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하아, 하아…. 어디서 저런 놈들이.”
이규환은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핏물을 억지로 삼키고 방금까지 느꼈던 본능적인 공포에 몸서리를 치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제가 뭘 하기도 전에 쥐어 잡힌 목덜미, 사지를 옥죄던 서늘하고 광포한 힘. 그리고 그중 가장 최악이었던 것은 붉은 눈과 마주치는 순간 피부 아래로 흐르던 힘이 동결되는 그 느낌이었다.
그 순간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으득.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마치 이 힘을 알기 전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 시절의 자신으로 되돌려 버리는 듯한 경험에 차츰 분노가 차올랐다.
“설마 그들이 알고 접근했던 건가. 감히….”
만약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둘 수는 없지.
이규환은 급히 본 단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제가 머물던 방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주연이를 풀어 주고 규민이를 도와준 조력자를 오게끔 유도한 것은 내 계산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조력자가 정시현이었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름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규민의 주변을 맴도는 쓰레기들은 늘 차고 넘쳤고 그에 대한 보고는 늘 올라왔으니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자의 과거를 봐도 주변을 봐도 뭐 하나 특출날 만한 사항은 없었다. 3년간 실종되어 있다가 헌터가 됐다는 특이 사항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고작 C등급의 폐급 헌터일 뿐이었다.
“그래서 잠시 제쳐 뒀던 것이었건만….”
이규환은 가체에서 벗어난 충격으로 후들대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면서도 제 판단 오류였던 정시현과 그의 곁에 있던 정체불명의 인물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예상 등급 A 이상, 둘 다 근접 딜러 계열, 정신 방벽 높음….’
콰아앙!
그러나 그때 어딘가 크게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제 눈앞에 있는 복도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젠장, 설마 게이트까지 박살 낸 건가?
이제는 손마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저들의 무력은 정말 이 상황을 반전시킬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또한 저들이 잠깐이나마 보인 성향상 제게 큰 위협이 될 확률도 무척 높았다.
이대로 우리의 대업을 망치게 둘 순 없었다.
“당장, 당장 알려야 해.”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그러나 아직 목적지까진 꽤 거리가 남아 있었다. 처음 이곳을 설계할 때 제 자리는 제단과 멀어야 한다고 했던 게 후회가 됐다.
“크윽, 흐으.”
이규환은 잘 움직이지 않던 몸을 이끌고 끝끝내 목표했던 곳에 도달했다. 그리고 조금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중얼대기 시작했다.
스아아아-
분명 아무것도 없는 막다른 곳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문 하나가 거짓말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록 형태는 반쯤 뭉개져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문은 문이었다. 이규환은 망설임 없이 구겨진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원래 있어야 했었던 장소인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 아래, 또는 그 옆에 자물쇠로 잠긴 서랍. 그의 손이 분주하게 주변 집기를 들췄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 봐도 이규환이 원하는 물건은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씨발! 대체 어딨는 거야! 분명 제자리에 두라고 했건만! 절대 그들과 조우하게 둘 순 없, 컥!”
“네가 말한 그들이 누구지?”
“너, 너는”
또였다. 아까의 그 기분이 피부를 타고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규환은 저를 덮치는 공포감을 털어 내고자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의 목줄기를 틀어쥐고 있는 하얀 손은 일말의 미동도 없이 가만히 그를 옭아매는 중이었다.
‘아, 아직 신의 힘이….’
그래도 제게는 아직 신의 힘이 남아 있었다. 비록 잠시간의 시간밖에 못 벌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로 생각했다. 이규환은 숨이 막혀 오는 와중에도 수작을 부리기 위해 입을 뻐끔댔다.
“물어볼 게 많으니까.”
낮게 깔린 허스키한 목소리가 무형의 힘을 가지고 이규환의 귓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가만히 있어. 실수로 목을 꺾어 버리기 전에.”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규환은 전지전능한 신의 힘이라고 믿던 것에 배신당하고 말았다.
