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그러자 평소 내기를 쓸 때마다 보이던 붉은색의 기운이 아닌, 눅진해 보일 정도로 음침한 회색의 기운이 시현의 손과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진득한 젤리 같아 보이기도 했고 진하게 뭉쳐 있는 연기 같아 보이기도 했다.
“--``-~//#”
그때 알 수 없는 문장이 시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두 명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듯한 기묘한 소리와 함께 주변을 맴돌던 연기가 죽은 자의 머리로 흡수가 되듯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시현의 머릿속으로 이자가 죽기 전 무의식적으로 떠올렸던 사념이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이 기술은 사실 퀘스트를 통해서가 아닌, 우연한 기회로 습득하게 된 것이었다.
태운이가 답지 않게 먼저 조금 쉬어 가자고 하기에 동정호 근처에 꽤 오래 머문 적이 있었다. 늘 쫓기듯 퀘스트를 처리해 나가던 행보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있던 시기였다.
그렇게 한동안 놀고먹고 여유를 부리던 때. 수영을 가르쳐 주겠다고 호기를 부리다가 호수의 아래에서 동공의 입구를 찾은 것이었다.
뭐 내단 같은 거라도 있을까 찾아 들어간 곳에는 다 떨어져 가는 비급서가 하나 있었고, 그 비급에서는 후대에서 저들의 무슨 ‘교’가 부활하길 바라는 염원이 쓰여 있었다.
물론 시현은 가차 없이 익히고 그것을 태워 버렸지만 말이다.
‘비록 생각의 범주를 조절할 수 없다는 게 흠이지만.’
그러나 모든 무공이 그러하듯 단점 하나쯤은 있었고, 그랬기에 죽기 직전 떠올리는 생각의 범위를 좁히려 질문을 던져 댄 것이었다.
시현은 중구난방으로 들어오는 사념을 빠르게 정리하며 필요한 정보만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현은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가 지체 없이 손가락에 기를 모아 남아 있는 자의 머리로 쏘아 냈다.
“쯧. 늦었나.”
그러자 아직 살아 있던 남자의 이마에 구멍이 하나 생기더니 단말마도 내지 못한 채 단번에 목숨을 잃고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알아내고자 열심히 내뱉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튀어나온 곤란한 상황에 시현은 아파져 오려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것들 생각을 주기적으로 공유하는데?”
나를 숨기고 적을 아는 것, 너무나 기초적인 전술이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가 되어 버린 상황에 절로 미간이 좁아 들었다.
“…어쩌면 우리의 행적도 넘어갔을 수 있겠습니다. 차라리 이제는 먼저 저들을 다 처리하고 정보는 나중에 알아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그래도 그건 좀….”
“역시 스승님은 제가 미덥지 않으신,”
시현은 태운의 말이 끝이 나기도 전에 붉은 입술을 손으로 감췄다.
“쓰읍. 그거 아니랬지. 그냥, 이곳은 예전에 있던 곳과는 다르니까… 네가 자꾸 살생을 편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그래서 그런 거야. 물론 나라고 잘 지키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래. 그러니까 네가 미덥지 않고 싫어서 그런 거 아니니까 제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태운은 꽤 길게 이어진 진심 어린 시현의 말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눈이 반쯤 접혀 들도록 활짝 미소 지으며 제 얼굴 위에 머물고 있는 시현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러니까. 제가 가장 믿음직스럽고 가장 좋다는 뜻이란 거죠?”
제가 꽤 길게 말한 거에 비해 돌아온 대답은 무척이나 짧아지긴 했지만, 이 또한 맞는 말이긴 했다.
시현은 조금은 상기된 채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태운의 얼굴을 보다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 와중에 이쁜 짓 좀 안 했으면 좋겠네.’
시현은 마치 강아지나 고양이라도 된 마냥 제 손에 뺨을 비비적대고 있는 제 제자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지만 제가 처음으로 살인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승님이 무척이나 슬퍼하시던 게 생각납니다. 그때도 저를 토닥이면서 미안하다고 하셨지요. 정말 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으십니다. 스승님은.”
태운은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늘 그렇듯 시현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제 볼 위에 멈춰 있던 손 위로 미세하게 입술을 붙였다 떼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늘 좋습니다.”
근육과 뼈로 감싸져 쿵쿵 뛰고 있을 게 분명한 심장이 경첩 떨어진 문처럼 연신 덜컥이는 것 같았다. 시현은 은근히 잡힌 손을 슬그머니 빼낸 뒤 등 뒤로 감추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참, 그리고 우리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다. 규민 씨가 위험해.”
시현은 공터에 장을 쏟아 내 단번에 땅거죽을 뒤엎은 뒤 그 안으로 손쉽게 시체 두 구를 쓸어 넣고 분주하게 땅을 다졌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사방을 확인한 뒤 태운의 등짝을 두어 번 툭툭 쳤다.
“가자. 태운아.”
“예. 따르겠습니다.”
햇살이 떨어져 내려 벨벳처럼 차르르 빛이 나는 얼굴은 너무나 투명하게 의미를 내보이고 있었다. 시현은 저 얼굴 앞에서 부정의 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난… 약간 태운이한테 약한 것 같아….’
시현은 머리를 작게 긁적이다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다시 삼켰다. 그리고 결국 대화는 이 일을 마무리한 뒤로 미뤄 두고 땅을 박차고 올랐다.
“아까 우리뿐만 아니라 규민 씨한테도 이 새끼들이 붙은 것 같다. 시간이 촉박해.”
지금까지 저것들과 겹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따지면 저의 집부터였고 그 이후는 게이트 안에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현은 경공을 펼쳐 건물을 뛰어넘으면서도 이 사태의 인과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소혼심원술로 알아낸 것은 두 가지.
