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이곳에 돌아온 이래로 강하다는 느낌을 받은 자는 처음이었다.
건강해 보이는 구릿빛 피부에 백금발, 그리고 푸른 벽안을 지닌 남자는 위화감이 들 정도로 하얀 정복을 입고는 빙긋 웃으며 서 있었다.
“누구지?”
시현은 당장이라도 내공을 끌어 올릴 준비를 하며 긴장감을 팽팽하게 당기고 무릎을 슬쩍 기울였다.
언제 어디서 공격이 들어와도 바로 대응할 수 있는 자세였다.
그러나 남자는 시현의 경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들어 올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음? 저를 모르시나요?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만. 거기 규민 씨 오랜만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뒤에서 들려오는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에 시현은 고개를 돌려 규민과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겁 많은 그가 꽤 안정된 듯 보이자 시현은 벌써 주변에 뿌려 둔 기감을 갈무리해 슬쩍 옆으로 물러났다.
“흐음…. 유준 씨 때문에 온 건데, 의외의 인물이 있네요?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느긋하게 미소 지은 남자는 조금 놀랐다는 듯 과장스러운 손짓을 하더니 눈을 빛내며 시현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정시현입니다만.”
“오! 이름도 마음에 드네요. 저는 셰어 길드의 신류하라고 합니다. 유준 씨를 데리러 왔답니다.”
싱글싱글 웃으면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신류하는 이런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기품이 있어 보이는 남자였다.
마치 자신이 귀족이라도 된 듯 손짓 하나하나가 우아했는데 물론 시현은 오히려 그 모습이 시멘트투성이인 배경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느끼해서 금방 자리를 피하고 싶어질 뿐이었다.
“유준아. 따로 약속한 거야?”
“…아뇨….”
“들으셨죠? 유준이 오늘 퇴원했으니 안정이 필요합니다. 다음에는 ‘약속’부터 잡고 오시는 게 좋겠네요.”
시현은 피식 웃으며 약속이란 단어에 강세를 주고 빨리 꺼지란 눈빛을 가차 없이 쏘아 냈다.
안 그래도 뒤에서 미친 듯이 울리는 셔터 소리와 소란에 피곤해지려고 하는 참이었다.
“그럴까요? 그렇지만 빈손으로 그냥 갈 순 없고… 그렇다면 오늘은 시현 씨가 저와 함께 가는 게 어때요?”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시현은 제 또래로 보이는 재수 없는 남자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오만해 보이는 표정이 본인과 잘 어울렸지만, 시현은 그저 한 대 때리고 싶은 기분만 느끼고 있었다.
“됐습니다. 보니까 대단하신 분 같은데 저 같은 비루한 C급 헌터가 성에 차겠습니까? 그러니까 좀 비키시죠?”
“C급이요? 하하. 당신은 절 진짜 모르셨군요. 제겐 일정 등급 이하의 사람들이 경외하도록 만드는 패시브 스킬이 있어요. 그래서 보통은 당신처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하지 못한답니다. 거짓말도 못 하는 게 더욱 마음에 드네요.”
씨발.
시현은 되돌아온 상대의 말에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협회에 꼰지르진 않겠지 불안한 마음 반, 그냥 여기서 죽이고 증거 인멸 할까 욱하는 마음 반을 저울질했다.
‘불법을 저질렀다고 헌터증을 정지라도 시키면 안에 든 돈은 전부 다 동결일 테고 그러면 세워 놨던 계획도 죄다… 씨발.’
순식간에 쓸 수도 없는 숫자만 바라보며 손가락만 빨고 있을 미래가 눈앞에 촤라락 펼쳐지는 것 같았다.
“어떤가요? 오늘은 단란하게 이야기만 잠시 하도록 하죠.”
신류하는 더욱 활짝 미소 지으며 한 발 앞으로 내디뎌 거리를 좁혔다.
그때, 말릴 새도 없이 제 등 뒤에서 검고 진득한 살기가 훅 피어올랐다. 시현은 그 찰나에 반사적으로 금나수를 써 움직이려는 태운의 손을 잡아채고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태운아. 안 돼. 참자. 착한 네가 참아야지. 응?}
시현은 느끼해 죽겠는 앞과 살벌한 뒤 중간에 껴서 식은땀을 흘렸다.
태운의 살의는 진짜였다. 잠시라도 자신이 망설였으면 전투가 시작되고도 남았을 법한 분위기였다.
“저 개새끼가….”
“태운아! 어디서 그런 나쁜 말을!”
이라고 하기엔 무림인인 태운이 현대 한국의 욕을 어디서 배웠겠나 싶지만, 시현은 잔뜩 당황해서 침착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태운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기운을 타고 살벌하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태운아.”
“스승님….”
시현은 결국 태운을 슬쩍 당겨 안고 등을 토닥이며 진정하라고 주문 외듯 같은 말을 반복해서 내뱉어야만 했다.
자신도 죽일까 생각만 했던 거지 진짜 행동으로 옮기려 했던 건 아니었다.
앞으로 튼튼한 집을 구하고 태운이를 학교에 보내고 또 안락한 노후를 위한 준비도 해야 했기에 여기서 사고를 치면 제 아름다운 미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게 분명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경지로는 승패를 백 프로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 제일 문제였다.
“호오…. 이런 인물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니. 신기하군요.”
“저! 신류하 님!! 그 아무래도 저희가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정확히는 이분들은 아직 저와 계약 관계기 때문에 나중에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신류하가 눈을 빛내며 말끝을 늘이자 규민이 절절대며 급하게 대화를 잘라 냈다.
