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찾아야 할 것은 다 찾았다.
비록 큰 부상을 몇 개 달고 있었지만, 규민은 아직 무사했고 이제는 왜 이 지랄을 하고 있는지 주동자를 잡아 와 물을 차례였다.
스아아아.
손아귀에 들려 있던 골프채가 다시 한번 느릿하게 휘둘러졌다. 목표는 눈앞에 보이는 복도의 끝이었다.
“이, 이게….”
복도 끝.
분명 벽으로 가려져 있던 막다른 부분이었건만 이제는 마치 종이처럼 찢겨 나가 계단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들이 어딜 헤매고 있었는지 깨달은 이규민과 김성빈은 허탈하단 듯 한숨을 내뱉었다.
“이래서 계속 같은 곳을 도는 것 같았구나….”
시현은 자신도 처음엔 헤맸다며 짧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해 주곤 다시 발을 옮겼다.
뭐 계단을 타고 나서 다른 층에 도착한다고 해도 계속 헤매는 건 똑같았으니 딱히 할 말도 없긴 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진짜 우리 형이 한 게 맞는 걸까요? 믿을 수가 없어요….”
그때 규민이 침묵을 가르고 작게 읊조렸다. 목소리에서 침통함이 느껴졌다.
“원래는 어땠는데요?”
규민은 시현의 물음에 침울한 얼굴을 하며 말을 이었다.
원래 이규환은 무척이나 기업 운영과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지금 이 LK 기업을 설립하기 전에도 집안은 나름 커다란 기업체를 하나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첫째인 규환이 도맡기로 잠정 결정 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그러나 규환은 그때도 자신은 여행이나 하고 싶다며 규민에게 떠맡기고싶다 실없이 말장난을 하던 이였다.
“형은 사진 찍는 걸 진짜 좋아했거든요. 특히 자연 풍경과 동물을 많이 찍었었어요.”
규민은 안타깝다는 말투로 내뱉었다.
그리고 더 이어진 말에서도 이규환은 지금 이렇게 욕심에 차서 제 형제들을 권력의 적으로 생각할 이는 아니라는 내용을 늘어놨다.
시현은 개연성 없어 보이는 규환의 변화에 침음을 흘렸다.
아무리 세상이 게이트로 인해 뒤집혔다지만 사람들 성격까지 단번에 뒤집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본성이 튀어나오는 건 제외였지만 규민이 말하는 그의 과거를 보면 아무래도 그가 자발적으로 이런 짓을 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규환도 세뇌당했을 가능성이 큰가….’
시현은 그제야 규민에게 글로리 길드원들과 있었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세뇌…요?”
“일단 가능성뿐이지만 그래요.”
“그렇군요….”
잔뜩 우울하게 처져 있던 규민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펴지는 것 같았다.
규민은 차라리 형이 그런 세뇌 같은 것에 걸려 움직였기를 바라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자발적으로 한 것과 당한 것은 입장이 매우 달랐으니 말이다.
시현은 조금이나마 마음을 다스린 듯한 규민을 보다가 일단 이규환을 만나면 제압하는 손속에 자비를 좀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쭉 뻗어진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아니, 그건 그렇고 이젠 복도야?”
짜증 나게 하네, 진짜 하.
일행은 아까의 전투가 있고 난 뒤 꽤 오랜 시간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좁고 긴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비싸 보이는 카펫과 창문은 없었지만, 그 자리마다 걸린 명화들까지.
그러나 그것들도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오면 지겨울 뿐이었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해…?”
막다른 길 없이 똑같이 쭉 이어진 길을 걷던 시현은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파훼할 수 있을 만한 지점을 체크했다.
자꾸 무언가 기운이 느껴지긴 했지만 마치 유령처럼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고 있었기에 그마저도 흐릿해서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떡하죠…?”
“어떡하긴, 뭐 방법이 있나요. 다 부숴야지.”
여태 진을 잘못 건드리면 좆 될까 봐 열심히 파훼하고 풀어내는 쪽으로 움직였던 거였다. 그러나 아까 있었던 몇 번의 충격에도 별문제 없기도 했고, 아무래도 이제는 더 시간을 끌어선 안 될 것 같았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진이, 아니 결계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강한 힘으로 단번에 박살 내는 것.
‘그래, 안 그래도 들어올 때 확인한 이름이랑 내부에서 확인한 이름이 달랐지.’
이름이 다르다는 건 제가 캐치하지 못한 다른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단서다. 시현은 다시 성안을 발동시키며 내부를 휙 둘러보았다.
[인멸의 덫(-)-재생 불가]
“음?”
“왜요?”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시현은 바뀌어 버린 상태창에 급하게 꺼 놨던 알림창을 눈앞으로 끌어 올렸다.
[내공이 2 올라갑니다.]
[천마신공(ss)의 숙련도가 올라갑니다.]
[근력이 1 올라갑니다.]
[성안(-)의 레벨이 1 올라갑니다.
그동안 불필요해서 꺼 놓고 신경도 안 쓰고 있었던 알림창이 성안의 경지가 올라갔다는 걸 아주 선명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시현의 얼굴 위에 화색이 돌았다.
