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그래, 태운이는 겨우 제 허리까지나 올까 한 너무나 여린 어린아이였다.
게다가 허락이 없으면 개인적인 공간을 침범하지도 않는 무척이나 예의 바른 아이였는데 이제는 멋대로 숨어들어 올까 문을 걸어 잠가야 한다니!
아무래도 세상이 저를 상대로 재미없는 장난질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현은 다시 한번 이상하게 꼬여 버린 상황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밖에 있을 태운이가 들을까 소리도 내지 못하고 매트리스 위를 괴롭게 뒹굴거렸다.
‘안 되겠어. 붙잡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봐야지.’
그러나 제가 불편하고 말을 꺼내기 힘들다고 계속 이런 식으로 지낼 수도 없었다. 태운이가 왜 저러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시현은 주먹을 불끈 쥐고는 침대 밖으로 빠져나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태운아!”
결의에 찬 목소리가 거실을 휩쓸고 사라졌다. 그러나 평소라면 지체 없이 들려와야 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시현은 멈칫했다가 다시 발을 옮겨 태운이가 기거하는 방 앞에 서서 작게 심호흡한 뒤 문을 작게 두드렸다.
“태운아 아직 자?”
순간 여전히 고요하기만 한 반응에 이상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태운은 단 한 번도 제가 불렀을 때 대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고개를 내려 시간을 확인하자 화면에는 오전 11시를 알리는 숫자가 정확히 박혀 있었다. 그러니까 절대 자고 있을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시현은 급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싸늘하게 식은 내부를 멍하니 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처럼 똑같이 정리되어 있는 내부 모습은 꽤 오래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시현은 문을 급하게 닫고 객실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태운이를 찾기 시작했다.
“태운아!”
시현은 테이블 밑을 봤다가 냉장고를 한번 열어 보고는 머리를 벅벅 흐트러트렸다.
“아니, 얘가 어딜 간 거야?”
태운이는 단 한 번도 말없이 멋대로 행동하거나 일을 일으켜 속 썩인 적 없는 착하고 착실하고 똘똘한 아이였다.
그러나 몇 번을 둘러봐도 결과는 같았다. 시현은 한참을 객실 안을 헤매다가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아 힘없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후회가 됐다.
아무리 그 애가 달라졌다 해도 자신만은 그래선 안 됐던 거였다. 태운이가 이 낯선 곳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저뿐이었다.
게다가 갑자기 바뀐 세상에 힘들고 혼란스러운 상황일 테고 어른의 보살핌이 필요할 텐데 그것을 제대로 헤아려 주지 못한 것 같아 깊은 자괴감이 들었다.
‘나한테 실망한 거면 어떡하지…? 그깟 거쯤이야 조금 불편해도 같이 자 주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순간 어제 아주 냉담한 얼굴로 들어오지 말라고 화내듯 말한 게 떠올랐다. 그리고 들어오지도 못하고 한참 동안 문 앞을 맴돌던 태운이도.
아, 잠깐만.
“설마… 가출…?”
경악 어린 목소리가 주변의 차가운 정적을 흔들다 사라졌다. 시현은 다리를 잘게 떨면서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순식간에 차가워진 양손을 콱 붙잡았다.
물론 그 애가 누구한테 공격받는다거나 하는 상황이 걱정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은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게 많았다.
가뜩이나 여리고 순해 빠져서 어디 불쌍한 척하는 사이비나 폰팔이한테 잡혀 사기나 당하지 않을까 무척이나 걱정이 됐다.
그게 아니더라도 운 나쁘게 폭발 게이트에라도 휘말리면 정말 큰일이었다.
“시발. 이 와중에 연락할 수단이 하나도 없네. 제정신이냐.”
시현은 당장이라도 태운이를 찾으러 나가려 벌떡 일어났다가, 대체 어디서부터 돌아다녀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아 다시 그대로 주저앉았다.
태운이는 늘 공기처럼 주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착각이 산산이 조각나는 중이었다.
