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하아….”
대강의 자초지종을 들은 시현은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하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너무 바보 같았다. 자신과 태운의 능력이 어떤지 알면서도 오지 말라고 말을 남겼다는 어리석음에 절로 얼굴이 찌그러졌다.
그리고 시현은 그런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주연 씨도 지금 상태 유지 시간 얼마 없잖습니까. 그냥 제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세요. 그게 빨라요.”
“흐윽. 아, 알겠어요. 저희 오빠 부탁, 부탁드려요.”
입맛이 씁쓸했다. 시현은 최대한 정상적으로, 그러니까 적당히 회사에 다니며 태운이를 완벽히 정착시킨 뒤 가능하다면 가정도 만들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과는 아주 정반대의 극으로 향하고있는 일상에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물론 어차피 이런 상황이라면 제게 피해를 주고 있는 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생각도 함께이기도 했다.
“그래서 거기가 어디라고요?”
“후우… 저희 본집이에요.”
시현은 예상외의 장소에 잠시 멈칫했다가 아무렴 어떠냐 싶어 금방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뭐가 됐든 어디가 됐든 그냥 쳐들어가서 규민을 구해 내고 그 새끼들을 족쳐서 대체 왜 이렇게 쫓아다니는지 물어보기만 하면 됐다.
“일단 주연 씨를 어디 좋은 곳에 데려다줄 여유는 없으니 이쪽에 진을 만들어 주겠습니다. 뭐, 결계 같은 거예요.”
결계보단 조금 예민하긴 하지만 내부 지형지물을 마음대로 건들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특히 주연의 성격을 고려하면 걱정은 없었다.
때마침 시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태운이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돌멩이 몇 개가 불규칙적으로 흩뿌려졌다. 물론 겉보기에만 불규칙한 것이었고 다 정확한 위치에 떨어져 내린 것이지만.
시현은 빼놓지 않고 태운의 솔선수범에 대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그리고 곧바로 핸드폰으로 집이라고 하는 곳의 주소를 입력했다.
‘택시로 20분. 그럼 5분 조금 더 걸리려나.’
“혹시 모르니까 절대 주변에 어떤 것도 건들지 마세요. 그리고 건물을 빠져나오지도 마시고요.”
“가, 감사합니다….”
시현은 하도 피를 쏟아 낸 탓인지 허옇게 뜬 채 발발 떨고 있는 주연을 바라보다가 작게 혀를 차고 몸을 돌렸다.
딱히 위로에는 재능이 없었고 여기서 뭉개고 있을 바에 빨리 가서 규민을 구해다 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확히 7분여가 지난 시각.
시현과 태운은 예상과 딱 떨어지게 목적지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멍하니 집이라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저게 무슨 집이야. 저건, 게이트잖아.’
누가 봐도 권력자가 살 것 같은 2층집 위로 게이트의 형상이 옅게 떠올라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기존의 게이트와는 달리 무척이나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는 것과 조금 흐릿하다는 것뿐이었다.
출발했을 때만 해도 딱히 별생각 없었다. 그냥 구하고 족친다 두 개뿐이었는데 도착해서 눈에 담은 집은 반쯤 게이트화가 되어 있었고, 또한 예의 그 기운을 풍기고 있어 처음의 목적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성안.’
[□□제단(-)]
제단?
시현은 이름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에 괜히 봤다고 생각하며 대충 알림창을 내려 버렸다.
그리고 안으로 진입하려는 발걸음을 서둘러 높다랗게 쌓인 담장을 넘어섰다.
넓은 마당을 가진 이층집은 선과 면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무척이나 모던한 모양새였다. 사방이 통유리로 되어 있다 보니 내부가 다 들여다보여 너무 딱딱해 보이지 않게 신경을 쓴 태가 나는 집이었다.
물론 지금 시현의 눈에는 의뭉스러움만 풍기고 있었지만 말이다.
“사람도 없고, 아무런 소리도 안 나고… 흐음….”
그렇다고 계속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순 없으니 들어가긴 해야겠지만 척 봐도 저 위험해 보이는 곳에 태운이를 끌고 들어가야 한다는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가실까요? 스승님?”
물론 태운이가 쉽게 위험에 빠질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렇지만 늘 시현은 태운이를 볼 때마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숨기기 어려웠다.
시현은 태운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번엔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태운이 평소와 달리 말 한마디만 남기고 훌쩍 담벼락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시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한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어어!!”
시현은 겁도 없이 앞장서는 태운의 모습에 기겁하곤 언제 망설였냐는 듯 급히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연태운… 자꾸 그럴래?”
“성 붙여서 부르지 마십시오.”
“아니! 그래, 태운아.”
사실 막상 들어온 집 안은 밖에서 느꼈던 것과는 다르게 다행히도 아무 일 없이 평범했다.
물론 인테리어 자체는 평범하지 않았지만.
층고는 높고 공간은 쓸데없이 넓었다. 딱 봐도 진짜 비싸겠다 싶은 특이한 장식품들과 그림들이 사방에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고 또한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시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대한 물건들에서 떨어져 걸으며 아까 미처 다 하지 못한 잔소리에 시동을 거는 중이었다.
