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시현은 태운이 모습을 감추자마자 폐허가 된 내부를 쭉 둘러보며 무거운 팔다리를 천천히 스트레칭했다. 그 와중에도 환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하, 빡세네.”
들어올 때도 해가 있었으니 최소 하루 이상은 지났을 테다. 시현은 이미 배터리가 다 되어 버린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서서 규민과 김성빈을 바닥에 나란히 눕혀 놓고 후처리하기 시작했다.
‘김성빈은 일단 기운을 막아 두고, 규민 씨는 기의 흐름을 잡아 주고….’
추궁과혈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이 정도의 상처는 흐름을 잡아 주기만 해도 금방 깨어날 테다. 시현은 그쯤에서 손을 거두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 부서지고 잔해만 남은 내부와 천장 틈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는 먼지들. 하릴없이 주변을 돌아보던 시현은 우뚝 서서 참고 참았던 한숨을 내뱉었다. 이곳엔 애초부터 뭣도 없긴 했지만 있어도 다 박살이 났겠다 싶었다.
그나마 기대를 걸어 볼 만한 건 태운이 좇던 이규환이겠지만 그조차도 확실친 않았다.
‘그래도 곧 태운이가 올 테니 마중이라도 나가 볼까.’
힘이 빠진 다리가 아주 살짝 후들거렸다. 시현은 잔뜩 미간을 찡그리며 제 몸뚱이를 내려 보다가 작게 욕설을 읊조리고 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스승님.”
그리고 결계가 깨진 후 드러난 문밖으로 나섰을 때. 바로 근처에서 태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운아!”
시현은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기척에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반가워하던 표정은 그의 손에 짐짝처럼 들린 이규환의 몸뚱이를 보고 조금 사라졌다.
“후우, 죽은 건 아니군.”
아무리 적이었다지만 규민의 형이었다. 시현은 급히 다가가 이규환의 상태를 확인하고 가늘게 붙어 있는 숨에 안도했다.
‘아무리 그래도 앞뒤 없이 냅다 죽여 버린다는 것은 좀 마음에 걸리니까.’
물론 저자가 심각하게 살수를 펼쳐서 죽었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제게는 어쨌든 태운이 우선이었기에 결론은 가차 없었다.
“스승님. 이자가 무언가를 언급하려다가 마치 금제에라도 당한 듯 발작을 했습니다.”
“뭐?”
그때 예상하지 못한 말이 태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현은 이규환의 눈꺼풀을 들어 올려 눈동자를 확인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동안 정보창이 제대로 안 보여 줘서 답답하긴 했지만 잘못된 정보를 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작 세뇌 같은 정보도 적혀 나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목숨을 빼앗을 정도의 상태 이상에 걸려 있었는데 표시가 되어 있지 않다? 도저히 짐작 가는 부분이 없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이 모든 상황이 답답했다. 해답을 찾아보고자 단서를 쫓으면 일이 풀리긴커녕 오히려 이상한 일이 중첩됐다. 이 모든 게, 마치 더 파고들면 너만 힘들게 될 거라는 경고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이걸 그대로 당하기만 한다? 내가?’
그럴 거면 시작도 안 했지.
그러나 의욕은 의욕이었고 단서도 여기에서 끊어져 버린 마당에 시원한 해결 방안이 떠오르지 않아 머리만 복잡해졌다. 시현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렇게 한참 시현이 혼란에 빠져 생각에 잠기려고 할 때 태운이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무언가를 천천히 내밀었다.
“음?”
슬쩍 상기되어 있는 볼과 빤히 응시해 오는 눈빛을 보아하니 수줍어하면서도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거… 이자를 추격하다가 찾았습니다. 비록 부서지기 직전이지만… 사이코메트리인가, 하는 걸 이용하면 무언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현은 눈을 크게 뜨고 태운과 유리 조각을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입을 벌리고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태운아!”
단서를 입수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여기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푸시식 식었던 참이었다. 그러나 타이밍 좋게 들이밀어진 선물 같은 단서에 시현은 화색을 띠었다.
