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시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괴물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유심히 살펴본 결과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자는 내공이나 내부의 기운을 쓰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육체에서 나오는 힘으로 저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고 있는 거였다.
‘무식한 새끼.’
“흐으….”
그때 제 앞에 누워 있던 유준이 작게 숨을 멈추고 몸을 덜덜 떠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시현은 그제야 이 상황이 애들이 보기엔 조금 안 좋은 광경이라는 생각이 들어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그리고 정면을 보고 있던 시현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언제부터였는지 저를 말간 얼굴로 보고 있던 태운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고작 20살짜리 애가 저런 광경을 두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게 제 탓인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아팠다.
시현은 더 이상 이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새 두 명의 인간들이 망치 아래에 분쇄되고 이제 다시 한번 다른 사람에게 망치를 떨어트리려는 순간. 시현은 손끝으로 내기를 모아 앞으로 단숨에 쏘아 보냈다.
까앙-!
“rklsoey!!”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미친놈아.”
지강을 쏘아 냄과 동시에 로켓처럼 튀어 나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시현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쓰걱!
망치를 휘두르던 힘에 비하면 스피드는 한심할 정도로 느렸다.
시현의 눈에는 배속을 낮춘 영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순식간이 제일 허접하게 기워져 있던 한쪽 팔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sddddd!!!”
동시에 괴로움에 가득 찬 외침이 연신 역겨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너, 너흰 누구…! 크헉!”
“어?”
뭐 하나 규칙도 없이 미친놈처럼 달려드는 괴물 같은 놈을 손쉽게 상대하던 시현이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문장에 순간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나 자신을 스쳐 가는 희끄무레한 형체가 로브 입은 남자를 머리부터 하반신까지 단번에 두 동강을 내며 상황을 정리하자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현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곤 진득한 액체가 허공에 뿌려지고 갈라진 두 덩이가 시간 차를 두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을 때, 시현도 앞에 있던 놈의 머리에 칼끝을 단번에 쑤셔 박으면서 전투를 마무리했다.
곧 몸부림치던 몸뚱이가 얌전해졌고 깊게 박힌 칼을 쑥 뽑아내자 거대한 덩치가 바닥에 처박히듯 쓰러지며 먼지를 피워 올렸다.
“태운아…. 그”
시현은 단서를 뽑아내기도 전에 적을 죽여 버린 태운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어찌 됐든 도움을 주고자 움직인 것일 텐데 핀잔을 주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앞으로는 제가 말하기 전까지 먼저 움직이지 말라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잔뜩 울상을 한 태운에 시현은 결국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모난 데 없는 기다란 손가락이 천천히 시현의 손가락 사이로 얽혀들고 평소보다 더 세게 쥐어졌다.
“스승님… 얼굴에 피가….”
“어…. 이거 내 피 아닌데?”
“불결하지 않습니까….”
태운은 자신의 앞섶도 피로 조금 물들인 상태면서 제 옷의 가장 깨끗한 상의 끝을 작게 찢어 내 시현의 얼굴 위로 튄 핏방울을 문질러 닦아 냈다.
아니, 태운아. 네가 더 심한데….
시현은 태운의 모습을 보며 조금 떨떠름하게 웃다가 살짝 흐트러진 태운의 머리카락을 조금 정리해 주고 손등으로 피가 튀긴 태운의 목덜미를 닦아 냈다.
그러자 태운은 눈을 반쯤 내리뜨고는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수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웩! 우윽!”
그때 뒤에서 작게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흠칫 어깨를 움찔댄 시현이 급하게 시선을 돌려 유준과 규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괜, 괜찮아요….”
“어우…. 그, 으윽. 형님 대단하시네요….”
규민은 은근슬쩍 눈을 피하면서 멀찍이 떨어져 입만 움직이고 있었고 얼굴이 허옇게 뜬 채 입가를 가리고 있던 유준은 어떻게든 의연해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눈이 잔뜩 흔들리는 게 아무래도 전투 현장을 죄다 보고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으음….’
이런 장면은 예상하지 못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볼만 긁적였다.
특히 유준이는 테스트가 아닌 실제 게이트는 처음이었을 텐데 시작부터 이런 모습을 보여 준 게 조금 미안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보고 있던 성빈은 멍하니 서서 튀어나오려는 경악성을 애써 눌러 담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저 둘의, 특히 검은색 옷을 둘러 입은 비현실적으로 생긴 남자의 손속이 너무 잔혹하고 망설임이 없어 자신조차도 바닥을 나뒹구는 몸뚱이들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었다.
…작게 조각난 것들도 몸뚱이로 친다면 말이다.
“그, 일단 길드원들을 다 깨워 볼까요?”
시현은 어색해져만 가는 분위기에 찔끔찔끔 웃고 있다가 결국 화제를 전환하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도 이런 상황에선 뭘 어째야 할지 몰라 자꾸 표정이 굳어 가기만 했기에 일이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system: 퀘스트 갱신- 축하합니다! 히든루트를 발견했습니다. 악에 물든 왕자를 처치하십시오.]
시현은 이제 막 다 눈을 떠서 감격의 해후를 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게 뭘 의도하고 자꾸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길드원들을 다 찾아낸 마당에 퀘스트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제 남은 건 모두를 잘 추려서 밖으로 빠져나가면 이번 일은 끝이었다.
