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하정은 작전상 텔레파시나 전음을 접해 본 적이 있기에 놀라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은근히 태운의 눈치를 보며 돈 없다고 하는 시현의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거지새끼.”
“와악! 야!”
“나 지금 직장인이고 매달 나가는 돈 다 알차게 정해져 있거든. 이거 보장해 주면 가능.”
“끄응….”
10년간 월급이란 개념을 잊고 살아와 저도 모르게 말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그러니까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는 말이었다. 그동안 돈이나 재물은 퀘스트를 통해서 입수했고 아랫사람들은 잘 두지도 않았다. 그나마 몇몇 부리던 놈들도 무력으로 다스렸으니 선뜻 떠올릴 수가 없었다.
시현은 결국 말 끝났다는 하정의 축객령에 잔뜩 우중충해져서 쫓겨나듯 빌라 밖으로 빠져나왔다.
‘…진짜 차라리 밀입국을 해 버릴까? 아니면… 진짜 셰어 길드 들어가?’
시현은 썰렁한 거리 위에 멀뚱하게 서서 머리통을 쥐어 잡았다. 무슨 길드를 만들고 고용하고. 평소 해 본 적도 없는 걸 하려고 하니 머리가 녹이 슬어 버린 것 같았다.
이제는 경공을 쉬지 않고 쓴다는 가정하에 한 달 정도의 시간이라면 도보로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스승님.”
“아, 맞다. 밥 먹으러 가야지.”
그러나 그것도 태운의 부름에 저 멀리 날아갔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어 아침밥도 못 먹었는데 벌써 시간은 1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시현은 주변 다 잊고 생각에 빠지는 버릇 좀 고쳐야겠다 생각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요즘 어딜 가야 젊은애들이 많으려나. 요즘… 맛집….’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더니 몇 번의 검색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곧 만족스러운 결과를 찾아낸 시현의 표정이 슥 풀리더니 멀뚱하게 서 있던 태운의 등짝을 툭 쳤다.
“가자! 잃어버리지 말고 잘 따라와.”
그리고 곧바로 앞으로 보이는 건물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태운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 번에 건물 위로 뛰어올라 항상 하던 대로 바짝 따라붙었다. 그러자 제 기척을 느꼈는지 시현은 슬쩍 고개를 돌려 태운의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한번 발을 굴러 앞으로 향했다.
늘 뭐가 그리 불안한지 틈날 때마다 잘 따라오고 있나 확인하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다.
그때 앞서고 있는 시현의 체취가 섞인 바람이 쉼 없이 움직이는 제 뺨을 훑고 지나갔다. 태운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시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답답해.’
그동안 미움받기 싫다는 마음이 자꾸만 치솟는 충동질을 힘겹게 가라앉히고 있었지만 저렇게 신경 쓰지 못해 안달을 내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무척 목이 말랐다.
수년간 제가 봐 온 시현은 연을 끊어 내는 데에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그동안 달라붙었던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관계를 끊어 냈다. 그렇기에 더 천천히 그를 바꿔 놔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그 모든 다짐이 물에 탄 듯 흐려지고 있었다.
“스승님.”
“어, 왜.”
아마도 제가 가장 많이 내뱉은 단어가 아닐까 하는 지칭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에 기다렸다는 듯 돌아온 다정한 목소리도.
조금이나마 불안감이 가시는 것 같았다.
태운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 갑자기 왜 저렇게 웃고 난리야.’
시현은 갑작스러운 태운의 얼굴 공격에 당황스러움을 숨기듯 고개를 홱 돌리곤 더욱 다리에 힘을 주어 튀어 나갔다.
간혹 태운이 어느 순간부터 저렇게 웃을 때가 있었다. 뭔가 마냥 맑기만 한 표정은 또 아닌 미묘하게 마이너스적인 감정이 실린 것 같은 얼굴.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저럴 때마다 꼭 다른 사람 같다니까.’
솔직히 또 왜 저러나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제 저 애도 저만의 비밀을 둘 나이인데 눈치 없이 구는 것 같지 않은가. 물론 뭔가 멀어지는 것 같아 조금, 아주 조금 서운했지만 말이다.
앞으로 더욱 비밀이 많아질 거고 이제 자리를 잡으면 친구들도, 여자 친구도 생길 거다. 그러면 슬슬 제 곁에서 어리광을 부리지도 않을 거고 떨어져 있는 시간도 많아지겠지.
그러니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조금 멀어지더라도 평생 볼 수 있겠지.’
괜히 속이 멀미라도 하듯 울렁이는 것 같았다. 시현은 답답한 명치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
[갑작스럽게 개인 사정이 생겨 오늘 쉽니다. 자세한 공지는 SNS에서 확인해주세요.]
시현은 목표로 했던 가게 앞에 서서 조악하게 만들어진 안내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SNS라고?”
어쩐지 맛집이라고 줄이 너무 길어서 기다려야 된다고 했던 리뷰들에 비해 가는 길이 너무 한산하다 싶었다. 그런데 마침 휴무였을 줄이야.
여기가 요즘 애들이 자주 가는 곳이라고 해서 겨우 찾아온 건데 처음부터 계획이 좌초될 지경에 처하자 머리가 굳었다.
그렇다고 또 국밥 같은 걸 먹으러 가기는 그런데….
“스승님. 저건 뭡니까?”
그때 태운이 무언가를 가리키며 숨기지 않고 얼굴 위로 궁금함을 만들어 냈다. 시현의 시선도 저절로 태운의 손끝이 향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조명들, 뿅뿅대는 수십 개의 소리가 얽히며 새어 나오는 곳.
