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제가 하아, 좋다고 했잖아요. 평생 떠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흐윽.”
자꾸만 호흡이 턱턱 막혀 와 태운의 말이 단숨에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중간 끊어졌다. 작게 속삭이던 말과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깨물었던 입술이 트득 하고 찢어지며 새빨간 핏물이 흘러나왔다.
태운은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핏기가 자신을 온통 적시고 있는 핏물에 섞여 갈 때까지 입술을 뜯는 걸 멈추지 못했다.
“태운아! 숨, 숨 쉬어. 윽…. 입술 깨물지 말고. 진정해.”
시현은 그런 불안정한 태운을 한눈에 알아채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멀쩡하지 않은 제 손끝을 보며 멈칫했다가 그나마 조금 깨끗해 보이는 손등으로 태운의 입가를 톡톡 두드렸다.
“미안해. 그래도 네가 다치는 것보단 나아. 많이 안 다쳤지?”
아아. 당신이란. 늘 이렇듯 제 더러운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나를 꺼내 든다.
태운은 제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는 시현의 손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마치 경건해 보일 정도로 간절하게 다시 입술로 가져다 대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그래도 받아 주실 거잖아요. 그렇죠?
“…태운아?”
시현은 순간 당황하며 손끝을 움찔댔지만, 단단히 잡고 있는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렇게 계속 붙들려 있어야 했다. 입술에 닿아 있는 손등이 뭔가 화끈거리고 신경 쓰였다.
이게 무슨….
그 순간 태운의 눈동자와 정통으로 마주치며 시선이 진득하게 이어졌다. 어두컴컴하게 내려앉은 붉은 눈동자에서 그 속내가 해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가지는 감정이 그저 스승을 향한 경애와 공경이 아니라 더욱더 진득하고 어두운 무언가라는 걸.
다른 이들이 저 보석 같은 눈동자를 왜 핏물 같다고 그리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태운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 붉은빛 안으로 반항도 못 하고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시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머리로 열이 몰렸다. 그동안 늘 봐 왔던 얼굴이었건만 너무 낯설은, 그러니까 마치 다른 사람의 것만 같았다. 자꾸만 숨이 가빠졌다.
그때 그동안 느꼈던 미묘한 이상들이 수없이 겹치며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아른아른 떠오르며 형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자꾸만 내 이름을 알지 않냐고 질문을 해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현은 그것의 이름을 모른 척 저 멀리 숨겨 버렸다.
‘이게. 대체….’
시현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채 그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듯이 흔들리던 눈동자가 급급하게 허공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태운의 붉은 눈이 희열로 잔잔히 차올랐다.
‘스승님은 처음부터 저 같은 건 구하지 마셨어야 했습니다.’
태운은 은근히 몸을 떨어트리려고 움찔거리는 시현의 몸을 다시 조심스럽게 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박았다.
그리고 피로 젖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볼을 천천히 부비며 눈을 예쁘게 접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시현은 그런 태운의 등을 평소처럼 안고 쓸어내리지 못했다.
***
게이트를 나가는 길은 들어올 때에 비하면 허무할 정도로 손쉬웠다. 이동과 체력 등에 좋은 온갖 버프를 바르고 이미 어느 정도 만들어진 지도를 보면서 따라가다 보니 잘 꾸려진 파티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그러나 문제는 가는 길에 있는 게 아니었다. 태운은 평소처럼 시현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물론 평소와 다를 건 없어 보였지만 상황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시현은 제 배 위로 둘러져 있는 예쁜 손에 괜히 식은땀이 나고 허리가 딱딱하게 굳는 걸 느끼며 어색해진 발걸음을 힘겹게 옮겼다.
“그…. 태운아. 좀 떨어질래?”
“왜요?”
“불…. 편한데.”
“가다가 또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시현은 결국 더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바짝 달라붙어 둘러 안은 채 걷고 있는 태운을 손으로 슬쩍 밀어 내며 널찍하게 거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겨우 만들어진 공간은 금세 사라졌다.
“…왜 자꾸 절 피하세요?”
“아니, 내가 뭘 피해…”
“흐음….”
