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시현은 어차피 누가 좋다고 접근해도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거절할 줄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남들이 다가오는 걸 받아 줄까 봐 불안하지 않았지만, 그냥 남들이 힐끔거리는 것조차 보기가 싫었다.
“저는 알아서 기운을 조절하고 다니겠습니다. 쓰십시오.”
“에이, 계속 그러고 다니면 피곤하잖아.”
“괜찮습니다.”
돌아온 대답이 무척이나 단호했다. 시현은 슬슬 흐려지는 태운의 기척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기운을 꾹꾹 눌러서 생기와 기척을 줄이면 일반 사람들은 제가 옆을 지나가도 잘 인식하지 못했다.
물론 별것도 아닌 기술이었지만 이 또한 아예 맘 놓고 있는 것보단 신경을 꽤 써야 하기에 조금 피곤해지긴 했던 것이다.
‘은근히 고집이 세단 말이지. 누굴 닮아서 저러는 건지.’
시현은 혹여나 제 반응에 태운이 삐질까 봐 다시 모른 척 모자를 슥 눌러쓰고 손을 들어 올렸다.
분위기를 돌려 보고자 대충 시켰던 치킨은 맛있었다. 처음엔 제 앞에 단정하게 앉아 포크를 마치 칼이라도 되는 양 유려하게 쥐어 잡고 있던 태운의 자세를 고쳐 준 것 외에는 별문제도 없었다.
“스승님, 여기서는 이런 걸 데이트라고 하지요?”
“푸흡.”
이 주제가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뿜어 버린 콜라가 턱을 타고 흐르고, 곧이어 태운이 냅킨을 가지런히 잡아 입가를 톡톡 닦아 주었지만 시현은 입을 떡하니 벌린 채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데, 데이트? 너 그걸 어디서 아니, 이게 아니라.”
“티비에서 봤습니다.”
아니, 무슨 치킨을 먹다가 그런 얘길 하니.
시현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보통 데이트라고 하면 밥을 먹고 카페 갔다 영화 보는 거라고 했으니 현재까진 밥 먹는 거 말고는 해당하는 게 없었다.
사실 자신도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자신감 있게 기다 아니다 말해 주는 게 망설여지기도 했다. 저절로 말이 뭉개지고 입 안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갔다.
“뭐, 하여튼 이건… 아닐걸?”
“그렇군요.”
한 손으로 치킨을 콕 찍고 남은 한 손으론 턱을 괴고 있던 태운이 시현의 대답에 싱긋 미소 지었다. 별다른 반박도 없이 그대로 수긍하고 있는 태운의 모습에 시현은 작게 자괴감이 들었다.
아닌가? 맞나?
이곳에 왔다고 제대로 무언가를 교육해 주겠다고 자신만만했던 과거의 자신이 참 가소로웠다. 하다못해 무림에 있을 때보다 알려 주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스승으로서의 면이 처참히 구겨졌다.
그동안 알려 주겠다고 하고 미뤄 왔던 것도 산더미였고 영상으로 보던 것들을 적용해서 설명해 줘야겠다고 생각한 게 벌써 몇 주가 훌쩍 넘었다.
시현은 무언가 결단이라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데이트라는 게 좋아하는 사람이랑, 아니 일단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종류가 있는데.”
“그런데 이곳 서적들은 참 질이 좋군요. 내용이 뭘지, 예?”
그러나 동시에 쏟아져 나온 말이 겹쳐 뭉그러졌다. 그리고 열심히 말을 꺼내려던 시현의 머릿속도 과자 봉지가 터지듯 와르르 뒤섞였다.
“아니, 아니다.”
시현은 민망해서 그런 건지 괜히 목덜미가 화끈거리자 손을 마구 내저은 뒤 급히 태운의 시선이 닿아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테이블에선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서로의 전공 책을 꺼내며 누구 게 더 두꺼운지 견주어 보고 있었다.
“…책이 가지고 싶어?”