“아, 이 기특한 자식! 역시 내 새끼야. 아이고 예뻐라!”
“그럼 안아 주세요.”
“어? 그래그래! 이리 와.”
그리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온 태운의 요구에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며 커다란 몸을 덥석 끌어안았다.
“잘했어, 잘했어.”
태운의 머리카락 위로 조금은 거친 손이 얹어지고 마구 비벼졌다.
당연히 가지런히 묶여 있던 머리카락은 엉망이 됐지만, 그의 어깨에 턱을 얹고 있던 태운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태운이를 잔뜩 칭찬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은 듯 열심히 움직이던 손이 덜컥 멈췄다. 그리고는 최근 늘 그랬던 것처럼 시현의 양손이 태운의 몸을 꾹 잡은 뒤 휙 떨어트렸다.
태운은 또다시 이어질 시현의 머뭇거림을 예상하고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색해하는 것도 절 신경 쓰는 게 티가 나 좋긴 했지만 이제 슬슬 모자란 듯한 느낌이 들어 가는 상태였다. 미움받는 건 싫었지만 그렇다고 자꾸 떨어져 지내는 것도 싫었다.
“너. 근데 왜 이렇게 말랐어?”
“…예?”
그러나 태운은 머릿속 상념을 싹 밀어 버리는 시현의 물음에 저도 모르게 바보같이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너 왜 이렇게 말랐냐고. 뼈밖에 안 남았는데?”
시현의 표정은 무척이나 심각했다. 그리고 그의 표정만큼 머릿속도 심각해져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태운이한테 뭘 제대로 못 먹인 것 같은데.’
뭐 삼시 세끼야 당연히 먹는 거지만 그딴 거 말고는 뭐 하나 제대로 배 터지게 먹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자꾸 일이 터져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한창 클 나이인 태운이었다.
그런 애한테 겨우 살 수 있을 정도로만 먹인 거다, 저는. 제가 20살 땐 밥도 먹고 간식으로 피자 라지 사이즈 한 판씩 먹고 그랬는데!
시현은 당장 눈앞에 산적해 있는 일들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이 일을 마무리하자마자 애한테 뭐부터 좀 먹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으음, 스승님 저는 괜찮….”
“아니! 안 괜찮아! 이곳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하, 기다려.”
태운은 예상치 못하게 튀어 나가던 상황에 잠시 당황했지만 계속 제 팔이나 허리를 주물럭거리며 가죽밖에 안 남았다 중얼거리는 시현을 부드럽게 바라봤다.
“예, 기다릴게요.”
“응, 나가자마자 치킨 먹자.”
“큽, 좋아요.”
결국 태운은 작게 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한 손에 잡고 있던 이규환을 허공에 띄우고 양손을 벌려 시현을 안았다.
“…치킨이 그렇게 먹고 싶었어…?”
“큭큭. 예. 예전에도 몇 주야를 내내 그 ‘치킨’이란 걸 먹고 싶다 노래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에이 씨, 무림에서 지내면서 주야장천 노래 불렀던 것 중 하나가 치킨이었는데 다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창피했지만 진작 좀 시켜서 먹여 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시현은 간헐적으로 픽픽 웃어 대는 태운의 등짝을 쓱쓱 쓰다듬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시현은 아까 태운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아직 기절해 있는 규민의 혈도를 짚었다.
‘저와 스승님이 ’그들’이라는 단체와 접선하길 원하지 않는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들이라.
그렇다면 지금 이규환이 속해 있던 빌런 연합과는 다르단 뜻인 걸까. 아니면 한 그룹 내에서 의견이 부딪히고 있는 경쟁 사이라는 걸까.
어감을 들으면 또 다른 제삼자의 그룹 같았지만, 지금은 그 무엇도 단정 지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하나는 풀렸네.’