“요즘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너무 위험하게 군다는 생각이 들지 않니?”
최대한 너그러워 보이는 얼굴을 꾸며 낸 시현은 경련이 일 정도로 싱긋 미소를 지으며 차근하게 말을 건넸다.
“그렇지 않으면 스승님은 저를 두고 가실 거 아닙니까.”
“…아니, 아닐걸…?”
“참, 여전히 거짓말 못하십니다.”
칫. 애가 크더니 눈치만 늘었다.
시현은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으며 제 옆에서 터벅터벅 발을 옮기는 태운의 등짝을 짝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그게, 네가 너무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냐.”
“저도 당신이 걱정됩니다.”
순간 등짝을 퍽퍽 때려 대던 손에 힘이 쭉 빠졌다.
화끈거리는 손을 얌전히 내려놓은 시현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모른 척 입을 다물고 눈앞에 보이는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제가 걱정하는 만큼 태운이도 저를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일방적으로 퍼 주기만 하는 관계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예전에도 그랬고 위험한 일에 앞장서는 것은 어른으로서 양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건 태운이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바뀌지 않는 것이었다.
시현은 말없이 제 눈앞에 떠올라 있는 상태창을 한번 보며 계단의 중간쯤에 멈추어 섰다.
[인멸의 덫(-)-ㅁㅁㅁㅁ]
이름부터 아주 재수가 없어 보였다. 시현은 딱 봐도 흉악해 보이는 이름을 보다가 작게 혀를 차고선 빠르게 입을 열었다.
“하여튼 이제부터 떨어지지 말고 꼭 뒤에 붙어서 따라와. 알았지?”
“알겠습니다. 스승님.”
“대답은 잘하지.”
태운은 뭐가 기분이 좋았는지 해사한 미소를 걸고는 슬금슬금 팔을 두르며 안겨 왔다. 순간 눈앞에 빨간색 태양이라도 뜬 것 같았다.
시현은 태운이 알았다면 죄다 베어 없애 버리고 싶어 했을 과도한 책임감을 더욱 차곡차곡 쌓으며 천천히 위로 보이는 2층으로 발을 옮겼다.
후와악-
그것은 물렁물렁하고 뜨끈한 무언가를 억지로 뚫고 들어가는 듯한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리고 통과를 하고 나서도 마치 찐득한 액체 같은 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시현은 피부를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불쾌감에 인상을 찡그렸다.
내부는 중력이 조금 강해지기라도 한 듯 공기가 눅눅하고 몸이 축 처지는 기분이었지만 대충 예상은 했던지라 놀랍지 않았다.
괜히 한번 팔뚝을 쓱쓱 쓸어내린 시현은 앞장서서 걸으며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거실을 둘러봤다.
먼저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커다란 가죽 소파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테이블, 그리고 벽 한쪽을 다 차지하고 있는 스피커가 눈 안 가득 들어왔다.
그 외에도 초록빛의 풀들과 자잘한 장식들이 구석구석 자리하고 있었지만 딱히 쓰임새를 알 수 없어 기억에 남는 정도는 아니었다.
“오.”
그때 저 구석에 아주 반가운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골프채네?”
시현은 곧바로 그곳으로 다가가 백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골프채 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휘어 보다가 허공에 몇 번 휘둘렀다.
비록 손잡이가 검보단 가늘어 그립감이 좋진 않았지만, 적당히 탄성이 있고 단단했다.
시현은 씩 웃으며 골프채 몇 개를 더 꺼내 옆구리에 검을 차듯 쑤셔 넣었다. 겉보기엔 조금은 추레해 보였지만 무기가 없어 불리한 상태로 전투에 임하는 것보단 나았다.
“이건… 금속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 아니야. 금속은 맞아.”
그때 조용히 시현의 뒤를 따르던 태운이 드물게 먼저 골프채에 관심을 가져왔다. 생각해 보니 태운이는 재회를 한 뒤에 계속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게이트 안에서는 제가 선물해 줬던 적운검을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쪽으로 넘어오면서 아이템까진 가지고 오지 못한 듯 보였다.
“신기합니다. 한철이라기엔 강도는 약한데 탄성은 뛰어난 것 같습니다.”
“어, 그게 티타늄이라고…. 음, 네가 있던 곳에서는 없던 거긴 하지.”
애초에 무기가 없다고 전투를 못 할 정도의 경지는 아닌지라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뭐, 무기는 아니지만 새로운 금속류에 관심을 가지는 걸 보니 빨리 일을 해결하고 새로운 무기를 사 주고 싶단 생각이 뭉글뭉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딴 걸로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시현은 이내 골프채를 한 손에 들고 몇 번 휘둘렀다가 열심히 내기도 넣어 보고 하는 태운을 보며 자꾸 움찔움찔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귀엽긴.’
시현은 자꾸 풀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골프채가 있는 가방을 통째로 들었다. 그리고 목표했던 왼쪽 복도로 빠르게 발을 옮겼다.
괜히 여기 어딘가에 잡혀 고초를 당하고 있을 규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