“아무래도 문화를 배우는 데 유용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제 계속 이곳에서 지내야 하지 않습니까.”
시현은 그 순간 바보 같은 자신을 조금 때리고 싶어졌다.
이곳에는 무림과 달리 무언가를 알려 줄 수 있을 만한 것들이 아주 많았다. 아니 널리고 널려 있었다. 눈만 돌려도 있는 게 텔레비전이고 영상이고 책이었다. 굳이 제가 알려 줘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내가 뭐가 되지.’
그러나 명쾌한 해답을 찾아냈음에도 뭔가 탐탁지 않았다. 어쩐지 제 역할이 흐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 뭐 하냐 정시현. 죽자 그냥.
순간 머리가 테이블 위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이마가 부딪히려고 하는 순간 그 사이로 하얀 손이 슥 비집고 들어왔다.
“아프시지 않습니까.”
시현은 제 뜨거운 이마로 느껴지는 서늘하고 반들반들한 질감에 머리를 벌떡 들어 올렸다.
솔직히 고작 이딴 얇은 나무에 머리를 부딪혀 봤자 고통 따윈 없겠지만 이 와중에도 저를 생각해 움직인 선녀 같은 태운의 심성에 감동이 밀려왔다.
너무 기특하고 이쁘고 뿌듯했다.
“책 사러 갈까?!”
절로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태운은 그런 시현의 제안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아까 시현이 모자를 벗었던 것 때문인지 자꾸만 제 앞으로 시선이 모여서 달갑지 않았다. 이곳을 벗어난다면 어디를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잠시 후. 시현과 태운이 도착한 곳은 근처에서도 가장 크다고 유명한 서점의 앞이었다.
시현은 예전에도 잘 가지도 않았던 서점에 마치 익숙하단 듯 앞장서서 들어섰다. 비록 에스컬레이터 방향을 헷갈려서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작은 트러블일 뿐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서점의 안으로 들어섰을 때, 태운에게서 조금 들뜬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곳은 꼭 별천지 같습니다.”
천장 위로 빼곡하게 박힌 조명들과 공간 가득한 책 냄새, 그리고 온 벽을 몇 겹이나 차지하고 있는 수만 권의 책들과 나직한 백색소음. 태운은 아이템 거래소인 넥서스에 갔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더욱더 강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시현은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는 태운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었다.
비록 상황이 따라 주지 않아 수없이 칼질을 하고 지냈지만 어렸을 때부터 좋은 부모님과 지냈다면 아마 태운은 학문 쪽으로 한 획을 그었을 것이다.
‘일단 쉬운 것부터 봐야겠지?’
제가 그랬듯 태운이도 말은 잘하고 잘 듣는 것 같았지만 혹시 쓰고 읽는 것에는 조금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현은 아동 교육 서적이 있는 곳으로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한글 교재랑… 전집 같은 것도 필요하려나? 음, 아니다. 일단 들고 다닐 수 있는 정도로만….’
그 뒤로 시현의 쇼핑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쪽 손 위로 열 권의 책이 순식간에 쌓였다. 종류도 교재부터 시집 잡지 만화 등 종류도 다양했다.
그 모습은 아무리 시현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모양새였다. 태운은 그런 시현의 모습을 보면서 작게 미소를 짓고는 주변으로 미세하게 살기를 내뿜었다.
“어우, 야 여기 갑자기 좀 소름 끼치지 않냐.”
“응. 뭔가 좀 추운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해…. 걍 가자.”
주변이 순식간에 살충제라도 뿌린 듯 텅 비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현은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쌓여 있는 열 권 위에 한 권을 더 쌓았다.
“참, 이거 다 한 번에 보라고 사 주는 거 아니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천천히 하면 돼.”
그제야 나름 만족스럽게 책을 골랐는지 시현이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태운을 올려다봤다.
