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훙-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는 듯하더니 금세 사라졌다.
“컥!”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 시현이나 태운 정도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단말마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름 숨긴다고 숨겨 놨던 낯선 이의 기운이 나타났다가 생명 반응과 함께 바로 사라졌다.
미친.
시현은 식겁해서 그동안 의식적으로 떨어져 있던 태운의 손을 덥석 잡고 수상한 이가 숨었던 좁은 골목 반대 방향으로 발을 튕겼다.
그리고 태운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사르르 미소 짓고는 시현의 손을 꽉 잡고 보폭을 맞춰 움직였다.
‘대체 누구지?’
도망을 가려는 건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의 살기가 향한 방향은 정확히 자신이었기에 알고서 일부러 찾아왔을 확률이 높았다.
어차피 당장 이 자리를 피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찾아올 게 뻔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생각 따윈 없었다.
‘절대 혼자서 오진 않았을 거야.’
이쪽은 태운과 자신 총 두 명이었다.
그렇다면 저들도 두 명 이상의 인원이 대기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시현은 경공을 써서 움직이며 이곳저곳에 일부러 발자취를 남겼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기척을 한계까지 숨기고 다시 그 남자가 있는 골목길 안으로 들어섰다.
누가 봐도 나 수상한 사람이라고 자랑하듯 새까만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남자의 시체가 마치 잠든 것처럼 얌전히 바닥에 누워 있었다.
시현은 천천히 허리를 기울이고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가슴에 뚫린 구멍은 단 하나였지만 그 안에 자리했던 내장은 갈가리 찢겨 형체가 사라져 있었다.
“태운아. 좀 알아보고 죽이는 게 좋지 않았을까?”
“스승님께 살의를 내비쳤는데도 말입니까?”
시현은 대수롭지 않게 돌아온 대답에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았다. 아이 앞에서 한숨을 자주 쉬는 것도 안 좋다고 했으니까.
“일단 손 좀 놔 봐.”
“…왜요? 저 놓고 가시려고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방금까지 차올랐던 울화가 눈을 슬쩍 내리깔고 머뭇대며 작게 말을 꺼내는 태운의 태도에 금방 녹아 사라졌다.
“아니…. 단서가 있나 몸 좀 뒤져 보려고 그래.”
태운은 한참 가만히 있다가 느릿하게 꽉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의기소침하게 한 발짝 물러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시현은 점점 불편해지는 마음에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떨어져 나간 손을 다시 잡아 쥐었다.
“하아. 그냥 있어.”
시현은 결국 주변으로 기막을 펼친 뒤 하나 남은 손으로 시체의 멱살을 콱 틀어잡고 더욱 어둡게 그늘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한 손으로 못 할 일도 아니었기에 시현은 막다른 골목 구석에 슬슬 식어 가는 몸뚱이를 다시 내려놓고 복면을 벗겨 냈다.
치익!
“윽.”
그러나 결론적으로 시현은 수상한 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미세한 기운이 피어나는 것 같더니 얼굴이 드러나자마자 녹아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확히는 머릿속부터. 시현은 살이 타들어 가 누린내를 풍기는 연기를 기파를 쏘아 내 밀어 버렸다.
‘이건 꼭 살수들이나 쓰던 수법 같은데.’
보통 중원에서는 지속적으로 보내던 특정 내공이 감금이나 죽음으로 끊기면 어금니 안에 들어 있던 독단이 터지며 증거 인멸을 하던 수법이 많이 쓰이곤 했었다.
물론 지금의 상황과 메커니즘은 조금 달랐지만 보이는 결과는 비슷했다. 시현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낭패한 낯을 하며 급하게 성안을 발동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체-과도한 손상]
‘쯧, 쓸모없긴. 이거 레벨업은 언제 되는 거야?’
시현은 작게 혀를 차고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방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게 무색하게 또 이런 일이 생기자 슬슬 짜증이 났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자신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말이다.
“태운이 너는 계속 기운 숨기고 있어.”
조금의 모험이 필요했다. 시현은 혹시 근처에 있을 이 시체의 동료를 유인하기 위해 기막을 없애고 숨기고 있던 기운을 풀었다.
그동안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일이 몰아쳤지만 그 와중에도 시현은 수련을 쉬지 않았기에 자신감도 있었다.
“스승님! 위험합니다!”
뒤늦게 태운이 급하게 말려 왔지만, 시현은 이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전방 50m 밖에서 급히 몸을 돌려 도망가는 인기척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너네구나?
“태운아, 너는 시체 지키고 있어.”
시현은 습관대로 짧게 태운에게 지시하고 안력을 높여 수상한 자들의 뒷모습을 확인한 뒤 바로 건물 벽을 밟고 빠르게 튀어 올랐다.
으득.
그 순간 작게 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어두운 골목을 채웠다가 금방 사라졌다.
태운은 제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시현이 있던 자리를 감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하아…. 돌겠네.”
작은 얼굴을 느릿하게 쓸어내린 태운은 이내 습관처럼 입꼬리만 올려 웃고는 널브러진 시체를 내기를 실은 발로 차 실외기 뒤로 쑤셔 넣은 뒤 시현을 따라 땅을 박차 올랐다.
