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유자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헌터란다-66화 (66/146)

#66

“갈까?”

끄덕.

“좋아, 오늘 내내 따라오느라 고생했으니까 업어 줄게. 이리 와.”

시현이 씩 웃으며 손짓하자 태운은 아직은 짧은 팔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넓은 등 위로 올라탔다. 아직 제 스승보다 머리 하나쯤이나 작은 키가 불만이었지만 이럴 때는 또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드는 태운이었다.

그 순간 태운의 생각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순식간에 풍경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가는 길이 조금 익숙했다. 아무래도 최근에 자주 기거했던 객잔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태운은 가는 팔을 시현의 목으로 둘러 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태운아, 자? 그새 잠들었나….”

“…우음. 안 자요.”

그새 옅게 잠이 들었던 태운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은 목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잘됐다. 한창 클 땐 밥 꼭 챙겨 먹어야 하거든. 너도 이 형님처럼 크고 싶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는 슬쩍 고개를 돌리고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자신은 무언가를 배불리 먹는 게 딱히 달갑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딱히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제 스승이 저렇게 키 얘기를 하면 뭔가 이상하게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던 것이다.

“먹을게요.”

“큭큭. 그래.”

그리고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앞장서서 객잔 안으로 들어간 시현은 점소이에게 몇 가지 음식을 시켜 위로 올려 달라 부탁한 뒤 한참 낮은 태운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그러나 잠시 후 탁자 위에 한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니 조금 전의 선택을 물리고 싶어졌다.

태운은 자연스럽게 제 앞으로 몰아진 접시들을 보며 티가 나지 않게 입술을 삐쭉거렸다.

“근데 이게 대체 뭐길래 보물단지 숨기듯 챙겨 갔던 거지?”

그때 시현이 아까 가져왔던 책을 쥐어 잡은 뒤 몇 장 넘기기 시작했다. 아까 그자가 이 보퉁이를 하도 애지중지하길래 챙겨 온 물건 중의 하나였다.

딱히 이름도 없고 허름해 보이는 겉모양이 조금은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던지라 시현은 혹시나 비급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계속해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음과 양의 조화? 팔괘? 뭐 태극권 같은 얘길 하는 것 같은데 무당파의 비급인가.’

그러나 처음에는 웅장하게 무공에 관해 얘기하는 듯했던 내용이 열 장 정도 페이지를 넘기자 점점 소설적인 색을 비추기 시작했다.

시현은 읽던 것을 멈추고 빠르게 맨 뒷장까지 스르륵 종잇장을 넘겼다.

탁.

‘에이 뭐야, 그냥 음양채음을 소재로 한 음란패설이잖아?’

이곳엔 이런 게 널리고 널렸다. 내용이 꽤나 적나라해 그중에서도 딥한 내용인 것 같았지만 시현은 대강 넘겨보곤 곧바로 책을 덮어 버렸다. 혹시나 한몫 당길 수 있을까 주워 왔던 게 쓰레기라는 판명이 나자 괜히 김이 빠져 허탈해졌다.

“그거 재밌어요?”

“엉?”

“재밌냐고요.”

그때 열심히 밥을 먹고 있어야 할 태운에게서 궁금증이 가득 담긴 질문이 튀어나왔다. 시현은 책을 내려놓곤 고개를 들어 희멀게서 유약하게 생긴 태운을 슬쩍 보다 씩 미소 지었다.

괜히 장난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긴 태운이도 이제 15살이고 여기는 이미 장가간 애들도 있을 정돈데 이 정도야.’

제가 있던 현실에서도 이맘때쯤 애들이 그렇게 성인 만화와 영상을 돌려 보고 했었던 게 떠올랐다. 그동안 무공을 단련하랴 퀘스트를 따라가랴 이리저리 바빠서 그런 것들은 알려 주지도 못했는데 이 정돈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의도의 절반 이상이 장난기였지만 말이다. 시현은 내려놨던 책을 다시 집어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읽어 볼래?”

…끄덕.

귀엽기는.

태운이는 뭘 어떻게 하는 거냐, 이건 뭐냐 꼬치꼬치 묻진 않았다. 그러나 늘 제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눈치껏 따라 했고 배워 갔다. 그래서 행동이나 말투나 조금 이상해졌지만 그것 또한 무척 귀여워서 자꾸만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시현은 책을 받아 드는 태운을 보며 어떤 반응을 내비칠지 상상해 봤다. 그러자 볼이 핑크색인 오리 캐릭터가 꾸꾹거리며 방방대는 모습이 떠올랐다. 자꾸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 표정을 숨기기가 무척 어려웠다.

“나 나갈 테니까 혼자 봐야 한다? 밥은 꼭 다 먹고?”

“어디 가세요?”

“으응, 그런 게 있다. 애들은 몰라도 돼.”

입을 열심히 움직여 씹던 음식을 급히 삼킨 태운이 나가려는 시현을 불러세웠다. 결국 그 모습에 참지 못하고 시현의 손이 하얀 볼을 꽉 붙잡고 괴롭히듯 한참을 조물댔다가 떨어져 나갔다.

“다 못 보겠으면 말하고.”

그렇게 시현이 손을 슬렁슬렁 흔들며 객실을 떠나자 태운은 기다렸다는 듯 젓가락을 내려놨다. 한참 만져서 그랬던 건지 아닌지 벌겋게 익어 버린 볼에 손을 대고 있다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건네받은 책을 펼쳤다.

‘무공서…?’

그렇다면 집중해서 읽어야만 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무공서를 단번에 이해하는 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 장을 넘기자 의아함이 가득 찼다.

내용이 온통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태운은 분명 시현이 아무 의미도 없이 주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제가 아직 모르는 게 있어서 그럴 거라 생각하고 다시 활자에 집중하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집중력을 더해 몇 번이나 읽어야 했다.