오락실이었다.
시현은 잠시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멍하니 정신없는 오락실 안을 빤히 바라보다 푸핫 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아, 아직 어리긴 하구나. 제일 먼저 물어본 게 오락실이라니.’
그동안 카페며 음식점이며 이곳저곳 많이도 봤는데 저 애가 먼저 궁금증을 드러낸 건 이게 처음이었다. 처음 보는 것들이 이렇게 널렸는데도 딱히 별 반응이 없어 조금 재미없었는데 갑자기 막 흥미가 솟아나고 있었다.
“가 볼래?”
태운은 그런 시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은 얌전하게 긍정적인 반응을 내보이는 걸 보면서 자꾸만 씰룩대는 입가를 내리누르느라 애써야 했다. 또 계속 웃어 대면 태운이가 삐질 수도 있으니까.
비록 야심 차게 선택했던 음식점에서 실패라는 고배를 마셨지만, 시현은 경쾌하게 발을 옮겨 대낮부터 어두컴컴하고 현란한 오락실 안으로 태운을 안내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예전부터 제가 제일 즐겼던 게임기 앞에 앉아서 동전을 몇 개 밀어 넣었다.
‘와 미친 한 판에 이게 얼마야. 나 때는 500원이면 됐는데.’
물론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에 조금 망설여졌지만, 신기하단 듯 조이스틱을 톡톡 쳐 대는 태운에 시현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이게 내가 옛날에부터 하던 건데, 그때도 좀 잘했던 거거든. 크흠. 이게 5판 3선승제인데, 내가 두 판은 깔아 줄 게 어때?”
“잘 모르겠지만 해 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럴까?”
시현은 태운의 대답에 잔뜩 신이 나서 옆에 있는 기계도 순식간에 세팅하고 열심히 조작법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태운이가 다 이해한 듯 보이자 이제는 태운이와 놀아 주러 왔다는 사실을 그새 망각하곤 저가 더 열심히 캐릭터를 둘러봤다.
“일단 라우랑, 라슨이랑….”
“이런 게 게임이라고 하는 건가 봅니다.”
“어? 어어. 맞아. 너 캐릭터 다 골랐어? 내가 골라 줄까?”
그러나 태운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순식간에 앞에 있던 조이스틱이 빠르게 움직여졌다. 양 뺨이 상기된 채 신나게 손을 움직이는 게 심상치 않았다. 태운은 그런 그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작게 미소를 지었다.
고작 이런 것들이 싸워 봤자 얼마나 움직일까, 회의감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스승님의 성에 차도록 몇 번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태운이 생각보다 너무 열심히 임해 버린 게 문제였을까. 그새 연달아 네 판을 져 버린 시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들대고 있었다. 태운은 그답지 않게 슬쩍 눈치를 보다가 조이스틱에서 손을 뗐다.
“아니! 떼지 마. 한 판 더 해.”
그러나 고개를 벌떡 들어 올린 시현이 단호하게 그것을 제지하며 미친 듯이 동전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마치 눈앞에 원수라도 둔 듯 게임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시 캐릭터를 고르기 시작했다.
‘이, 미친. 얘 왜 이렇게 잘해. 저거 처음 해 봤다는 거 뻥 아니야?’
물론 시현도 태운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고 당연히 그럴 리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이 상황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다시 한번 게임이 시작됐다.
시현의 캐릭터가 열심히 앞뒤로 움직이다가 주먹질하는 순간 가만히 있던 태운의 캐릭터가 단번에 손목을 잡고 하늘로 던져 올린 뒤 미친 듯이 콤보를 넣기 시작했다.
결국 손 놓은 채 그걸 보다가 떨어져 내리는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다시 한번 걸려들어 목이 꺾이는 캐릭터를 보며 시현은 버튼 위를 내려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했다.
1분도 되지 않아 화면 위로 K.O 표시가 떠오르고 다른 캐릭터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태운이 조작하던 캐릭터의 피 통은 처음 시작 그대로였다.
계속해서 게임이 이어졌다.
-CONTINUE? 9
“…그만하자.”
12대2. 아주 처절한 패배였다. 시현은 시간을 돌려 두 판을 깔아 주네 어쨌네 지껄였던 제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스승님. 화나셨습니까?”
“무, 뭐? 내가? 아아니?”
그리고 그런 제 눈치를 보는 듯한 태운의 태도에 다시 한번 자괴감을 느끼며 터덜터덜 오락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시현은 앞으로 피지컬로 하는 것에 잘난 척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기반성을 해야만 했다.
내 새끼지만 능력이 너무 사기야.
시현은 자랑스러운데 뭔가 얄미운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대충 아무거나 먹자 하고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오, 치킨.”
어디선가 고소한 튀김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바로 근처에 큰 치킨집이 있었다. 체인점은 아닌 것 같았지만 나름 테라스 같은 것도 있고 벌써 사람들도 꽤 있어 보이는 게 맛집인 것 같았다.
시현은 국밥이나 먹을까 했던 생각을 슥 지워 버리고 냅다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어서 오세! 헉,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들려오던 활기찬 인사말이 시현과 태운이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쪼그라들었다. 시현은 아차 싶은 마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발을 옮겨 결국 구석탱이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태운아, 너 이거 모자 써.”
“…스승님이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엥? 내가? 내가 왜?”
태운은 자리에 앉자마자 제가 쓰고 있던 모자를 넘겨주는 시현의 행동에 작게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는 예전에도 이랬던 것을 떠올리며 결국 작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