그러자 신류하는 고운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가 다시 싱긋 웃어 보였다.
“어차피 단기 아닙니까? 그쪽에서도 스카우트에 조건을 내걸었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하하 그럼 상관없는 거 아닙니까! 혹시 몸 둘 바를 몰라 그런 거라면 제가 시간을 좀 드리지요!”
남자는 대체 얼마나 마이페이스인 건지 사방이 시끄럽게 뒤집히고 상대방이 계속해서 돌아가라 돌려 말을 해도 제 얘기만 하고 있었다.
말리던 시현마저도 순간 다시 태운을 보내서 처리할까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어법이었다.
“…죽여야겠습니다.”
“연태운, 안 돼. 나 봐.”
시현은 무섭게 반들거리는 태운의 눈을 보며 양 볼을 찹 소리가 나도록 쥐어 잡고 고개를 내려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당장이라고 검을 뽑아 들려고 하던 태운의 표정이 사르르 풀리고는 방금 일은 꿈이었다는 듯 무척 슬픈 표정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저것이 자꾸 스승님을 제게서 빼앗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시현은 급격히 피로해짐을 느꼈다.
뺏긴 뭘 뺏냐고, 이놈 자식아.
그러나 튀어 나가려던 태운이 얼추 정신은 차린 듯해 한시름 놨던 시현은 생각지 못한 복병이 남아 있던 걸 간과하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저, 저는 앞으로도 시현이 형이랑 같이 있을 거예요! 아무 데도 안 가요!!! 그러니 앞으로도 찾아오지 아,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변으로 아주 찰나간 정적이 흐르다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셔터음이 터져 나왔다.
시현은 허탈하게 웃음 소릴 내고 힘없이 이마를 쥐어 잡았다.
“하, 하하….”
유준 나름대로 상황을 모면해 보려 용기 있게 내던진 말 같았지만 그건 흥건한 기름 위로 폭탄을 내던진 꼴밖에 되지 않았다.
-미친, 특종이다!! 셰어 길드를 깠어.
-뭐야, 설마 재각성의 비밀이 시현이라는 사람한테 있는 거 아니야?
-당장 정시현이 누군지 알아봐!
시현은 제 귓가로 때려 박히는 제 이름의 향연에 태운이를 말리던 것도 잊고 고개를 푹 숙이며 멍하니 속삭였다.
“제발…. 다 그냥 꺼져 줬으면 좋겠다….”
시현은 기구한 제 인생을 한탄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뭔가 이리저리 치이는 것 같은 자신을 동정할 수밖에 없었다.
***
그날 이후 조용히 묻혀 가는 듯했던 시현의 이름이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마치 시현에게 재각성의 비밀이 있다는 듯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몇 개 없던 기사들이 흐름을 타자마자 우후죽순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평생 하루에 두세 번 이상 울린 적 없던 전화기가 이제는 켜 놓지도 못할 정도로 연락을 쏟아 내고 있었다.
‘사람 대가리나 덜렁 날려 봤지 내가 누굴 뭘 시켜?’
아직 서울로 떠나지 않고 강원도 호텔에 머물고 있던 시현은 제 주변을 바글바글 채우고 있는 얼굴을 휙 둘러보다가 매끈한 미간을 팍 찡그렸다.
그리고 곧 규민이 내민 태블릿 화면을 다시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안 그래도 태운이 때문에 머리 아픈데, 하아….’
게다가 매일 찾아오는 신류하까지. 대체 왜 저러는지 정말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형, 죄송해요…. 괜히 제가 말을 잘못해서….”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거 없어.”
시현은 한껏 축 처져서 눈도 못 마주치고 자책하고 있는 유준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다시 속으로 욕지기를 읊조렸다.
그래, 어린 유준이 탓이 아니라 자세한 상황 확인도 없이 기사부터 써 재끼고 있는 기레기들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저희 길드로 오십시오. 저희 쪽에서 언론 정도는 통제해 드릴 수 있답니다. 시현 씨!”
“그쪽도 잘한 거 없으니까, 입 좀 다물죠?”
“하하. 입은 나름 제 장점이라 그건 조금 힘들겠군요. 다른 조건은 또 없습니까? 최대한 맞춰 드리겠습니다.”
“그럼 당장 나가세요.”
“하하, 저런. 그것도 죄송하지만, 불가능하겠군요.”
시발. 대체 저 새끼는 왜 맨날 찾아와서 속을 뒤집어엎는단 말인가.
시현은 차게 식은 눈으로 능글대며 미소를 짓고 있는 어두운 얼굴을 노려보다가, 삼인용 소파임에도 불구하고 제 옆에 딱 달라붙어 답답하게 만들고 있는 태운을 밀어 냈다.
저 남자가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게 벌써 3일째였다.
당연하게도 그의 행방은 말도 안 되게 타오르는 소문에 강풍기를 들이미는 격이었다.
처음엔 말없이 찾아왔길래 당연히 개무시하며 상대도 해 주지 않았었다. 그러나 저 관종 자식은 기자들에게 사진 찍히는 걸 즐기는지 들여보내 줄 때까지 시현의 객실 창가에 둥둥 떠서는 더욱 소문을 부풀리고 있었다.
“하아….”
시현은 [j씨가 가지고 있는 비밀 대체 뭐길래? - 셰어 길드의 신류하가 매일 찾아가는 이유]라는 거지 같은 기사 제목을 슬쩍 보고는 마른세수하며 다시 한번 속으로 욕설을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