지이이잉-
그때 아무렇게나 던져 놨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며 연락을 알려 왔다.
“여보세요? 규민 씨. 네. 네…? 태운이랑요?”
그리고 시현은 예상치 못한 소식에 벌떡 일어나 객실 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
“흐음…. 언제 오실는지.”
태운은 시현이 묶어 주지 않아 길게 풀어진 비단 같은 검은 머리를 등 뒤로 풍성하게 늘어뜨리고 시현이 딱 한 장 챙겨 온 셔츠와 심플한 바지를 입은 채 카페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주변은 가끔 침 삼키는 소리 말고는 카페라고는 생각할 수 없이 무척 조용했다.
아침이라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치고도 무척이나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형님…. 대체 이게 무슨 일 입니까 제발 살려 주세요오….’
그리고 그 앞에는 규민이 식은땀을 흘리며 앉아 있었다.
제 앞에 놓인 커피를 쭉쭉 빨면서 한쪽 다리를 정신 사납게 떨고 있던 규민은 몸을 편히 늘어트리고 다리를 꼰 채 얌전히 앉아 있는 비현실적인 그를 흘낏흘낏 훔쳐봤다.
한 시간 전.
아침 댓바람부터 누군가 깨워 대길래 평소 조금 늦게 일어나던 규민은 저도 모르게 손을 휘저으며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러자 그대로 뒷덜미가 잡혀서 억지로 일으켜졌고 비몽사몽 뜬 눈앞에 자리한 까맣고 빨간 형체에 악귀라도 본 마냥 크게 비명을 질러야 했다.
물론 비명은 1초 만에 막혔고 더욱 가차 없이 호텔 근처 카페까지 끌려 나온 것이었다.
그게 벌써 한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스승님께 한번 연락해 보지?”
“예?”
“아까 말한 대로 은근슬쩍 위치를 흘리라는 말이다.”
연태운이 여유롭게 앉아 있다가 감정 없이 눈꼬리만 살짝 휘어 접으며 미소를 만들어 내고는 규민에게 부탁 같지 않은 부탁을 했다.
순간 주변에서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잔잔한 소음이 들려왔지만, 규민은 이분이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울고 싶어질 뿐이었다.
아직도 제 머릿속엔 게이트 안에서의 일이 선명했다.
그동안 시현에게 보여 주는 세상 다정한 모습에 연태운이 조금씩은 편해지고 있었건만 주변을 채운 검은 것들과 와르르 쏟아지던 진득한 핏물들은 그 모든 게 네 착각이라는 듯 마음의 거리를 다시 처음으로 돌려 버렸다.
-그, 태운이가 내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힘들게 살아서 조금 무뚝뚝하지만 속은 아주 착하고 여려요. 그러니까 오해 말고 좀 잘 챙겨 줘요.
순간 얼마 전 시현이 남몰래 다가와 일러 줬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의 자신은 아마 활짝 웃으며 동의를 했었을 거다.
‘형님…. 오해 아닌 것 같습니다…. 제발 빨리 받아 주세요.’
규민은 얌전히 핸드폰을 들어 올리고 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형님…. 예 그, 태운 님이랑 같이 놀러 나왔는데요. 걱정하실까 봐요…. 예….”
태운은 수화기로 들려오는 시현의 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손에 턱을 괴고 여유롭게 아이스 초코가 든 잔을 들어 올렸다.
이 시간이면 스승님이 늘 일어나는 시간이 넘고도 남았다.
아무리 늦게 자도 기상 시간은 크게 넘긴 적이 없었으니 무조건 전화를 받고 찾아올 것이라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는 빠르게 연결됐고 떨떠름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시킨 일은 제대로 하는 듯하는 규민을 보며 태운은 다시 한번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석이 완료됐습니다.]
그때 태운의 머릿속으로 감정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유는?’
[이유 불명. 재발생 가능성 5할 이상입니다.]
태운은 탐탁지 않은 대답에 콱 미간을 찌푸리고 작게 혀를 찼다.