태운은 잠시 무언가를 가늠하듯 고개를 기울인 채 바라보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게 빙긋 미소 지으며 틈 없이 달라붙어 왔다.
얼핏 찢어진 소매 안으로 드러난 흰 팔뚝 위에 힘줄이 돋는 게 보였다.
끄응….
괜히 주변을 슥 돌아본 시현은 어느 누구도 뒤쪽에 치우쳐진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자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있었던 사고 이후 시현은 태운을 편하게 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바보도 아니고 그때의 그 얼굴을 보고 난 뒤엔 그 애의 감정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말이 안 되지 않나. 자신은 그 애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업어 키운 부모나 삼촌 같은 존재였다.
그게 무려 10년이었다. 아무래도 큰 충격을 여러 번 받아서 착각하는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좋게 돌려서 타일러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사실 어제 내내 제가 입만 열면 자꾸 눈물을 흘려 대는 통에 주제를 꺼낼 타이밍도 놓친 상황이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태운이도 정확히 입 밖으로 꺼낸 건 아니라서 이걸 다시 끄집어 와서 말을 하는 것도 민망스러웠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아.’
그리고 이제는 대놓고 애정을 갈구하는 붉은 눈을 볼 때마다 마치 그동안 제 나름대로 열심히 쏟아부었던 애정이 모자랐던 건가, 해 주어야 할 것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하고 있었던 건가 하는 자괴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시현은 다시 한번 과거의 10년을 돌이켜 보며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됐나 되새겼다.
그래 봤자 속 시원한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생각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갑자기 들이치는 태운의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릴 것 같았다.
“스승님.”
“어어?!”
그때 귓가로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정통으로 박혀 들었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어 올려 귀를 대뜸 틀어막았다.
“하하.”
그러자 조금 유쾌한 듯하면서도 뭔가 비틀린 것 같은 감정이 실린 웃음소리가 가까이에서 터져 나왔다.
식은땀이 날 것만 같았다.
…미치겠다.
연태운은 마치 어떤 버튼이 눌린 것처럼 하는 짓이 급속도로 이상해지고 있었다.
사실 다시 만나고 나서부터는 조금 바뀌었구나,그리 생각하긴 했지만, 예전에도 안겨 오거나 애교를 부리는 건 간혹 있었던 일이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다.
이제는 아니었지만.
시현은 다시 한번 허리에 올려져 있던 손이 슬금슬금 움직이는 걸 단숨에 잡아채고는 이를 악물었다.
‘당장 가서 영상부터 훑어봐야겠어.’
당장 제게는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동 행동 교정 선생님의 영상이 간절했다.
그래, 저번에 봤을 때 너무 힘든 일을 겪다 보면 제일 가까운 이에게 집착하는 감정이 들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도 나를 조…조조조좋,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게 확실해.’
으으, 젠장.
시현은 매끈한 목덜미를 옅게 물들이며 스멀스멀 차오르는 자괴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게이트 안에 들어와 뒈질 뻔도 했지만, 그 모든 일들은 머릿속에 한 톨도 남아 있지 못했다.
그저 ‘태운이가 왜 갑자기 저럴까, 다 내 탓인가? 아, 내 탓이구나’ 이 세 가지 명제가 돌림노래처럼 울려 퍼질 뿐이었다.
시현은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멈칫.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아랫입술을 피 나기 직전까지 짓이겼다. 그때 하얀 손끝이 아랫입술을 당기고 지긋이 문지른 뒤 떨어지면서 시현의 사고가 덜컥 멈췄다.
시현은 부들부들 떨면서 차마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작게 윽박질렀다.
“너, 너!!! 진짜 하지 마!!!”
“싫습니다. 스승님도 늘 마음대로 하시지 않습니까. 안타깝지만 제가 배운 것도 그런 것뿐이라.”
태운은 시현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말대꾸했다. 시현은 난생처음 보는 태운의 불량한 모습에 허탈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음?’
그때 제 허리를 휘감고 있던 태운의 손목 안쪽, 작게 갈라진 상처가 보였다.
시현은 순간 지금 어떤 상황이었는지조차도 까먹고 얼굴을 굳힌 채 태운의 손을 덥석 잡아 올렸다.
