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저 까맣고 허연 남자는 병원에서 마주친 다음 날부터 시현이 머물고 있는 호텔까지 찾아와 길드 영입을 조르다시피 했다.
사실 처음에는 유준과 태운이에게까지 말을 꺼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태도를 달리했다.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단 듯 과장된 태도로 손바닥에 주먹을 톡 치곤 오로지 자신만 물고 늘어지며 집착하듯 말을 붙여 오기 시작했다.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오랫동안 드림워크를 겪고 온 자식이라더니.’
어떤 곳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왔는지는 몰라도 행동거지부터 말투까지 현대인답지 않고 이상한 게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길드 들어갈 일 없으니까 좀 가시라고요. 안 바쁩니까?”
“으음. 인재 영입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 그걸 제가 하고 있는 겁니다. 유준 군과 시현 씨 태운 씨까지 모두 함께 제게 와 준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말입니다. 하아. 어찌 이리 제 마음을 다들 몰라주시는지….”
시현은 팔뚝으로 작게 돋는 소름을 벅벅 긁어내리면서 당장 살수라도 쓸 듯 움직이려 하는 태운의 손을 꽉 쥐었다.
정말 너무 피곤했다.
서울에 올라가도 집은 아직도 조사 중이라 발도 들일 수 없었고, 당연히 원흉들의 행방도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게다가 돈 좀 벌어 보겠다고 들어간 게이트에선 누가 봐도 수상한 일에 휘말렸고 이제는 별말도 안 되는 소문에 태운이까지.
시현은 분명 전생에 나라라도 팔아먹지 않았으면 이딴 개 같은 일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을 리 없다며 확실치도 않은 전생의 자신을 저주했다.
“스승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그때 그나마 얌전히 앉아 있던 태운이 잡혀 있지 않은 하얗고 길쭉한 손을 들어 올려 시현의 이마와 볼을 슥 쓸어내리고 걱정을 가득 담아 말을 붙여 왔다.
시현은 작게 움찔했다가 태운의 남은 손마저 덥석 잡아 내려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고 하지 말라고 미간을 팍 좁히고 시선을 휙휙 움직이며 강하게 경고를 날렸다.
“으음…. 많이 불편하세요? 저 남자를 쫓아낼까요? 원하신다면 죽…”
“아니!!! 아니야 괜찮아. 태운아.”
그러나 태운은 마치 못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현은 급히 말소리를 줄이고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리고 동시에 머릿속으로 분명 조만간 고혈압으로 쓰러지거나 최소 화병 때문에 앓아누울 거란 예감이 강렬하게 내리박혔다.
“하아, 이만 다들 가세요. 유준이랑 규민 씨는 각자 방으로 돌아가고, 당신도 썩 꺼지고, 태운이 너는…. 나 잘 때 방에 들어오지 마….”
시현은 속사포로 말을 쏟아 내곤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가차 없이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러자 슬슬 밖에 기척들이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태운이는 제 방문 앞에 꽤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시현은 자꾸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강아지처럼 서성이는 움직임을 최대한 모른 척해야만 했다.
어제도 분명 따로 잔 것 같은데 눈을 뜨니 팔다리로 제 몸을 칭칭 감고 잠들어 있는 태운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치고 얼마나 기함했던가.
이런 걸 자꾸 봐주면 분명 안 좋은 습관이 들 게 분명했기에 시현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
이제는 뜨겁게 타오르는 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나온 참이었다. 시현은 안고 있던 작은 몸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눈을 맞추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이름이 뭐야? 알려 줄 수 있어?”
사실 시현도 이 아이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란 것 말고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이제 차근히 알아 가야 할 차례였다.
그래도 방금까지의 상황을 의식했는지 시현의 물음은 목소리만 들어도 꽤나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충분했다.
태운은 꾀죄죄한 모습에서 유일하게 반질반질 빛나고 있는 구슬 같은 눈동자를 시현에게 고정했다.
그리고는 곤란하다는 게 다 티가 나는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는 잘생긴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다 이내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나뭇가지를 고사리손으로 잡아 올렸다.
“오! 어…. 한, 한자구나…. 그치… 그렇겠지.”
잠시 후 흙바닥에 쓰여 있는 두 글자는 당연하게도 한자였다.
그래도 조금 마음을 여는 건가 반가워졌던 시현의 마음이, 낯익기는 하지만 전혀 읽을 수는 없는 문자를 보자마자 슬슬 내려앉고 있었다.
이럴 때만 게임 고증 철저하네…. 쯧. 저걸 어떻게 알아내지?
시현이 아는 거라고 고작 하늘 천 땅 지 같은 쉬운 것들뿐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와선 퀘스트라는 명목하에 몸을 혹사하는 수련이 대부분이었기에 문자나 문화를 익힐 겨를이 없었다.
혹시나 태운이 알려 주지 않을까 슬슬 작달막한 아이를 훔쳐봤지만 아이는 글을 다 쓰곤 볼일 다 봤다는 듯 다시 시현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말하는 건 자동으로 알아들을 수 있게 되어 있어 입만 열면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트라우마 때문에 말문이 막힌 것 같아 보였다.
시현은 그런 아이를 다그치고 싶지 않았다.
‘시스템. 혹시 쓰인 글자 번역은 안 되냐?’
[일부 가능합니다.]
하아….