이규민이 연관은 되어 있으나 아무래도 자신과 같이 쫓기고 있는 처지일 확률이 크단 것.
그리고 저들은 원래부터가 아니라 게이트에서 나온 뒤부터 본격적으로 따라붙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왜 저를 기억 못 하는지까진 모르겠지만 이 또한 대충 예상은 갔다. 무림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고 손쉬웠으니까.
‘근데 빌런 연합이긴 한데 왜 이렇게 그에 대한 것만 사념이 흐릿한 거지? 저렇게 맹목적이라면 가장 뚜렷해야 하는데.’
아직까진 그 무엇도 백 퍼센트 확신할 순 없었지만, 시현은 생각보다 점점 더 수상쩍어지는 상황에 발로 향하는 내기를 더해 달려 나갔다.
아무래도 이규민을 만나면 이 의문에 살이 더 붙을 테고 약소하나마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시현은 입을 굳게 다물고 이제는 꽤 멀리까지 떠나온 그 카페로 다시 달려갔다.
***
“태운아, 카페 근처 탐색 부탁한다. 나는 호텔로 가 볼게.”
시현은 거칠게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태운의 손에 쥐여 주고 다시 한번 다친 곳 없나 몸을 한번 체크했다.
“그리고 여기 이거. 내가 전화를 걸면 이렇게 초록색의 동그라미 같은 게 뜰 거야. 그걸 콕 누르면 받아지거든? 꼭 받아야 해. 알았지?”
“걱정하지 마세요. 스승님.”
“그리고 없으면 바로 호텔로 오고. 길은 기억하고 있지?”
“예.”
돌아온 태운의 대답은 무척이나 담담했지만, 시현은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몇 번이나 전화 받는 법을 일러 준 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움직였다.
상황이 급박했기에 여기서 계속 뭉개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오는 동안 몇 번이나 통화를 시도해 봤지만, 이규민은 묵묵부답이었다. 흘러가기만 하는 신호음은 안 좋은 생각을 점점 구체화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좀 잘 숨어 있어야 할 텐데.’
시현은 작게 숨을 고르고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호텔을 향해 급히 움직였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입구가 아닌 옥상을 향해 발을 돌렸다.
자신과 이규민이 묵고 있는 객실의 위치는 21층. 가장 상층에서 5층만 내려오면 닿을 만큼 위에서 가까운 거리였다.
시현이 어떻게 안쪽으로 조용히 침입할지 계획을 세우는 동안 커다란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는 옥상의 지면 위로 두 발이 닿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감이 거침없이 뻗어 나가며 건물 내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일단 수상한 놈들 두 명. 이 새끼들 아직 우리 따라온 놈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는 것 같은데.’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저와 태운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다고는 하나 정체도 알 수 없고 얼마큼의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무슨 능력을 쓰는지도 모르는 적들을 무방비로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 아직도 시현은 저들이 자꾸만 쓰는 그 능력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정이 사용하는 마법도 본 적이 있었고 신류하가 쓰는 능력도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의 능력도 결국은 내부의 기운을 이용하여 펼쳐 내는 것이기에 파악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이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들의 능력이 본인들의 온전한 능력을 발휘해서 쓰는 것이 아니란 것과 같았다.
“하아, 씨발. 이런 좆같은 상황은 또 오랜만이네.”
솔직히 돌아오면 평안할 줄만 알았다. 그러나 평안은 개뿔 오히려 게임 속에서 구르던 것보다 더 정보가 없었고 더 불길했다.
시현은 기척을 숨긴 채 잠겨진 문을 잘라 내 소리 없이 내려놓고 내부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22층. 시현은 21층으로 내려가지 않고 이규민이 묵는 객실의 바로 위 객실로 향했다.
기척이 들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또 저들이 어떤 기괴한 사술을 펼칠지 알 수 없었기에 조심히 움직여야만 했다.
‘하, 진짜 죄송합니다. 보상은 해 드릴게요. 물론 규민 씨가.’
검붉은 내기가 문틈 사이로 슥 미끄러졌다. 그리고 시현이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 아무런 제재 없이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시현은 떨어져 내리는 잠금장치 조각을 받아 내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고 다시 문을 조용히 닫았다.
내부는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인적 없이 고요했으나 시현의 걸음걸이는 아까와 달리 조금 더 느려졌다.
그리고 마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처럼 보폭이 불규칙해지고 땅을 딛는 힘 또한 중구난방으로 바뀌었다.
어쩔 수 없었다. 침입자 중 한 명의 몸속에 내공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보잘것없는 양의 내력이었으나 혹시 모르지 않나.
아까의 일 이후 극도로 조심스러워진 시현은 객실 안에 딸린 주방으로 가서 숟가락을 꺼냈다.
그리고 아주 미약하게 내기를 입힌 손끝으로 동그란 부분의 양 끝을 쳐 내 순식간에 야매 비도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쓸 만하겠지.’
만류귀종이라 무의 끝에 다다른다면 맨손이든 무기를 들든 차이가 없어진다지만 지금에 제게는 뭐든 뾰족한 게 있다면 좋았다.
시현은 남은 쇠젓가락까지 야무지게 챙긴 뒤 소리 나지 않게 얇게 찢어 낸 천으로 감아 단단히 그러쥐었다.
다행히 이규민은 방 안 화장실 위 천장에 잘 숨어 있었다. 그에게 호흡까지 조절하는 스킬이 있던 건지 생체 신호까지 줄어 있어 시현도 처음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그조차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른 듯 보였지만 말이다.
시현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는 그의 기운을 감지하고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