***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에서 붉은빛이 흐릿하게 피어 나왔다.
금방 잡을 줄 알았던 남자의 행방이 이상하게 일그러지고 있는 통로에 가려지고 있었다. 태운은 고운 미간을 미세하게 찡그리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태운아, 잡아 와. 부탁해.’
내공이 다 소진된 스승님이 제 손을 잡고 한 부탁이었다. 그를 홀로 두고 나오고 싶지 않았지만 제 몸은 마치 당연하단 듯 공동의 밖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씨발.”
신의 광산이란 것을 들어갔다 나오면 모든 일이 자리를 잡을 거로 생각했다. 스승님을 찾아냈고 이젠 제 손에서 놓아줄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일련의 상황들이 제가 손을 쓰기도 전에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이어졌다. 게다가 제게도 일어난 치명적인 문제까지. 아무 의미 없는 그런 것들 그냥 다 소멸시키고 그냥 둘만 있으면 안 되는 건가 순간 분노가 치솟았다.
동시에 그의 심리에 영향을 받은 내기도 플레어가 터지듯 허공으로 울컥하고 튕겨 나와 지면을 거칠게 훑고 사라졌다.
‘이러다간 보자마자 죽여 버리겠군.’
태운은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이규환을 보자마자 화풀이로 팔이라도 뽑아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일그러진 벽이 슬슬 펴지며 수없이 이어져 있던 자잘한 길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아 있는 곧게 뻗은 길의 저 끝에 흐릿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이규환이었다. 그는 처음에 보여 주던 자신만만함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비루한 모습이었다.
발발 떨리는 다리와 땀에 전 목덜미, 헝클어진 머리카락, 모두 짙은 패색을 보이고 있었다.
“도망친 게 고작 여기인가.”
태운은 경공을 사용하던 걸 멈추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이규환이 멈춰 서더니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문 같은 것이 나타나자 태운의 눈 안으로 이채가 빛났다 사라졌다. 순간 제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분노가 사라지고 어쩌면 괜찮은 걸 찾아낼 수 있겠다는 기대가 불쑥 자리를 차지했다.
“이건….”
내가 게이트를 연결한 방식과 비슷하군.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정확히는 5할 비슷합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사용하는 방식은 비록 조악하나 어떠한 도움을 받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물어볼 것이 하나가 더 늘었다. 태운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발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만약 그들이 만들어 낸 놈들이 아니라면, 허억….”
“그들?”
태운은 그가 대체 어디까지 원맨쇼를 할지 입구 쪽 벽에 삐딱하게 서서 구경하고 있다가 제 흥미를 돋우는 단어에 땅을 박찼다. 그리고는 단번에 이규환의 목줄기를 틀어쥐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1초 주지. 당장 그들에 대해 말해.”
“커헉…! 커흑, 목, 목을 놔, 줘야!”
“아 저런.”
손아귀 안으로 느껴지는 맥동을 느끼며 이규환을 바라보던 태운은 제 손을 긁어 대며 괴로워하는 그의 발버둥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말로 하지 말고 글로 써라. 언제 그 좆같은 짓거리를 할지 모르니.”
그러자 이규환은 마치 제 속이 읽힌 듯한 불안감에 눈을 부릅떴다가 손을 바르르 떨어 댔다.
태운은 그의 반응에서 이자들은 직접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그 능력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읽어 냈다.
‘다음부터 일단 입부터 조지고 시작하면 되겠군.’
그리고 제 눈빛에 담긴 의도를 읽었는지 금방이라도 사실을 털어놓을 것처럼 결국 몸에 힘을 쭉 빼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운은 그런 이규환의 모습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이내 작게 무언가를 흥얼거리며 테이블 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모, 목은… 크흑.”
“아.”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규환이 계속해서 고통을 호소하자 태운은 책상 위를 뒤지던 손을 거두고 아혈이 있는 곳에 손끝을 댔다.
