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재각성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뜨겁다 못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주변에 관심 없는 시현마저 느낄 정도로 폭풍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제게는 연태운이라는 당장 눈앞에 닥쳐 있는 일이 있었기에 더 신경을 기울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 어떡하지.”
똑똑.
“스승님. 식사는 하셔야지요.”
“어어….”
그때 쭈그려 앉아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시현의 귀에 작은 노크 소리와 태운의 목소리가 닫힌 문을 넘어 들려왔다.
시현은 성의 없이 대답하며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불안감을 짓눌렀다.
“안 나오십니까? 부술까요?”
이런 미친,
시현은 제 상념을 단번에 까 버리는 말에 후다닥 일어나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 앞에 다소곳하게 양손을 맞잡고 서서 방긋 웃고 있는 새하얗고 예쁜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빽빽하게 자리한 속눈썹은 팔랑이며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고, 완벽하게 조형된 입술은 붉게 빛나며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시현은 눈썹을 축 내려트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하는 짓이 얄밉고 상황이 개탄스러웠지만 이러는데도 태운이가 도통 미워지지 않는 게 제일 문제였다.
‘달라붙는 거만 좀 덜하면 그나마 괜찮을 텐데…. 이놈의 불량 학생 같으니라고.’
그때 시현의 핸드폰이 무거운 침묵을 떨치고 요란스럽게 울려 댔다.
“여보세요?”
-형님! 유준이 깨어났답니다!
시현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이어지는 병실 호수와 병원 위치를 자세히 듣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통화를 끊자마자 지도 앱을 켜서 위치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태운아. 유준이 깨어났대. 가자.”
“아.”
그러나 태운의 내키지 않는단 단말마 같은 짧은 표현에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태운은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점점 내리며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현은 조금 당황한 채로 급하게 입을 열었다.
“상태만 보고 바로 오자. 알았지?”
“음…. 좋아요.”
“그래….”
절로 한숨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태운은 다시 수줍은 척 슬쩍 시현의 손을 잡고 살살 눈웃음을 치며 방긋 미소 짓고 있었다.
이쁘긴 이뻐 가지고, 에휴.
시현은 결국 이마를 쥐어 잡으며 깊게.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작게 소란이 있고 난 후. 아무도 없는 병원 복도에 커다란 남자 두 명이 조용하게 발을 내디뎠다.
가뜩이나 조용한 공간이었음에도 발소리 하나 나지 않아 병원은 여전히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어, 형님! 태운 님! 빨리 오셨네요?”
그때 병실 문을 열고 나오려던 규민이 시현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휙휙 흔들었다.
“형…?”
“어, 유준아. 괜찮아?”
시현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규민에게 인사를 남기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유준은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양 뺨이 옅게 상기된 게 오히려 평소보다 더 혈색이 좋아 보이는 것 같았다.
“형! 저 A급이 됐대요! 믿기지 않아요… 어떡하죠?”
“축하해.”
유준은 잔뜩 신이 난 목소리였지만 아직도 주눅 든 느낌을 완전히 버리진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잠깐 사이에도 끝없이 핸드폰 진동이 울려 대는 게 아무래도 재각성 때문에 사방에서 유준을 찾는 것 같았다.
“근데 조금 불안해요…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계신다고 하고….”
“음… 그건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걱정하지 마. 정 안 되면 도와줄게.”
조금 겁주면 도망가겠지.
시현은 조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시무룩해 있는 유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올렸다가 멈칫하고 슬쩍 도로 내렸다.
바로 앞에서 빤히 제 손을 보고 있는 태운이를 향해 어설프게 씩 웃은 시현은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흩어 내려 화제를 돌렸다.
“근데 대체 뭐 어쩌다가 각성한 거야? 나는 못 봐서 모르겠네.”
그러나 그것은 좋은 주제 선택이 아니었는지 시현을 빼고 세 명의 표정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
“형이… 쓰러져 있는 걸 보니까, 자괴감도 들고… 슬프고. 그래서….”
유준은 그런 상처를 실제로 보는 게 처음이었다. 오죽하면 그 상황이 흐릿하게 떠오를 정도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살의라는 걸 느꼈다고, 그래서 재각성의 기폭제가 된 것 같다는 말을 숨기고 말을 이었다.
‘아니, 안 죽었으면 됐지 뭐….’
시현은 왠지 제가 대역 죄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저를 보는 세 쌍의 눈빛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만족해?”
“아! 네, 그리고 저 클래스도 바뀌었더라고요. 원래는 그냥 솔저였는데 이제 히든슈터예요.”
시현은 주변의 시선들을 깔끔히 넘겨 버리곤 다시 한번 주제를 틀었다.
그러자 이번에 올바른 방향이었는지 조금 표정이 풀린 유준의 말에 시현은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가려져 있는 게 히든슈터구나.’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띄웠던 유준의 상태창을 확인하며 가려져 있는 부분을 흘끗 바라봤다.
서유준-□□□□(A)
칭호-두 개로 나누어진 자
칭호의 의미는 딱히 모르겠지만 자신의 칭호도 딱히 알 수 없는 단어의 나열이었기에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재각성이라니 유준이 너 드림워커라고 그랬지?”
“예…. 그래서 그런데, 그것 때문에 재각성이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어?”
유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제가 꿨던 꿈에 대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게임을 하고 있었어요. 근데 순간 눈을 떠보니까 이상한 곳인 거예요.”
시현은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유준이 설명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뭔가 제가 겪은 일과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주변에 있던 외계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어요…. 저도 막 몸이 이상했고.”
