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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자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헌터란다-54화 (54/146)

#54

“…이주연 씨?”

-콜록. 마, 맞아요. 제발 저희 좀 도와주세요!

시현은 급박해 보이는 주연의 목소리에 저절로 상황이 예상되기 시작했다. 분명 이주연이 제게 연락할 용건은 없었고 지금 와야 할 건 규민의 연락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힘겨운 목소리로 뜬금없이 연락이 와서 도와 달라고 한다니.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젠장. 거기 어디예요.”

-흑, 흐으, 여기 청산동… 콜록.

“기다려요. 금방 갈게요.”

순식간에 통화가 끊어졌다. 시현은 혹시 하는 맘에 급히 규민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게 그저 신호음만 갈 뿐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이어서 전화를 걸었던 김성빈 대장도 같았다.

슬슬 마음이 조급해져 왔다.

“야, 나 먼저 간다.”

“조심해라.”

하정은 대충 분위기가 안 좋아 보였음에도 딱히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그저 딱딱하게 굳어 버린 제 친구의 어깨를 두드릴 뿐이었다.

시현은 하정의 배려에 다시 한번 고맙다 말을 남기고 태운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하정의 집은 고요했지만, 시현과 태운의 머릿속은 주고받는 전음으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규민 씨 잡힌 것 같다. 여길 나가면 은신보다 속도에 좀 더 치중해서 움직일 거야.}

{알겠습니다. 바로 따르겠습니다.}

태운의 대답이 돌아옴과 동시에 시현은 하정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 반쯤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밖으로 쏘아져 나왔다.

그리고 핸드폰 화면으로 보이는, 지도 앱에 주연이 말했던 장소를 찍고 표시된 곳으로 방향을 잡으며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주연의 목소리는 마치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처럼 당장이라도 꺼져 갈 듯 아슬아슬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심각해 보였다. 기침 소리만 들어도 내장이 상한 게 느껴졌다.

사실 그들이 노리고 있는 물건이 제 수중에 있기에 저와 태운이 쪽을 노렸으면 노렸지 다른 쪽은 그래도 괜찮을 거라 안일하게 생각한 게 큰 실책이었다.

“젠장.”

“스승님,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험한 말에 태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을 해 왔다.

비슷비슷한 높이로 이어진 건물들의 옥상을 한 걸음에 두세 개씩 뛰어넘으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급하게 내달리던 마음을 천천히 다독여 주고 있었다.

“후우… 미안하다. 내가 너무 못난 모습을 보였네.”

“괜찮습니다. 저는 그것도 좋은걸요.”

순간 시현은 걸려 넘어질 뻔한 스텝을 가다듬으며, 유난히 높게 솟은 건물의 벽을 밟고 옥상으로 빠르게 치솟아 올라섰다.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다행히 초조함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민망함이 그 자리를 채워 갔다.

“흠흠!”

그냥 엄마 좋다 아빠 좋다 같은 걸 텐데도 괜히 몸이 삐걱거리는 게 자꾸 이상했다. 시현은 입을 꾹 다물고 달리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그리고 잠시 후.

예상보다 더욱 빠르게 목표 지점에 도달한 시현은 어둡고 그늘진 곳에 발끝을 디뎠다. 그리고 기감을 넓혀 사방을 빠르게 둘러봤다.

“뭐지, 어딨는 거지?”

급하게 주변을 훑던 시현은 생각보다 바로 눈에 띄지 않는 주연의 흔적에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가 다시 한번 꼼꼼하게 주변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운은 이미 접한 적이 있기에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안 찾아진다는 게 혹시나 벌써 어디로 끌려간 건가 싶어서 점점 불안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스승님.”

그때 태운이 시현의 어깨를 잡으며 어디 한곳을 손짓했다.

그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은 아직 오픈을 하지 않았는지 셔터가 내려져 있는 건물의 주차장이었다.

그 안쪽 어둡게 그림자가 져 있는 구석에 이주연이 있었다. 그제야 그녀의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현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금세 첫 만남에서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겪은 걸 떠올려 냈다.

그땐 그저 기존의 내공을 다 잃고 다시 시작하던 시기였기에 착각한 건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시현은 단숨에 주차장 안쪽으로 스며들어 이주연에게 다가갔다.

“이주연 씨.”

입고 있는 상의 한쪽이 피에 젖은 채 차와 차 사이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던 주연은 뒤늦게 기척을 느꼈는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곧 다가온 사람이 시현이라는 걸 눈치채고 그동안 참아 왔던 숨을 크게 내뱉었다.

“아, 크흑, 시현 님….”

“일단 어디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죠.”

시현은 척 봐도 심각해 보이는 상황에 미간을 옅게 찡그리고 주연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다.

“안, 안 돼요!”

그러나 예상치 못한 주연의 제재에 멈칫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저는, 저는 괜찮아요. 어떻게 저를 바로 찾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잘 숨을 수 있어요. 그것보다 오빠가!”

주연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고 앞뒤가 뒤죽박죽이지만 그래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간신히 이어지고 있었다.

