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그럼 나머지 분들은 어떡할래요?”
“…저는 이 일의 책임자로서 그냥 놀고만 있을 순 없습니다. 그리고 길드원들이 알 만한 얼굴도 필요할 테고요.”
그러자 규민이 결의에 찬 얼굴로 마저 대답을 해 왔다.
모두 다 맞는 말이었다. 게이트 안은 가뜩이나 라이프 워치처럼 사람을 구별해야 할 아이템이 필요할 정도의 환경이었다. 그러니 둘이서 가 봤자 그들의 경계심을 키웠으면 키웠지 안전하게 데려오긴 힘들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안전 보장 조건만 아니었다면 죄다 기절시켜서 데려오는 건데….
시현은 슬쩍 눈을 굴리며 아쉽다는 듯 혀를 차고는 마지막으로 남은 일행에게 눈을 돌렸다.
“정훈 씨는 어떻게 하실래요?”
“으음….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다시 돌아가서 이쪽의 일을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여러분을 믿지만, 혹시 또 불가피한 상황으로 다시 실종되거나 구조에 실패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돌아오는 차정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사실 이 무리 중에 제 실력을 본 자는 규민뿐이었고 저 사람도 자세한 설명 없이 끌려온 걸 테니 자신이 엄청나게 믿음직스럽진 않을 터였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었기에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샀던 약품들과 보조 아이템들을 정리해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앞으로 길게 걸리진 않을 겁니다. 식량은 최소한으로, 길드원들의 상태를 모르니 약품 위주로 챙기시죠.”
시현은 차례차례 어딘가로 옮겨져 이제는 대략 50여 명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용병들을 보며 더욱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일행들도 시현의 속도에 맞춰 빠릿하게 움직인 덕분에 짐 정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저희 길드원분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의연해 보이던 차정훈이 손을 내밀며 인사를 전해 왔다.
비록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지만, 시현은 그것을 모른 척하며 손을 맞잡고 두어 번 흔든 뒤 몸을 돌렸다.
잠시간 자신마저 속였던 진법도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이제는 저 수상한 놈들의 뒤를 밟을 차례였다.
“형님. 혹시 계획이 있으십니까?”
“…일단 두 분은 태운이와 제가 각각 데리고 움직일 겁니다. 그렇지만 은신이 조금 문젠데. 제가 남의 기척까지 지워 줄 순 없어서요.”
“아, 그 문제라면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시현은 잠시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조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규민을 빤히 바라봤다.
규민은 조금 놀란 듯한 시현의 얼굴을 보며 조금 쑥스러워지는 마음을 얌전히 접어 넣고 제 스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 스킬 중에 동화라는 스킬이 있어요. 신체가 닿아 있다는 조건하에 주변과 기운을 동화 시켜 은신할 수 있는 스킬입니다. 대신 조금이라도 생명체와 닿으면 단번에 풀리지만요….”
생명체와 닿지만 않으면 된다니. 생각보다 놀라운 스킬이었다. 시현은 그제야 규민의 ‘어쌔신’이라는 클래스가 머리에 다시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그저 수다로 사람을 고문할 줄만 아는 줄 알았더니 알면 알수록 규민에게서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생명체 정도는 다가오기 전에 저희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 음…. 생각보다 우리 스킬 조합이 잠입에 잘 맞네요.”
어차피 여태까지도 늘 기운을 주변으로 퍼트리며 이동했기에 생명체 탐지 정도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이제 은신마저도 해결됐겠다, 시현은 이제 30여 명 정도밖에 남지 않은 용병들을 체크하고 유준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스승님…. 스승님이 그런 일을 하신다니요. 안 됩니다.”
“어?”
그때 얌전히 옆에 서 있던 태운이 시현의 어깨를 잡고는 나지막하게 말을 건네 왔다.
“아, 괜찮아 안 힘들어.”
“…그럼 제가 들겠습니다.”
“뭐, 그럴래? 그럼 내가 규민 씨 들게.”
시현이 유준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태운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듯 일그러졌다.
“제가 둘 다 들겠습니다.”
“뭐? 힘들잖아. 안 돼.”
“…그럼 그냥 그 애 드십시오. 저 남자는 제가 들지요.”
규민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자신도 태운에게 들려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불만을 흘리기도 전에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규민은 저절로 고개가 숙어져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주 잠깐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시현은 자신을 지극히 위하는 태운이를 보며 한번 흐뭇하게 웃어 주고는 그에게 짐짝처럼 들린 규민의 손을 잡았다.
[주변과 동화됩니다. 동화율 90%]
“오.”
시현은 손을 대자마자 눈앞에 떠오르는 알림창을 확인하곤 아무것도 변한 것 같지 않은 제 몸을 슥 한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 스킬의 또 다른 단점을 알아냈다. 기척과 모습을 지워 줄 순 있으나 사람이 가진 내부의 기운을 가리지 못했다.
아무래도 저와 같이 내공을 쓰거나 그런 비슷한 류의 훈련을 한 자라면 금방 눈치를 챌 것 같았다.
‘물론 인지하기 전에 나나 태운이가 먼저 알아챌 거고 그대로 처리하면 되지만.’
준비는 끝이었다.
시현과 태운은 시선을 교환하고 저들이 사라지는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땅을 박찼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둘의 발걸음은 마치 서로의 그림자라도 되는 듯 한 치도 다름없이 닮아 있었다.