시현은 자신이 잠시 고민했던 것을 바보 취급 하듯 너무나 쉽게 돌아오는 답변에 저도 모르게 욕지거릴 내뱉으려다 바닥에 쭈그리고 저를 보고 있는 아이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이 시스템은 늘 이딴 식이었다. 기능이 있어도 먼저 안내해 주지 않았고 그나마도 정확하게 하나하나 물어보고 체크를 해야만 했다.
‘씨발, 그래 먼저 물어보지 않은 내 탓이지. 이거 한자 하나씩 번역해 줘.’
[어리석을 태, 추락할 운입니다.]
“뭐…?”
그리고 눈앞에 뜬 시스템창을 보자마자 시현은 결국 멍청하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사람 이름을 이따위로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글자에서 느껴지는 시커멓고 찐득한 악의와 원망이 시현의 기분까지 더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시현은 목구멍을 콱 틀어막는 울화에 힘겹게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운아. 태운이 맞지?”
그러자 무척이나 낯선 걸 들었다는 듯 단번에 인지하지 못하고 얌전히 있던 아이가 처음으로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러운 얼굴이었으나 아이답게 티 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시현의 눈썹이 저절로 팔자를 그리며 늘어졌다.
‘뜻…. 을 아냐고 물어보면 안 되겠지…?’
저 어린아이에게 무척이나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상처투성이가 된 몸, 그리고 이름까지.
시현은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었지만, 아이가 겪은 그간의 고생이 연상되는 것만 같아 주먹을 꽉 쥐었다 풀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앙상한 아이를 품 안에 안고 자신이 떠나왔던 제일 가까운 마을로 돌아갔다.
우선 비쩍 마른 아이를 박박 씻기고 밥을 먹였다. 물론 처음이라 씻기는 손길이 어색하고 거칠었던 것 같지만 태운이는 꽤 잘 참아 내고 있었다.
그 후에는 가장 먼저 이곳에도 옥편 같은 게 있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잖아. 어리석고, 추락한다니. 이따위 뜻을 이름으로 붙이는 게 말이 돼? 지어 준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진짜 쓰레기네.’
이제는 가물가물했지만, 자신을 가졌을 때 아버지가 멋진 이름을 짓겠다고 한 달을 고민하셨다 얘기하던 웃음기 섞인 어머니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 한동안은 함께 지내야 할 텐데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시현은 급격히 차오르는 의욕에 며칠간 시스템을 혹사해 가며 마음에 드는 뜻들을 찾기 시작했다.
태운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걸 보면 이름 자체를 바꾸긴 좀 그랬고 애가 알아채기 전에 의미라도 바꾸자 하는 마음이었다.
“아, 찾았다! 이거다!”
시현이 열심히 넘겨 보던 종이 위에 손끝을 콕 찍으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무릎에 앉힌 태운의 마른 볼을 슬쩍 콕 누르고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태운이 네 이름 뜻이 조금 안 예뻐서 내가 다시 골랐어. 아름다울 태에 구름 운이야. 어때? 마음에 들어?”
조금 우쭐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 시현은 이 한자들이 이름에 쓰이는 한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꽤 잘 고른 것 같다고 생각하며 태운의 반응을 기대했다.
그러나 동그란 뒤통수를 보이며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태운에게선 딱히 큰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음, 별론가? 하긴 남자아이 이름에는 좀 그럴 수도….’
시현은 조금 시무룩해지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좋아요.”
“어?”
그러나 처음 궤짝에서 구해 달라고 했을 때 이후 처음 듣는 목소리에 그전에 느꼈던 모든 감정이 날아가고 뿌듯한 기쁨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뭐든지 이름이 중요하다더니 이 계기로 뭔가 급속도로 이 세계의 주인공과도 친해진 것 같아 괜히 또 흐뭇해졌다.
“좋아요. 아저씨.”
“아, 아저…! 흠흠. 형이라고 불러 줄래.”
물론 마지막 말은 조금 상처였지만 13살의 나이 차이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기에 시현은 은근히 제 바람을 담아 호칭을 교정해 주고 태운의 대답을 기다렸다.
“…형?”
“아.”
시현은 급하게 입을 콱 틀어막았다. 그 며칠 사이에 조금 살이 올라 보송보송해진 얼굴을 한 태운이 옅게 속 쌍꺼풀이 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거리자 가녀리고 기다란 속눈썹이 날갯짓처럼 함께 팔락였다.
그리고 그 상태로 고개를 살포시 기울이며 바라봐 오자 이건 바로 게임 오버였다.
‘미친.’
사실 그동안은 늘 퀘스트를 빨리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예감이 본능적으로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어깨를 넘겨 늘어트린 긴 머릴 신나게 흐트러트리며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머리통을 슥슥 쓰다듬은 시현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홀린 듯이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주먹만 한 만두를 태운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그러자 태운이는 아주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얌전히 제 머리통만 한 만두를 받아서 들고는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아, 씨. 귀여워.’
***
“으음… 귀여…. 응?”
시현은 순간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에 하얀 시트에 푹 파묻혀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고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러자 모던한 가구들이 심플하게 차 있는 방과 주변을 은은하게 밝히는 무드등이 눈 안 가득 들어왔다.
그것은 이곳이 제가 20년이나 넘게 살았던 현대라는 걸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아, 꿈이었구나.”
시현은 오랜만에 떠올린 과거의 기억에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입꼬리를 축 내려트리고 다시 뒤로 누우며 손을 올려 눈을 텁 덮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