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사락-
얇은 상의 끝이 거친 벽에 쓸리며 구겨졌다.
시현은 약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흘낏 시선을 내렸다가 벽 쪽으로 몸을 더 붙이며 다시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일단 자신이 숨어서, 조심히 움직여야 하는 건 노리고 있는 놈들이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왜 헌터 협회에서까지 그런 조치를 취하려는지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또 사방이 다 적이네. 하아.”
그랬다. 온 중원인들에게 공격을 받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또 상황이 이렇게 되어 가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자신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제가 옆에 있지 않습니까.”
그때 귀에 익은 다정한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쪼만하던 게 언제 이렇게 다 커 가지고 스승님을 도닥일 줄도 알고.’
시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려 하얗고 반질반질한 볼을 검지로 쿡 눌렀다가 꼬집듯 슬그머니 잡고 죽 옆으로 늘렸다.
예전엔 이것도 꽤 싫어했던 것 같았는데 이제는 제가 뭘 하든 속눈썹이 나풀나풀대도록 점잖게 눈만 깜빡이고 있는 것이 꽤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등치야 조금 커졌다지만 제 눈에는 아직도 앳되어 보이기만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눈에 띄도록 차이가 나는 키라든가 한참 낮아진 목소리 톤 등등이 빨리 다 커 버린 아이의 모습을 인정하라고 하는 듯해 괜히 씁쓸해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너무 애 취급 하는 건가?’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이야말로 겨우 몇 년간 회사 생활을 한 게 다인, 한참 경험이 모자란 사회 초년생이나 마찬가지였다.
성인이 되기 전까진 늘 무관심이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고 아무도 저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도 표출하지 않았다.
그렇게 결핍된 채로 살다 보니 저 자신에 대해 알고 말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러니 성인이 되어도 관계를 맺기가 어려웠고 자신도 딱히 피곤하기만 한 인간관계를 억지로 이어 나가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뒤늦게서야 좋은 척, 모른 척 등등 적당히 어울리는 법도 배웠다지만 그것도 익숙해지기 전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때 어쩌면 나보다 더 기구한 운명을 가진 태운이가 나타났지….’
처음엔 과거의 자신이 떠오르는 불쌍한 아이에 대한 동정심뿐이었다.
그러나 아예 처음 보는 새로운 세상에서의 인상 깊은 만남 때문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스며들었다. 태운은 그걸 알아차리기라도 하듯 제게 모든 것을 기대 오기 시작했다.
결국 동정심은 아이에 대해 애틋함과 책임감으로 변해 갔다. 그렇게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그 아이는 제게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이 정도 과보호는 괜찮잖아.’
자신도 조금은 극성맞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제 마음대로만 됐다면 이렇게 고민하고 감상에 빠질 일도 없었을 테다.
시현은 지난 10년과 오버랩되는 현재의 복잡한 상황에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제멋대로 튀어 대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스승님?”
“아.”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너무 깊게 생각에 잠기신 듯하여….”
“어, 맞아. 이제 가야지.”
시현은 걱정이 가득 담긴 반질반질한 구슬 같은 적안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참, 그리고 나도 네가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순간 태운의 몸이 아주 찰나간 굳었다 풀렸다. 웃는 듯 찡그리는 듯 표정이 점차 이상해져 갔다.
‘그런 말을 하면서 거리낌 없이 저를 바라보시면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제게 늘 진심으로 대하는 그 모습이 좋은 거니까.
물론 조금 눈치가 없다고 해도, 아니, 조금 많이 없었지만 그건 제 옆에만 있다면 언젠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가자.”
태운은 늘 등을 보인 채 제 앞에 서서 자신을 이끌어 줬던 시현의 모습을 다시 한번 소중히 눈 안에 담았다.
***
“와, 여기서 사는구나.”
시현은 조금 인적이 드문 외곽 쪽에 자리한 빌라촌에 들어서며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댔다.
주소를 보면서도 혹시나 했었지만, 이곳은 자신도 꽤 잘 아는 곳이었다. 왜냐면 자신이 나왔던 보육원이 있던 동네였으니까.
헌터를 하며 꽤 돈을 벌었을 텐데 왜 아직도 이곳에서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현은 붉은 벽돌로 마감돼 있는 노후된 빌라 하나를 살피며 잡생각을 지웠다.
‘아직 따라붙거나 하는 수상한 사람들은 없었지만….’
자신과 태운을 노리는 단체가 일단 두 개 이상이 되어 버린 이상 조심해야 했다.
시현은 하정이 알려 준 주소의 건물 맞은편 옥상에 자리 잡고 CCTV가 촘촘하게 박혀 있는 도로 쪽을 한번 바라봤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고 하정에게 톡을 보냈다.
-창문 열어놔 줘.
그에 하정의 답장은 조금의 텀도 없이 곧바로 돌아왔다.
-무슨 개소리야.
“어후, 승질 진짜.”
물론 톡은 그렇게 왔지만, 슬그머니 열리는 빌라의 5층 창문을 보며 시현은 작게 헛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리고 단번에 난간을 박찼다.