“이거 뭐야! 언제 그랬어.”
“음, 모르겠어요.”
“하아… 돌겠네.”
시현은 급하게 주머니에서 아까 쓰고 남았던 포션 병을 집어 들고 상처 위로 냅다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잘 아물었는지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흡수되지 않고 겉에 흥건한 약물을 닦아 내려고 소매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제대로 움직이기도 전에 태운의 팔이 시현의 몸통을 덥석 안아 왔다.
“너무 좋아요.”
시현은 순간 아차 한 얼굴이었지만 해맑게 웃고 있는 하얀 얼굴을 보며 금방 체념하곤 태운의 팔뚝을 작게 토닥였다.
아무리 그래도 다치고 힘든 애를 밀어 낼 정도로 못돼 처먹진 않았으니까.
***
탁. 타닥. 타다다다닥!
널찍한 방 안에 위치한 컴퓨터의 키보드 위로 단정한 손가락이 미친 듯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키우다시피 한 애가, 어…. 옆집 동생이 있는데…. 갑자기, 스킨십이 심해지고…윽.”
시현은 질문할 내용을 빠르게 적어 넣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민망함에 뜨거워지는 목덜미를 슥 문지르며 다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20대 중반 성인입니다….
일단 제가 거의 키우다시피 한 옆집 동생이 하나 있는데요.
스킨십도 너무 심해지고 아무래도 저를 좀 좋아하는 것 같아요…. 물론 진짜가 아니란 건 압니다. 어려서 착각하는 거겠지요.
근데 제가 좀 상처를 준 게 있어서…. 막 나쁘게 말하고 싶진 않아요. 좋게 설명하려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없고…. 이런 건 진짜 하나도 몰라서 글 올려 봅니다….
탁!
질문을 완성하고 엔터를 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복잡한 작성자의 마음과는 달리 경쾌한 소리였다.
그리고 시현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답글이 올라오길 기다렸다.
-네 다음 망상.
-아저씨 밖에 나가서 해 좀 보고 하세요.
-예쁨?
“에이 시발, 사회성 뒤진 놈들. 맨날 거짓말하는 것만 처봤나.”
그러나 달린 댓글이라고 이딴 것뿐이었다.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관련해서 검색을 해 봐도 영상을 찾아봐도 자신을 납득시킬 만한 답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시현은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아래로 새로운 답변이 하나 더 달렸다.
-근데 이거 진짜면 당연히 당장 거절해야 하는 거 아님? 어린애가 그런 거라고 지도 써놓고선 이리저리 핑계 대면서 진심으로 고민하는 거? 웩 최악.
시현은 결국 냅다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쥐어뜯었다.
“최악이라니….”
그리고는 방 밖에서 자신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태운을 떠올리며 얼굴을 감싸 쥐고 쭈그려 앉았다.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지 고작 하루. 그동안 정말 수많은 일이 일어났다.
실종됐던 길드원들을 데리고 나오자 어느 누구도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입구는 무척이나 썰렁했다.
그러나 상주하는 직원의 연락으로 급하게 구급차와 차량이 준비됐고, 여전히 기절한 채 들려 왔던 유준이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리고 어떻게 알고 나타났는지 하나둘씩 나타나는 기자들로 인해 유준의 재각성 사실과 시현, 태운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물론 재각성이라는 타이틀이 무척이나 충격적이라 그 이외의 모든 사실이 덮이긴 했지만 말이다.
-미친. 재각성이라니. 나한테도 가능성 있는 거냐?
-ㅈㄹ 그게 너 같은 새끼한테 가능하겠냐?
-근데 재각성자 원래 드림워커였다는데? 하 존나 상대적 박탈감 지린다.
-와…. 재 각성이라니. 비결이 뭘까.
-이름 서유준, 15살 c급이었단다. 들어 보니까 각성 능력 존나 쩐다던데 등급 뭘로나올까
-A급 나오겠지 뭐.
-그래도 우리나라에 A급 하나 더 느는 거 아니냐. 그럼 진짜 전 세계에서 한 손안에 드는 거임. 국뽕 지리네.
-어케했누 ㅅㅂ 나도 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