“고생했겠네….”
“…네 사실은 정말 무서웠어요. 그들이 자꾸 인간을 과녁에 걸고 총을 쏘라고 했었거든요…. 그걸 제가 어떻게 해요…. 그래서 계속 숨어 있었고….”
그러니까 고도화된 미래 배경과 군인으로 보이는 제 차림새, 그리고 다짜고짜 쥐여 주는 총에 15살이었던 아이는 도망치듯 숙소에 숨어 있는 게 다였던 거다.
시현은 처음 듣는 남의 꿈 얘기에 신기함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을 부려 먹던 퀘스트가 모든 꿈에서 나타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그 퀘스트의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느낌상 신의 광산에서 느꼈던 것과 가장 비슷한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똑같은 느낌은 아니라 조금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래서 제가 거기서 하라는 대로 안 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지금이나마 각성한 게 어디예요. 이제 저 형한테 도움이 되겠죠?”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시현은 이어지는 유준에 말에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뭘 도움이야. 애들은 그냥 놀아.”
“우읏…. 그래도요….”
조금 발끈한 유준이 어깨를 들썩이며 반박해 오자 시현은 마치 어렸을 때의 태운이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어린 태운이는 어찌나 제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지 밤에는 무섭다며 이불을 들고 찾아들어 오면서도 낮에는 꼭 뭐라도 하려고 분주하게 제 주변을 맴돌곤 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기특하고 귀여워서 하얗고 통통한 찹쌀떡 같은 볼따구에 잔뜩 뽀뽀해 주고 마구 괴롭혀 줬던 기억이 살살 떠올랐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시선이 돌아갔다.
‘….’
그러나 저를 무서울 정도로 뚫어지게 응시하는 붉은 눈을 보고 있노라면 예전의 추억이 조금 변질되는 것 같았다.
그 귀엽고 물정 모르던 애가 어찌….
“하여튼 밖에 앉아 있을 테니까 퇴원 준비 마저 하고, 일단 저 핸드폰 좀 어떻게 해야겠다.”
시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지금도 간헐적으로 울려 대는 핸드폰을 바라봤다가 결국 유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 병실 밖으로 발을 옮겼다.
“혹시 규민 씨네 길드에서 유준이 데려갈 순 없습니까?”
유준이 마지막 검진을 받으러 떠난 사이 시현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불안해하던 유준을 떠올리며 말을 꺼냈다.
잠시간이었지만 며칠간 함께 지냈던 글로리 길드원들은 꽤 정도 많고 바른 이들이었다.
특히나 김성빈 대장은 능력도 꽤 출중해서 시현조차 만약 길드를 선택한다면 들어가고 싶은 분위기였기에 유준도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으음…. 사실 최종 결정권자는 회사라서요. 저도 유준이 너무 데려가고 싶지만, 결재를 올리고 확인을 좀 해 봐야 합니다.”
“그렇군요….”
그러나 규민은 선뜻 알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회사에 결재를 받아야 하는 것도 맞는 말이긴 했지만, 그전에 제 속에서 커져 버린 의심을 해결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 당시엔 절대 아닐 거라 단언했지만 대체 왜 제게 사실을 숨겼는지 그리고 왜 제가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을 말렸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계속 죽어 나가는 걸 알면서도 계속 소수로 이루어진 파티를 들여보내는지.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왔다.
처음 형이 공략을 실패한 후 무언가를 알았다는 듯 다시 소수의 인원을 들여보낼 땐 분명 뚜렷한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은 각성하기도 전이라 무언가 말을 얹기는 힘든 위치기도 했고.
‘형…. 대체 왜.’
진짜로 시현과 태운이 없었으면 자신과 길드원들은 다 죽었을 거다. 아무리 능력이 좋다고 해도 지친 상태로 몇 배나 되는 인원을, 게다가 다시 살아나기까지 했던 것들을 상대하긴 힘들었을 테니까.
그러나 규민은 우후죽순처럼 커지는 상념을 내리누르고 밝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제가 직접 체크는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유준이랑도 친해져서 그런지 저도 자꾸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아! 다행이네요.”
어쨌든 아직까진 심증뿐이었다.
***
유준의 퇴원 수속이 끝나고 네 명의 일행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촤차차차착!!
그러나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터지는 셔터 소리와 플래시 세례에 시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있던 층은 헌터 전용 층이었기도 했고 옥상으로 들어왔기에 아래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냥 아래엔 환자들이 많구나 싶었지, 저게 다 기자들일 줄이야.
“서유준 씨!!! 재각성의 비밀을 밝혀 주실 의향이 있습니까!!!”
“저 sbc에서 나왔습니다! 재각성에 다른 특정 계기가 있었던 겁니까!”
“재각성한 뒤에 다시 공식 테스트를 받을 의향이 있습니까!!”
사방이 유준의 재각성 사실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 찼다. 시현은 멈칫하며 잘게 손을 떠는 유준을 발견하고 기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형님, 그냥 가시죠. 저 사람들 헌터부 기자들이라 무서운 것도 없어요. 그냥 저희가 피하는 게 빨라요.”
그러나 시현은 이어지는 규민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고는 유준을 슬쩍 가려 주며 규민의 뒤를 따라 건물 뒤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흠칫.
그러나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않은 상황. 시현은 앞에서 느껴지는 위험한 감각에 앞서 있는 규민의 뒷덜미를 잡아채 뒤로 당기고는 고요하게 서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