“으악!”
기척 없이 방 안으로 스며든 시현은 창가에 서서 서성거리고 있는 하정의 앞에 은신을 풀고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짧은 비명과 함께 작은 불덩이가 퍽 튀어나와 시현의 얼굴로 쏜살같이 날아들어 왔다.
“아이 미친 나라고! 톡 보냈잖아!”
시현은 주먹만 한 불덩이를 손날로 내리쳐 단번에 몇 조각을 내 버리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론 잘잘못을 따지자면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갑자기 나타난 제 잘못이 아주 쪼금, 그러니까 0.05 프로 정도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알 바는 아니었다.
“…씨발, 정시현 이 미친놈. 하아.”
갑작스럽게 터진 상황이 순식간에 소강되고 사방에 튀고 있던 불씨가 하정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그제야 민망한 헛기침 소리가 내부를 가득 채우고 사라졌다.
“그, 공격한 건 미안하다. 뭐 근데 네가 자초한 거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안 들키고 잘 온 거 맞지?”
“네가 눈치도 못 채고 추하게 놀란 거 보면 그런 것 같다.”
“이익. 이 자식이 진짜.”
결국 시현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부들대는 하정의 모습에 아주 오랜만에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정 또한 이마를 부여잡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다가 시현의 뒤에 얌전히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거 대체 뭐 어떻게 된 거냐?”
하정이 잠시 앉을 자리를 정리하기도 전에 시현의 입에서 지금 사태에 대한 자초지종을 묻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느슨하게 풀려 있던 분위기가 팽팽하게 조여지고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하정은 제가 의심하고 있는 부분까지 다 전달해 줘야 하나 가늠하다가 일단 그와 관련된 것만 머릿속으로 정리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 조사는 완료됐고, 아마 집은 곧 복원이 시작될 거야. 뭐 집주인 쪽으로도 피해 배상이 들어갈 테니까 딱히 별다른 말은 없을 거고.”
“그럼 좋은 소식 아니야? 근데 수사관은 뭔데?”
“하, 그걸 수사관이라고 불러야 하나.”
헌터 협회는 기존에는 없었던 아주 특수한 기관이었다.
과거 군이 가지고 있던 전쟁 억제력을 지녔고 그 존재만으로도 정책이나 입법에도 영향력이 있었으며 경제에도 엄청난 이바지를 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권력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중 특수한 권한이 하나 있었는데 부장급이 되면 자신만의 팀을 만들어 사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거였다.
정해진 인원은 비록 10명 내로 많지는 않았지만, 마음만 먹으면 꽤 위협적인 세력을 만들 수도 있는 그런 인원수였다.
그렇기에 어떤 이는 자신만의 공격대를 만들어서 금전적으로 운용하는 이들도 있었고, 몰래 숨겨 두고 드러내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 권력을 사용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중 박철 부장은 후자야.”
그가 어디까지 관여가 되어서 그 짓거리에 참여하고 있는지 몰랐다.
하나 자신에게 파지 말라고 경고 아닌 경고를 날린 뒤 보인 모습에서는 이 사건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란 예감을 들게 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더 이상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지금 나온 정보들도 백 프로 신뢰할 수 없다. 이 말이야?”
“맞아.”
“그리고 나에 대해 안 좋은 판단을 내렸고 그 박철 부장인가 뭔가가 움직일 수도 있을 거란 거고.”
“어. 그러니까 집이 고쳐지더라도 그곳에는 가지 마. 이미 도청마법이며 뭐며 아주 도배를 해 놨을 테니까.”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시현은 태운이 온 뒤 단 한 번도 제대로 제집에서 편히 쉬어 본 적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한번 이 상황에 한탄을 늘어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현은 순간적으로 훅 꺼져 버린 존재감에 흠칫하며 휙 고개를 돌렸다.
씨발.
태운은 익숙한 더러운 기분에 당황하지 않고 거칠게 욕설을 되씹었다.
그리고는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에 순간적으로 굳어 버린 표정을 빠르게 갈무리했다.
재발 가능성이 꽤 높았기에 다시 또 그 현상이 나타나겠다 생각은 했지만 이건 너무 빨랐다.
만약 이런 현상이 이제 주기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분명 스승님께 다시 한번 피해를 주고 말 것이다.
‘그건 절대 안 돼.’
지금이야 전투 중이 아니라서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도 모른 척하면 넘어갈 수 있는 거였지 만약 눈앞에 쇠붙이가 휘날리고 있는 장소였다면 벌써 목이 떨어지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당장 이걸 해결할 방법이 필요했다.
태운은 이 일이 처음으로 일어난 장소, 그리고 조우했던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지금 자신과 스승님을 쫓는 이들과 굉장히 깊은 관계가 있어 보였고, 또한 무언가 비밀을 가지고 있는 듯한 단체였다.
‘잘됐군. 당장 잡아서 족치는 수밖에.’
태운은 한쪽 입꼬리를 미세하게 꿈틀대며 치솟아 오르는 살기를 내리눌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단 듯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갈색빛의 부드러운 눈을 마주하며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