개만 받는 자리니까 깊게 생각하지 말자.’
그러나 시현은 이내 고개를 털고 걱정을 지워냈다. 경계는 두되 만나기 전부터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그 판단에 사람을 꿰맞추게 된다. 뇌라는 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생겨 먹었기에 시현은 최대한 그 남자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어차피 도움을 받기 위해 만나는 거니까.’
시현은 그 유명한 라스베이거스의 웰컴 표지판이 창밖으로 지나가는 걸 바라보며 자꾸만 파고들어 가려던 생각을 단번에 잘라 냈다.
“이제 슬슬 도착하겠네.”
“어, 그리고 미팅 시간이 오후 3시라서 시간이 여유롭진 않아. 어떻게 할래?”
하정은 잠시 제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가 이내 규민과 유준을 보며 의견을 물었다.
그새 말을 놓은 건지 편하게 반말을 하는 하정이었다.
“음, 저희가 가면 방해가 될까요?”
“…조, 조용히 있을게요….”
규민과 유준은 은근슬쩍 시현의 눈치를 보다가 같이 있고 싶다는 의견을 조심히 피력해 왔다. 비행기 타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신나 하던 놈들이 외국에 나오자마자 금붕어 똥처럼 달라붙자 시현은 머리가 아파져 왔다.
태운은 그냥 이제는 원플원 세트나 마찬가지였기에 떨어트려 놓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시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어차피 그쪽에서도 우르르 데리고 나올 테니 상관은 없겠지.”
“우르르?”
“말했잖아 그 키즈들. 그 사람 경호원이 많아.”
시현은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이곳저곳에 제 얼굴을 알리고 다니게 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습관 같은 거였다.
무림에서 워낙 비밀스럽게 퀘스트를 해내야 했고 동시에 이리저리 쫓기는 삶을 살다 보니 무언가 제 정보가 흘러 나가거나 얼굴이 팔리는 게 불안하게 느껴졌다.
“쯧, 어쩔 수 없지.”
그러나 이곳이 무림도 아니었고 계속 그렇게 살 수도 없으니 시현 본인이 적응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시현은 잠시 태운을 슬쩍 바라봤다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내에 택시가 들어서서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게이트 물건을 쓰지 맙시다!!”
“게이트는 선물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그때 시현의 예민한 귓속으로 여러 사람이 열심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소리의 근원지가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