***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한 것치곤 생각보다 그들이 움직이는 거리는 꽤 짧았다. 몇 명씩 들어서 움직이길래 따로 이동진이 있는 건가 했더니 그게 아니라 줄줄이 이어져 있는 마차에 용병들을 차곡차곡 쌓는 중이었다.
{이제 대화는 전음으로 할 테니 예, 아니오는 고개를 움직여 간단히 표현할 겁니다. 알아들었습니까?}
나무 위에 올라가 주변을 탐색하던 시현은 저 마치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규민과 유준에게 전음을 날렸다.
당연하게도 둘은 잠시 흠칫하고 놀라는 듯하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신호를 보내 왔다.
시현은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음을 짓고는 이제 마지막 용병까지 마차 안에 채워 넣는 것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마차라…. 생각보다 거리가 있나 본데.’
주변은 슬슬 풀숲과 나무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곧 초원이나 평야가 나올 게 분명했다.
물론 자신과 태운이라면 절대 들킬 일 없이 안전하겠지만 만약 앞에 또다시 제가 모르는 진이 있다면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저 용병들 사이로 일행인 척 들어가서 옮겨진다면 편하게는 가겠지만 안에 잠입했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적진 한가운데라는 게 문제였다.
{태운아. 어떡할까. 그냥 이대로 따라갈까. 마차 안으로 들어갈까.}
{고민하지 마십시오. 어떤 것을 하든, 어떤 방해꾼이 나타나든 스승님은 다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시현은 태운에게 전음을 날렸다가 심장을 빠듯하게 채우는 뜨끈함에 볼을 작게 긁적이며 슬금슬금 시선을 피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할 뿐인 자신도 태운이와 있다 보면 마치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조금 쑥스러웠지만 그래서 더욱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지고, 그 애의 일이라면 자꾸만 과하게 반응하고 보호해 주고 싶어졌다.
순간 일을 빠르게 처리해야겠다는 의욕이 차올랐다.
시현은 이제 슬슬 움직이고 있는 마차의 뒤꽁무니를 흘끔 보고는 태운에게 신호를 보내며 사람들이 차 있는 짐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기사 일행도 무슨 보고를 해야 한다며 다른 방향으로 발을 옮겼기에 그 안으로 파고드는 건 무척이나 쉬웠다.
“으우…. 냄새나….”
마차 안은 용병들의 땀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규민이 잔뜩 울상을 지으며 작게 불만을 속삭였다.
제 딴에는 아주 작게 말한 것일 테지만 시현은 처음 봤을 때부터 변함없이 냄새에 예민한 규민의 불평이 들려오자 이제는 웃음이 나왔다.
“다들 기절한 척 잘하시고요.”
“아…. 저 할 수 있을까요…?
그 와중에 규민이 코를 슬쩍 쥐어 잡으며 슬며시 대답하자 벽 쪽에서 스산하게 내려앉은 음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 하겠다면 직접 기절시켜 주지.”
어쩌다 보니 규민과 유준에게 시현의 양옆을 빼앗겨 벽 쪽으로 밀려 난 태운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규민은 코를 잡고 있던 손을 얌전히 내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무조건 해낸다.’
규민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눈을 꾹 감았다.
마차는 생각보다 꽤 오래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핏 새어 들어오는 빛이 흐려질 정도로 시간이 지나자 그제야 속도가 줄어드는 것 같았다.
“저 안에 대충 털어 넣어. 내일 치 연료다.”
“충분하겠군.”
그리고 마차를 운전하는 자가 누군가와 말을 나누더니 아까와는 달리 크게 덜컹거리는 바퀴의 움직임과 함께 어딘가 안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연료라….
시현은 듣기만 해도 왠지 불쾌한 단어에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덜컥 멈춘 마차의 움직임에 다시 표정을 풀며 전심으로 기절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정해진 인원이 있으니 체크를 하다 걸리거나 그 외의 돌발 상황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손을 슬금슬금 움직여 용병들 사이로 숨긴 검병을 슬쩍 쥐었다.
콰당탕! 털썩, 털푸덕.
그러나 시현의 걱정은 너무 쉽게 해결됐다.
그들은 용병들이 마치 소여물이라도 되는 듯 마차를 대충 들어 올려 사람들을 땅 위로 탈탈 털어 내더니 확인도 안 하고 밖을 나섰기 때문이었다.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무슨 쓰레기 버리듯 던져 놓으니 뭔가 이상하게도 기분이 조금 더러웠다.
“아야야….”
시현이 상체를 들어 올리며 얼굴을 구기자 유준이 등허리를 연신 문지르며 아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굴러떨어지며 다른 용병들의 갑옷에 등을 부딪친 것 같았다.
“괜찮아?”
“으으, 괜찮아요. 지금 나침반 확인했는데 진짜 가까워요. 조금만 움직이면 될 것 같아요.”
유준은 얼굴을 계속 구기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엉거주춤 일어나서 길드원들의 위치 보고를 해 왔다.
저 조그만 아이가 마치 자신의 필요성을 자꾸만 어필하려는 것 같아서 안쓰러웠지만, 시현은 목적지가 곧 앞이라는 말에 벌떡 일어나서 공간 전체를 쓱 둘러봤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커다란 동공이었다. 몇 개의 횃불 말고는 빛조차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지하 특유의 축축한 냄새가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