그리고 홀로 남은 살수의 시체는 태운이 가격한 부위를 중심으로 조금씩 분해되는 중이었다.
“태운이 너.”
시현은 제가 말한 걸 듣지 않고 위험하게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는 태운의 기척에 미간을 찡그렸다.
‘사춘기가 확실해.’
정말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한 말투에, 시키는 족족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 사춘기 증상과 딱 맞아떨어졌다.
“시체는 찾지 못하도록 처리하고 왔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무지 스승님이 걱정되어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말을 끊고 이어지는 태운의 말에 시현은 말문이 막혀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들으면 또 평소의 순종적인 제자 같았는데 그래서 오히려 더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그래. 그럼 이번엔 바로 죽이지 말고 제압만 해야 해. 알았지.”
“팔다리를 뽑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그것도 안 돼. 쇼크받아서 죽을 수도 있잖아. 얌전히 따라와….”
순간 빠르게 움직이는 둘의 주변에 침묵이 맴돌았다.
제가 가져다 붙인 핑계가 무척 빈약한데도 태운은 잘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바짝 붙어 따라왔다. 시현은 차오르는 민망함에 조금 목덜미를 붉히며 손가락에 내기를 모았다.
피잉!
단단히 모아져 있던 손이 허공을 가르듯 몸에서부터 횡으로 그어졌다.
그러자 붉은색 내기가 총탄처럼 직선으로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목표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수상한 인물들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챙강-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던졌던 기운이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시현은 그에 그치지 않고 몇 번이나 기를 쏘아 냈지만 계속해서 가로막히는 건 똑같았다.
‘내가 이때까지 괜히 열심히 수련한 게 아니거든.’
시현은 단번에 죽기라도 할까 봐 조절했던 기운을 조금 더 끌어 올렸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정통으로 맞으면 발이 터져 나갈 정도로 더 촘촘히 내기를 모아 다시 앞으로 튕겼다.
“젠장!”
그리고 예상대로 이번 공격은 이전처럼 막히긴 했지만 제대로 타격을 준 건지 앞서가던 한 놈이 몸을 발발 떨며 욕설을 내뱉었다.
시현은 슬슬 낮아지고 있는 건물들의 옥상으로 뛰어내리고 다시 한번 도약해 기묘하게 휙휙 도망가고 있는 저들의 뒤를 추격하며 주변을 빠르게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래, 일부러 유인하는 건지 진짜로 도망치는 건지 한번 보자고.’
시현은 얼마 전 제가 탐지하지 못했던 진의 존재를 떠올리며 달리는 속도를 조절했다.
그때 앞에서 일렁거리는 것 같은 무언가가 확 덮쳐 오기 시작했다. 시현은 손에 기를 뒤집어씌우고 그것을 단번에 갈라 냈다.
그러자 앞에서 다시 한번 작은 소요가 일어났다.
“오.”
거리는 이제 공격을 쉽게 주고받을 수가 있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고 그들도 도망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지어지다 만 공사장이 있는 공터에 내려서기 시작했다.
시현은 화색을 띠며 눈만 내놓고 있는 수상한 자들의 앞에 다가서서 먼저 입을 열었다.
“자. 왜 나를 공격했는지 먼저 말해 줄 사람. 그 사람은 살려 줄게.”
조금의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은 낮은 목소리에는 작게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시현의 말에도 둘은 아무 말 없이 잔뜩 긴장만 하고 다른 행동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비아냥거리거나 낮잡아 보면 상대는 보통 두 가지의 반응을 내보였다.
화가 나서 공격하려 하거나 겁을 먹고 도망치려 하거나. 그러나 이 둘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게 오히려 시현의 흥미를 끌었다.
“대체 넌 뭐 하는 놈이지?”
방금 한 말은 본인이 꺼낸 게 아니었다.
시현은 오히려 내가 할 말을 왜 네가 하느냐 되묻고 싶었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방의 눈동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진심이군.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공격했다?”
“너 따위한텐 관심 없다. 우리는 그저 주어진 일을 할 뿐.”
“참나. 어이가 없네.”
조금 길어진 대답이 돌아왔지만 결국 그 안에도 제가 원하는 내용은 없었다.
그러니까 뭐 때문인 거냐고.
미간을 살포시 찡그린 시현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작게 내젓고 마저 입을 다물었다.
‘아, 참.’
그때 제게 무공이 아닌 조금 이질적인 스킬이 하나 있었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시현은 아직도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스킬명을 외치며 먼저 제 앞에 있는 자를 바라봤다.
‘성안.’
최영현[□□□]
칭호[□□□□□□]
체력-□□
근력-□□
민첩-□□
지력-□□
마력-□□
상태 이상-□□(□□□)
‘음?’
시현의 눈앞에 여느 때와 같이 옅은 붉은색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상하게 익숙한 듯한 이름과 함께 처음 보는 항목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현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앞에서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이의 눈을 유심히 바라보다 아른아른하는 기억을 잡아내기 위해 머리를 계속 굴려야만 했다.
‘에이 씨, 왜 이렇게 기억이 안 나지?’
그러나 기억은 또렷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마개로 틀어막은 듯 속을 답답하게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