***

주연은 헌터였다. 그러나 정말 최하위급의 등급으로 판명이 난 쓸모없는 F급 헌터. 그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은 어차피 전투보다 무언가를 운영하고 키워 나가는 게 더 적성인 사람이었고 그에 걸맞은 기반도 있었으니까.

부모님이 조금 바쁘시긴 했지만 그래도 가정은 화목했고 모자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평화는 얼마 전 완전히 박살 나고 말았다. 든든한 기둥이라고 생각하던 큰오빠가 정말로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주연아, 내 판단이 일을 그르쳤구나. 빨리 움직여야 해.”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달리했으니까.

주연은 그대로 납치당하듯 끌려가 큰오빠가 입에 담은 ‘세례’라는 것을 받기 위해 방 안에 갇혀서 불안에 떨어야 했다.

“쿨럭!”

흠칫.

그때 하루, 이틀. 이제는 감으로도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시간이 지났을 때 처음으로 혼자였던 공간에 사람이 들어왔다.

“누, 누구세요?”

“하아, 하아. 주연이?”

“오빠…?”

순간 팔 위로 서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오소소 돋아 버린 소름에 양팔을 부여잡은 주연은 피투성이가 된 둘째 오빠의 몰골에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너, 쿨럭 여기 언제부터 있었어! 아니, 형은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몰라, 모르겠어. 흐윽.”

그동안 참고 참아 왔던 두려움과 공포가 주연의 눈앞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앉아서 질질 짜고만 있을 순 없었다. 주연은 아까보다 더 심하게 기침을 해 대며 천천히 손짓하는 규민에게 더듬더듬 다가갔다.

“자, 잘 들어 주연아. 하아, 여기를 나가면. 시현이 형님부터 찾아. 꼭 도와주실 거다.”

“그렇지만, 내가 여길 어떻게 나가….”

“스킬을 써.”

순간 몸이 굳었다. 그러나 규민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주연은 제게 유일하게 하나 있는 스킬을 떠올렸다.

[죽은 척]

이름부터 무척 허접하고 발동 조건마저 극악이라 발현 후 딱 한 번 말고는 써 본 적도 없는 스킬이었다.

아니, 자의로 써 본 것은 아예 단 한 번도 없었다.

발동 조건은 치명상을 입을 것. 그러면 자동으로 발동되는데 그때는 정말, 마치 무생물이라도 되듯 신체의 징후가 줄어들고 모든 흔적이 가려진다.

그리고 모든 세포가 신체 회복을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정말 말 그대로 비상 탈출용 스킬이었다.

“이 방법밖에 없는 거지…?”

“하아…. 하아, 일단은.”

주연은 잠시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몰골에 규민을 보며 입술을 콱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후우… 그럼 오빠가 공격해 줘. 내가 직접 하는 건 안 돼.”

순간 규민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은 이제 움직이기 쉽지 않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곤 이제 주연이밖에 남지 않았다.

규민은 덜덜 떨리는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가 온 힘을 다해 내려쳤다.

“아악!!”

이미 젖어 있던 주먹 위를 따뜻한 액체가 덧씌웠다.

그리고 동시에 찢어질 듯한 비명이 내부를 울리고 규민의 귓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눈이 뜨겁고 어지러웠다. 어디선가 북이라도 끌고 와서 머릿속에서 계속 쳐 대는 것 같았다.

주연의 비명은 처음 짧게 울리던 것 말고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나마 느껴지던 인기척과 체온 등 이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킬이 발동된 거겠지.’

아마 처음엔 고통으로 인해 잘 움직이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신체가 회복에 접어들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 이곳으로 오지 말라고, 전해 줘 주연아…. 그리고 미안해. 쿨럭.”

주연은 등을 벽에 기댄 채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규민의 앞에 한쪽 팔을 부여잡고 엎어져 있었다.

그러나 곧 눈물과 핏방울로 얼룩진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제한 시간은 3시간. 빨리, 움직여야 해…. 흑.’

다리가 덜덜 떨려 왔다. 헌터 협회에서 테스트를 받을 때 이후로는 게이트도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없던 주연이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상처, 흥건한 피, 모든 게 직접 겪어 본 적이 없는 것이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바보처럼 멍하니 있을 순 없었다.

‘오빠, 구하러 올게. 조금만 참아.’

주연은 천천히 발을 옮겨 가며 제 몸에 박아 뒀던 마법진들을 떠올렸다.

비록 일회용이었지만 이런 위기가 올 것을 대비해 수백 억을 들여 마련해 놓은 장치였다.

최근에는 돈 많은 이들이라면 기본적으로 몇 가지는 새겨 놓기에 제게 이런 게 있다는 걸 큰오빠도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건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의도든 탈출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볼 작정이었다.

‘[매직스피어]’

흐릿한 빛을 내뿜는 마력 덩어리가 창의 모양을 하고 옆으로 떠올랐다. 주연은 망설임 없이 잠겨 있는 문고리를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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