점혈하기 위해 미약하게 내공을 흘리는 순간이었다.
얌전하게 제 처지를 받아들이고 알고 있는 사실을 토해 내려고 하는 낌새를 보이던 그가 전신을 미친 듯이 떨면서 숨을 꺽꺽 내뱉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약에 걸린 이가 보이는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젠장.”
평화로워 빠진 이곳에 왔다고 그새 생각이 물러져 버린 건가.
금제라면 자신도 꽤나 많이 사용해 본 것이었다. 물론 어떠한 흔적도 없었기에 긴가민가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런 가능성 자체를 지워 버린 제 사고방식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 그륵. 켁. 사, 살려”
“내가 너무 풀어졌군.”
이렇게 그냥 두었다가는 금방 목숨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태운은 어쩔 수 없이 뇌로 통하는 혈도를 거의 다 막아 내고 나서야 잦아드는 발작에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아무리 은밀하게 조처를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운이 오갔던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태운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게다가 스승님께서도 이자는 세뇌에 걸렸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금제를 걸어 놓은 거지?’
태운은 쫓으면 쫓을수록 미궁으로 빠지는 이들의 정체에 미간을 미세하게 찡그렸다.
결국 원래 알아내야 했던 제 능력이 갑자기 동결되는 현상이라든가 저자가 입에 담은 ‘그들’의 정체까지, 하나도 알아낸 게 없었다.
콰직.
태운은 상황이 제 예상과는 다르게 자꾸 꼬여만 가자, 답답한 속을 풀어내듯 고급스럽게 벽지까지 발라 놓은 벽을 거칠게 뜯어냈다. 그러자 이제는 평범해진 콘크리트 벽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쩌적대며 가느다란 금을 만들어 냈다.
‘그나저나 이걸 스승님께 어찌 말한단 말인가.’
분명 평소처럼 티를 안 내려고 하실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스쳐 지나가듯 보일 실망 어린 눈빛을 제가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순간 상상만 해도 피가 싹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더럽게 타고 올라왔다.
“안 돼.”
콰앙!
태운은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이규환을 저 멀리 밀어 두고 화풀이하듯 모여 있는 집기들을 박살 냈다. 손 전체가 붉은 내기로 감싸져 마치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잔해 안쪽에 수상한 것이 탐지됩니다.]
그때 머릿속으로 감정 한 톨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운은 곧바로 발을 옮겨 조각난 잔해들을 손으로 내저어 단번에 흐트러트렸다.
그제야 정말 실낱같은 낯선 기운이 태운에게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알아채질 못할 정도로 옅은 기운이었다.
유리 조각?
미세한 실금이 전체적으로 번져 있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보이는 유리 조각이었다. 잔해를 치우자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상 정도 9할. 충격을 가할 시 완전히 소멸합니다. 취급에 주의를 요합니다.]
태운은 평범한 유리 조각처럼만 보이는 물건을 눈앞에 두고 피식 웃음 소릴 내뱉었다.
“아주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군.”
제가 놓칠 뻔했던 제법 중요한 단서를 감지하다니. 태운은 그동안 틈만 나면 쓸모없는 물건 취급 하던 태도를 단번에 거두어들였다.
[저는 쓸모가 많습니다. 단지 에너지가 대부분 고갈되어서.]
“출처는?”
[…저것 하나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것에 남은 마력을 가진 자가 나타나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쯧.”
벽이 반쯤 뜯어지고 온갖 집기가 박살이 난 고요한 공간에 언짢음을 가득 담은 혀 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그래도 체면치레는 할 수 있겠군.”
태운은 유리 조각을 조심히 주워 들고 구석에 처박혀 벌써 먼지에 덮이고 있는 이규환을 대충 주워 들었다. 그리고 오매불망 저를 기다리고 있을 스승님이 계실 곳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