원래도 머리가 비상해서 책 몇 권 정도야 금방 읽어 내던 태운이었다. 그러나 그거야 다 무공에 관한 것이었고 제가 고른 것들과는 조금 달랐기에 시현은 혹시나 태운이 실망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예,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여길 오니까 그때가 생각이 납니다.”
“뭐?”
“스승님이 무공서가 아닌 일반 책을 처음으로 주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태운은 시현의 옆자리에 앉고는 싱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시현은 제 제자가 보이는 기대 어린 눈빛에 호응을 해 줄 수가 없어 입 안이 말라 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동안 무공서며 일반 책이며 뭐며 가져다준 게 수백 권은 넘어갔다. 그 와중에 무공서도 아닌 특색 없는 책을 떠올리려니 기억은 더욱 꼭꼭 숨어 버리고 있었다.
‘뭐였지? 학습지 같은 거였을 리는 없고….’
시현은 스무고개를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교육서 같은 거였나?”
“뭐, 그럴 수도 있지요.”
“으음….”
시현은 이후에도 몇 번 질문을 던졌지만 딱히 제대로 된 힌트가 되는 답변은 없었다. 제가 기억을 못 하는 것도 있었지만 태운의 대답도 두리뭉실 시원찮은 게 별거 아닌 책인가 보다 하는 결론이 내려졌다.
“에이, 잘 기억 안 난다. 내가 책을 좀 많이 가져다줬냐. 조금 봐줘라.”
“하하. 그럼요.”
웃음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태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계속 그게 뭘까 떠올리려고 하는 시현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그가 기억을 해내지 못해도 상관은 없었다. 책 자체는 정말로 대단한 책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스승님, 당신이 처음 준 책은 패설이었습니다.’
태운은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입꼬리를 슬쩍 밀어 올리고 시현의 허리로 손을 돌려 안고 몸을 기대었다.
***
슈욱-
“커헉!”
시현은 들고 있던 단검을 앞으로 날린 뒤 옆으로 보이는 나무를 박차고 도망치던 자의 목덜미를 단번에 움켜쥐었다.
“쉽게 좀 갑시다. 빨리 내놔요. 그거.”
“아, 안 돼! 절대 못 줘!!”
품 안에 있는 보퉁이를 더욱 끌어안으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남자는 단검이 박힌 종아리에서 흐르는 피를 닦지도 못하고 표독스럽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아, 애도 보고 있는데 진짜 힘 쓰게 하네.
나름 강하게 뿌리치던 손을 다시 손쉽게 잡아 비튼 시현은 이제 도착해 제 뒤에 멈춰 선 태운을 슬쩍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퀘스트의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저 안에 든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습득해서 제자리에 가져다 두어야만 했다.
“미안하게 됐수다.”
털썩.
시현의 손끝이 정확하게 훈혈에 닿았다. 그러자 다급해 보이던 남자가 순식간에 힘을 잃고 흙바닥으로 널브러졌다.
“그러길래 왜 남의 물건을 훔치고 그럽니까?”
품 안의 보퉁이를 들어서 태운에게 건넨 시현은 대수롭지 않게 남자를 잡아다가 퀘스트에 적힌 곳으로 향했다.
이것까지 마무리한다면 오늘의 퀘스트도 이걸로 끝이었다.
“태운아, 웬만하면 도둑질은 하면 안 된다. 알았지? 나쁜 짓을 하면 다 저렇게 되는 거야. 정말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하고.”
끄덕.
태운은 얼마간 이동한 뒤 어딘가에 멈춰서서 보퉁이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는 시현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착하다. 뭐 그리고 이건 정당한 보수니까 오해하지 말고.”
도장 모양을 하고 있는 물건과 아까 잡은 남자를 어떤 집 앞에 내버려 두고 나머지를 싹 다 모아 챙긴 뒤 당부하는 시현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보자기를 열어 놓고 쭈그려 앉아 이것저것 재 보는 모습이 꼭 사파나 녹림의 잔당 같았지만, 태운은 작은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모른 척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