잠시 후, 결국 종잇장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이게….’

그러나 다시금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태운의 고개도 점점 책으로 기울어졌다.

***

“태운아?”

태운은 잠시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다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시현을 올려다봤다. 계속 내려다만 보던 시야가 바뀌자 순간적으로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왜 이리 멍하니 있어? 일단 이것부터 들어 봐.”

그새 시현은 계산을 마친 건지 책 15권을 멍하니 앉아 있던 태운의 품 안으로 턱 하니 안겨 주고는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태운이 너도 이제 여기서 살아야 하잖아? 그래서 내가 공부할 것들은 좀 더 샀거든?”

시현도 10년간은 무림에서 지냈다지만 제 DNA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던 모양이었다. 책임질 아이가 생기자마자 급격하게 우리 애 교육에 힘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아무리 세상이 이렇게 됐다지만 아직 대학교도 있는 것 같았고 헌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삶은 개벽 이전과 별다를 것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가뜩이나 책에 관심이 많아 보였던 애한테는 공부만큼 좋은 게 없었다.

“내가 그래도 중학교 수준까지는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당분간은 같이 공부하자.”

“뭐든 다 좋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태운은 계속 중얼대면서 이게 뭐고 저게 무슨 책인지 설명해 주는 시현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시현은 그런 태운의 얼굴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냥 연예인 같은 걸 시킬까? 저 얼굴을 이대로 재야에 숨기고 살아간다는 건 좀 죄를 저지르는 것 같아.’

갑자기 생각이 바뀌려고 했다. 자주 봐서 순간순간 잊고 있었지만, 태운의 가장 큰 무기는 그 대단한 내공과 무위가 아니라 이 얼굴이었다. 오죽하면 죽이겠다고 찾아온 놈들이 죄다 마음을 바꾸곤 옷을 벗은 채 달려든단 말인가.

물론 그대로 목이 베어져 내버려졌으니 나중엔 그 수가 줄긴 했지만, 그 후에도 그런 놈들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그곳에서도 특출난 외모였단 말이었다.

‘그래 공부는 좀 어렵지. 시켜 보고 힘들어하면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걸 물어보는 거야. 어른들이 하는 직업 체험 같은 건 없나?’

시현은 혼자 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멀뚱히 서 있는 태운의 손을 덥석 잡고 규민이 잡아 준 호텔로 발을 옮겼다.

그러나 시현의 행선지는 호텔에 도착하기도 전에 걸려 온 전화로 바뀌어 버렸다.

그렇게 기다리던 규민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시현은 본능적으로 노는 건 끝났다 느끼며 가볍게 둥둥 떠 있던 기분을 싸그리 모아 내리눌렀다. 그리고 발을 급히 움직여 규민이 알려 준 병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병원은 확실히 대기업의 자제가 입원이 되어 있는 곳인지 경비가 삼엄하고 한 층을 단독으로 쓰고 있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규민이 먼저 연락을 한 만큼 미리 말을 해 놨을 확률이 크긴 했지만, 시현은 조용히 들어서는 걸 택했다.

‘쯧. 괜히 이상한 말이 돌 수도 있으니….’

태운과 시현의 발걸음은 빠르고 힘있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이 가로지르는 병원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달각.

비록 병실 문을 열 때는 아주 작은 소음이 나긴 했지만, 환풍기 소리에 묻힐 만큼 아주 작은 소리라 주변의 이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 흩어졌다.

“으흑.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니. 회복 아이템을 써도 치료가 되질 않다니….”

“진정해. 그러다 당신도 기절하겠어.”

그때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조금은 나이대가 느껴지는 중년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은 빠르게 넓디넓은 병실의 끝 쪽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섰다.

괜히 입맛이 씁쓸했다. 물론 이 모든 게 제 잘못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괜히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동안 이규민에게 꽤 정을 준 모양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이만 들어가서 푹 쉬세요. 형은 제가 계속 보고 있을게요. 주연이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래… 후우. 너도 그렇게 따르던 형이 이렇게 돼서 힘들겠지만, 내일은 회사 일로 얘기 좀 하자꾸나.”

“여보!”

“그만. 이건 어쩔 수 없어. 마음은 아프지만 그렇다고 이걸 이대로 내버려 두고 슬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시현은 딱 봐도 복잡해 보이는 가족의 대화에 작게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켰다.

짧지 않은 대화가 계속 이어졌고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시현은 평소보다 낮게 잦아든 이규민의 목소리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원래라면 드디어 조용해졌다고 기뻐할 만한 일이었지만 왜 그러는지 아는 처지로선 차라리 예전처럼 시끄럽게 떠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그때 옆에 조용히 서 있던 태운이 조심스럽게 시현의 손을 감싸 쥐었다.

{마음이 안 좋으신 건가요?}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시현은 잠시 움찔하고는 다시 전음을 날렸다.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그리 말씀하셔도 신경 쓰이신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시현의 입가로 쓴웃음이 걸렸다. 이제는 뭘 해도 태운에게 거짓말을 하기가 힘들 거란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저를 이렇게 잘 아는지.

얼마 전에도 느꼈지만 정말 이 아이가 훌쩍 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 우리 태운이 언제 이렇게 다 컸지. 위로도 할 줄 알고.}

{…아주 예전부터였습니다.}

{예전?}

조금은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시현은 선뜻 이어지지 않는 대답에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나이야 이제 스무 살이 됐으니 그 얘긴 아닐 거고. 정말 키를 얘기하는 건가 순간 의문이 들었다. 태운의 키가 제 키를 앞지른 건 꽤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그때 시현의 상념을 가르고 병실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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