“그…. 정시현 님이라고 하셨죠. 방금 자초지종은 다 전해 들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저희를 구하러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부산스럽게 부상당한 몸을 추리며 인원을 체크하던 길드원들이 시현에게로 다가와 꾸벅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시현은 뭔가 모를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에 쭈뼛대며 서 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감사 인사를 받는 건 예나 지금이나 영 적응이 되질 않았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시현은 잠시 예전 일을 떠올렸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나와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는 상처를 부여잡고 있는 이들에게 기운을 날려 상처 주변을 점혈하고 지혈을 도왔다. 저 앞에서 작은 소요가 일었지만, 시현은 입을 딱 다물고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 모습을 태운은 제 눈으로 또렷하게 담고 있었다. 시현은 또 몰래 주변을 돌보고 있었다. 떨어져 있던 동안 전투를 쉬었다고 그새 시현의 오지랖 넓은 성격을 잊어버린 대가였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면 어떨까. 그리고 아무도 돕지 못하게 된다면.’
잠시 나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태운은 질척하게 꼬여 가는 심정을 숨기고 어디 한 군데 생채기도 나지 않은 제 몸을 둘러보며 작게 혀를 찼다. 전투의 상대가 먼지만큼 약해 빠져서 제게는 어떠한 피해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태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기로 둘러진 손끝을 휘둘러 옆구리를 찢어 냈다.
“흐음….”
그러자 붉은 속이 드러날 정도로 베인 상처에서 새빨간 피가 쏟아져 나왔다.
급소는 피해서, 대신 피는 많이 나도록 심혈을 기울여 부위를 갈라 낸 태운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걸고는 아직도 사람들을 체크하듯 바라보고 있는 시현에게로 다가갔다.
“스승님.”
“어. 태운아. 응? 잠깐만 너 피 나잖아!”
태운은 싱긋 웃으며 괜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어쩌다가 다친 거야!”
시현은 속살이 다 드러나 보이는 상처에 잔뜩 울상을 하고는 손도 대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예전에도 전투를 하다 간혹 상처를 입고 아팠던 적이 있던 태운이었다. 그때도 그랬는데 현실로 넘어와서 능력치가 깎이고 상황은 안 좋아졌으니 더 많이 상처 입게 될 게 뻔했다.
그것을 간과한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봤다면 로브 입은 남자가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겠지만, 시현은 너무나 아파 보이는 상처에 혼이 쏙 빠져나간 상태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저기 힐러님한테 치료해 달라고 하자.”
“스승님. 저는 진짜 괜찮습니다. 이미 지혈도 다 됐는걸요.”
“그렇지만….”
태운은 잠시 어지럽다는 듯 시현의 품에 안겨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낯선 이는 아직 불편합니다…. 죄송합니다….”
시현은 아차 하고는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하나를 떠올리면 하나를 잊고 또 하나를 생각하면 나머지 하나를 까먹었다.
바보 같은 제 행태에 작게 자책하던 시현은 벌떡 일어나서는 강아지처럼 낑낑대는 태운을 그 자리에 두고 규민에게 갔다가 작은 병 하나를 받아 왔다.
“이거 치료 약이래. 이거라도 발라 그럼.”
“… 그것보다 계속 제 옆에 있어 주세요. 스승님.”
“쓰읍. 빨리 옆구리 대.”
애기 때도 이 정도로 어리광 부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잔뜩 흔들리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자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나 시현은 마음을 다잡고 엄하게 말을 하며 제게 찰싹 붙어 있던 태운을 돌려 앉혔다.
태운은 마지못해 시현에게서 떨어져 등을 바로 세웠다. 그래도 스승의 관심이 온통 제게로 집중되어 있었으니 이 정도는 참을 만했다.
“그래도 급소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러게요.”
시현은 상처 위로 물약을 뿌리면서 다른 곳에는 더 상처가 없나 태운의 몸을 샅샅이 뜯어보기 시작했다.
‘음…. 근데 얘가 언제 이렇게 컸지?’
그리고는 제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태운의 등치를 보며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뭔가 뿌듯한 것 같으면서도 벌써 이렇게 커 버린 게 아쉽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 병을 죄다 상처에 들이부으며 작게 감상에 빠졌던 시현은 다시 한번 틈 없이 자신을 안아 오는 태운이를 마주 안아 주며 길드원들이 준비를 완료하길 기다렸다.
“자 버프 걸겠습니다! 모여 주세요!”
그때 마침 출발 준비가 끝났는지 하나둘씩 일어나던 길드원들 사이로 모이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시현은 버프라는 말에 조금 궁금증을 가지고 규민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버프란 거 뭘 걸어 주는 겁니까?”
“아, 형님은 모르시겠군요. 원래는 게이트 들어올 때 무조건 버프부터 걸고 움직이거든요. 지금 그걸 걸려고 하는 겁니다.”
시현은 정말로 게임 같은 시스템에 조금 들뜨는 마음을 내리누르며 꽤 훤칠하게 생긴 버퍼를 바라봤다.
그러나 주변 길드원들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모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은근히 시선을 돌리고 다른 짓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