얼마 전 게이트에서 있었던 이상 현상. 그것은 순식간에 제 몸 안의 기운을 굳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그 현상은 일어났을 때처럼 찰나에 신기루같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경험은 처음이라 천하의 연태운도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유도 알 수 없었고 재발 가능성까지 있다고 한다.
전투에서의 찰나는 생과 사가 수십 번은 넘나드는 긴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현상 때문에 스승님께 피해를 또다시 끼친다면 절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쓸모없군. 혹시 그것과 비슷한 것들이 개입한 건 아닌가?’
[아닙니다. 이곳엔 없습니다]
태운은 다시금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욱 조급해졌다.
“아참. 태운 님. 이거요.”
한창 풀리지 않는 의문에 이를 갈던 태운은 갑자기 들려온 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뭐지?”
“진작 드렸어야 했는데. 아시다시피 그동안 정신이 없었잖아요… 이거 그때 게이트 안에서 태운 님이 처리하신 몬스터 안에서 나온 겁니다.”
태운은 숙소에서부터 꼭 쥐고 있던 가방에서 규민이 꺼낸 것을 유심히 살폈다.
보석이라기엔 둔탁하고 그냥 금속 덩어리라기엔 빛이 나는 손가락만 한 물체였다.
그러나 생명력이 미약하게나마 들어 있는 것 말고는 아무 특징도 없는 하찮은 물건이었기에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근데 그걸 왜 주는 거지?”
“아, 원래 몬스터를 처리하는 자가 아이템 우선 입수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 그것들은 저희 도움 없이 태운 님께서 다 처리한 거나 마찬가지라 길드원들도 찬성한 일이고요.”
“필요 없다.”
“어엇! 안 되는데!!”
태운은 미련 없이 고개를 내젓고는 제 머릿속에 기생하고 있는 것에게 말을 걸었다. 별것도 아닌 저런 것보단 이게 먼저였다.
‘목걸이는 어떻게 됐지?’
[인지 자아가 봉인되어 있는 게 확실시됩니다. 사용자의 능력치가 흩어졌을 때 변화의 징조가 표출됐습니다.]
안 그래도 목걸이를 차자마자 느껴지는 욕구에 웃음이 나왔던 태운이었다. 그런데 제 몸이 약해지자마자 튀어나오려고 한다? 이 안에 있는 놈은 빼도 박도 못하게 검은 속내를 가지고 있는 놈이 분명했다.
‘봉인 해제하는 방법은?’
[천명의 정기를 취하는 것입니다.]
“허?”
“예??”
태운이 순간 황당함을 참지 못하고 작게 소리를 내자 조용히 눈치를 보던 규민이 득달같이 대답을 해 왔다. 그러나 태운은 대충 손을 휘저어 주의를 돌리고는 질문을 바꿨다.
‘억지로 끄집어내는 방법.’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봉인이 강력합니다.]
“씨발.”
“으, 네?”
“하아….”
태운은 반사적으로 대답을 해 오는 규민에게 다시 한번 더 손을 내저었다.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이 더러운 기분은 거의 한해를 채워 가도 잊히지 않는 그때, 스승님을 잠시간 떠나보내기 전과 꽤 비슷했다.
‘음?’
그때. 한참 개같이 꼬이기만 하는 상황에 잔뜩 미간을 일그러트리고 있던 태운이 순식간에 표정을 허물고 방긋 웃었다.
아주 멀리서 누군가가 경공을 써 가며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자신과 무척 닮은 기운을 가진 그는 숨길 생각도 못 하고 기를 줄줄 흘리며 이곳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태운은 한숨 쉬듯 숨을 가늘게 내뱉고 팔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스승님.”
“예?”
“이제 곧 스승님이 올 겁니다.”
규민은 여태 살벌하게 굳어 있다가 갑자기 미친놈처럼 방긋방긋 웃어 대는 얼굴에 더욱 공포감을 느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