비록 뭐 대단한 게 바뀌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 빌어먹을 흰색 네모가 조금이나마 없어졌다는 거에도 숨통이 트였다.
“태운아, 이 진법 깨야겠다.”
시현은 한쪽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면서 태운의 어깨 위로 손을 턱 올렸다.
재생 불가라는 건 공격을 받으면 깨질 수도 있단 뜻이었고, 또한 기운을 빨아들이며 자체 수복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시현의 의심에 확신이 서는 순간이었다.
“제가 가장 자신 있는 일입니다.”
태운은 시현의 달라진 기세에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맨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제 어깨에 올려진 시현의 손을 붙잡고는 뺨에 가까이 대어 보다가 고개를 돌려 손안으로 입술을 묻었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던 시현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규민과 김성빈이 있는 곳으로 고개가 돌아갈 때쯤엔 목에서 끼긱대는 녹슨 기계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연태운….”
시현은 그새 고개를 돌려 저들끼리 어색하게 대화하고 있는 둘을 보며 화끈거리는 손을 억지로 빼내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태운아. 라고 해 주셔야죠.”
그러나 돌아온 대답에 결국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태운은 그런 그의 소리 없는 절규를 바라보다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이번에 진짜 내기를 손끝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스아아아.
마치 손끝에 작은 소용돌이가 맺히는 것 같았다. 검붉은 내기가 주변의 공기까지 빨아들이며 무척 위험하게 울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형태가 없는 강기의 덩어리가 점점 검의 모양을 갖추자 날 끝으로 섬광 같은 예기가 서리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잠시 뒤로 물러나시지요.”
그 와중에도 태운은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로 시현을 향해 말을 건넸다.
‘진짜 어마어마하구나.’
시현은 태운의 다정한 목소리에 아무렇지 않게 일행들을 뒤로 물리고 제 앞에 기막을 씌웠다. 그러나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기의 흐름에 식은땀이 멈추지 않았다.
자신도 원래 세계로 돌아오면서 천마신공을 익히게 됐지만, 저 아이가 다루는 강기는 같은 천마신공임에도 더욱 광포했다.
그전에는 그저 무공의 성질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비추는 속성은 시전자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아 보였다.
후웅-
그 순간 휘몰아치던 기운이 마치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듯 조용하게 멈추어 섰다.
그그극.
그리고 태운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2층 복도라고 생각되던 공간이 마치 캔 찌그러지듯 우글우글해지기 시작했다.
“그만.”
시현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나타난 기척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저와 비슷할 것 같은 체형에 슈트를 빼입고 있는 남자가 여유로운 얼굴로 태운 앞에 서 있었다.
“…이규환.”
“형!!”
이규민 또한 그를 발견했는지 마치 절규하는 듯, 애원하는 듯 못 박힌 양 서서 그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태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서서히 노기가 차올랐다.
“그만하라 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눈치를 챘군요. 대체 어떻게 아셨을까, 정시현 씨는.”
“하.”
그 와중에도 태운은 멈추지 않았다. 제가 왜 스승님도 아닌 이의 명령을 받아 움직여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스승님의 이름을 들먹여?
그는 작게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리고는 시선을 다시 허공으로 돌렸다.
그리고 마치 당장 핏물처럼 흐를 것 같은 검붉은 강기가 거침없이 결계를 향해 휘둘러졌다.
크그그긍! 쿵! 쿠웅!
무언가 강하게 터져 나가는 소리는 없었지만 마치 정교한 기계 장치의 조립이 거대한 칼날에 의해 베어지고 어긋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울림이었다.
‘큭, 젠장….’
미미한 울림에도 불구하고 곧 땅과 벽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요동치는 바닥을 타고 제 뒤에 있던 이들이 미끄러지고 넘어졌다.
“으아아악! 형님!”
시현은 이미 저쪽으로 굴러간 규민과 성빈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이미 허상이 벗겨져 거친 돌의 질감을 내보이는 곳에 발을 한번 딛고 멀쩡한 부분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아이, 미친. 진 하나 깨지는데 뭐 이렇게까지 난리야!”
시현은 작게 시근덕댔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태운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마저 남은 일행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어?”
그리고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끝과 끝에 머물러 있었던 규환과 규민이 부쩍 가까워진 게 눈에 들어왔다.
규민은 어떻게든 규환이 제정신을 차리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가 외치는 말이 반듯하게 깎아져 있는 네모난 동공을 울리며 사라졌다.
“형! 나야! 규민이! 형, 정신 차려 봐 좀!”
“규민이?”
규환은 규민을 보며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걱정하는 말투로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거야. 늘 말썽을 피우더니 지금까지 그러는 거냐. 여긴 위험하니 돌아가라.”
“형…? 어, 세뇌당한 거! 괜, 괜찮아진 거야?”
점점 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시현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멍하니 있다가 규환의 손안에 무언가 빛나는 형체를 보고 급히 입을 열었다.
“규민 씨, 안 돼요! 그 사람 세뇌 안 당했다고!”
“에? 그게 무슨.”
푹.
그러나 시현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결국 규환의 단검이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고 날아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