처음엔 별생각 없이 이놈들을 잡아서 배상금이나 탈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를 중심으로 무언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안 이상 이제는 모른 척 넘길 수 없었다. 벌써 작든 크든 주변인들에게 피해가 생기고 있었다.
‘그래. 너희가 그렇게 원한다면, 제대로 파헤쳐 줄게.’
“으음….”
“규민 씨, 정신이 좀 들어요?”
“어, 혀… 형님. 쿨럭.”
“아, 일어나지 마요. 갈비뼈 부러졌으니까.”
시현은 훈혈을 자극하고 나서야 규민이 천천히 눈을 뜨자 생각을 멈추고 그의 눈앞에서 손을 몇 번 흔들었다.
“하아. 저희, 형은….”
“아.”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이규환의 상태를 물어 오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그가 기절해 있던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렇게 돼, 우으. 됐군요. 크흑.”
규민은 애써 울컥하는 걸 참아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결국 새어 나오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그동안 제가 알고 있던 형이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배신감과 함께 느껴지는, 아직도 그럴 리가 없을 거라는 믿음에 자괴감이 들었다.
시현은 그런 규민의 모습을 보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머리를 헝클었다. 위로는 딱히 할 줄 몰랐지만 저렇게 머리를 감싸고 훌쩍거리는 걸 그냥 두고만 보기는 힘들었다.
“규민 씨, 제 판단이 틀렸어요. 당신 형 세뇌 걸린 게 맞는 것 같더군요. 무언가 금제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크흡. 저, 정말요?”
“네, 정말이요.”
그러나 시현이 눈물을 그치라는 마음으로 한 이야기는 규민을 결국 아이처럼 엉엉 울게 했다.
“흐어엉. 다행, 다행이에요.”
“어휴….”
이규환이 자발적으로 저지른 짓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는지 펑펑 우는 모습을 보며 시현은 작게 혀를 찼다. 그래도 애써 괜찮은 척하면서 떨리는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꼴을 보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고마워요, 형님.”
“됐어요.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뭘.”
정말로 자신은 무엇 하나 막지도 못했고 알아내지도 못했다. 이 와중에 감사 인사라니. 입맛이 씁쓸했다.
“스승님. 지금 능력자 5명이 빠른 속도로 접근 중입니다.”
“어? 아.”
그때 태운이 한발 먼저 다가오는 이들을 알아채고 조용히 속삭였다. 시현은 이제 한 줌의 내력만 남아 버린 텅 빈 단전을 느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화려하게 박살을 내 놨는데 이제야 오는 게 이상한 건가. 하아.
다행히 진이 깨지며 그 이상한 환상 같던 것들도 사라졌고 이 지하 공간과 몇 개의 방뿐이 안 남긴 했지만 사실 이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한 상황이었다.
십여 명의 기절한 사람들과 박살 난 건물, 게다가 거의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인 이규환까지. 이걸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엄두가 안 나 속이 답답해졌다.
‘다짜고짜 공격부터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형님, 먼저 돌아가세요…. 여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나 그 고민은 옆에서 들려온 규민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 혼자 대체 어쩌려고요?”
“하하… 괜찮아요. 아마 저희 집에 고용된, 쿨럭. 보안 업체일 겁니다. 어차피 이 집에 널리고 널린 게 미확인 게이트 아이템인데… 잘못 만져서 터졌다고 하죠. 뭐… 후우.”
“그게 통하겠냐고요… 하아.”
그새 조금 기운이 돌아온 건지 규민이 평소처럼 담담히 말하려 노력하자 시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헤헤, 가세요 형님. 일 마무리되면 연락드릴게요.”
어차피 제가 있어 봤자 도움이 안 된다는 건 잘 알았다. 그러나 이 상황을 그대로 놔둔 채 돌아간다는 게 내키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저들의 기운은 내공이 쫙 빠져나간 시현의 기감에도 걸려들 정도로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무슨 일 생기면 무조건 바로 연락해요.”
“그럴게요.”
시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느릿하게 옆에 있는 바윗덩이에 몸을 기대는 규민을 보고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