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행군은 벌써 5일째 아무런 문제 없이 이어졌다.
중간중간 시현이 야영을 돕겠다고 나섰다가 식자재와 물건 몇 개를 버린 것, 태운이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들을 산산조각 내며 일행들과 한층 더 소원해진 것 말고는 그 외에 별다른 트러블은 없었다.
역시나 시현은 말도 안 되게 평화로운 상황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제는 제 감을 의심하지 않았다. 저번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에 오히려 제 감을 의심했다가 호되게 당하지 않았나.
“오늘도 똑같아. 몬스터도 딱히 없고.”
목적이 어찌 됐든 결국 퀘스트가 지시한 대로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가리키는 방향은 한곳이었고, 그렇다면 그곳에 그 왕자라는 놈과 길드원들이 함께 잡혀 있을 확률 또한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 일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시현은 이 퀘스트가 어떠한 원리로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다. 10년간 그렇게 당하면서도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것은 절대 사람을 편하게 두지 않는다는 것.
“어!!! 규민 형! 기운이 하나 사라졌어요!”
“뭐?!”
그때 유준이 습관처럼 확인하던 나침반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안 좋은 소식은 규민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화, 확실한 거야?”
“…예…. 지금 총 9개예요….”
일행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현은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라이프 워치만 손상됐을 가능성은요?”
나침반은 사람의 기운을 탐지하지 않는다. 그저 등록되어 있는 아이템만 표시하는 것이기에 생사에 대해 단정 지을 순 없었다.
시현이 그것을 주지시키자 불안감에 다리를 덜덜 떨어 대던 규민이 그제야 고개를 번뜩 들어 올리며 울상을 지었다.
“…아, 물론 충분히 있습니다. 하아. 죄송합니다. 진짜 정신 제대로 차릴게요.”
다행히 부산스러워지던 분위기는 수습이 되는 듯했으나, 그 기점으로 평화롭게 흘러가던 공기의 흐름은 사라지고 없었다.
시현은 다시 한번 촉박한 시간을 상기시키며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앞의 행렬을 답답하게 바라봤다.
차라리 도시에서 어떻게든 지도를 구해 따로 움직였어야 했나, 제 선택에 후회감이 들 정도였다.
‘조금 더 빨리 움직여 주면 좋을 텐데.’
그들은 아직 해가 떠 있는데도 멈춰 서서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절대 무리하지 않았고, 쉬는 시간조차 여유가 넘쳐나 저절로 긴장이 풀어졌다.
솔직히 조금 과장하자면 이게 소풍을 나온 건지 왕자님을 구하러 간다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래서 행렬의 앞에 몬스터가 아닌 인간들 몇이 숨어 있는 걸 발견하자마자 저들에겐 미안했지만 이런 이벤트가 조금은 반가울 정도였다.
허접하더라도 저런 습격이 긴장감을 부여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부질없는 기대감이었다.
‘산적이려나?’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 하다못해 퀘스트조차도 정말 성의 없이 주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기에 시현의 생각이 그쪽으로 기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나타나고 하루.
산적들로 추정되는 무리와 행렬은 마치 짜 맞춘 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움직이고만 있었다.
처음엔 상황을 보고 기습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그렇게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들이라면 애초에 백 명이 넘는 이들에게 덤빌 생각을 안 했을 것이다.
몸에 딱히 기운이 있는 것도 아니니, 기껏해야 외공을 훈련한 게 다일 테고 계속 붙어 간다는 건 목적이 있다는 것일 텐데 시현은 도대체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 제발 신경 끄자. 나는 할 일만 하면 돼.’
그러나 곧 시현은 사실 조금씩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 제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며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게이트 내부의 일, 제가 관심 가질 필요는 없는 상황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벌써 이 안에 들어온 지 6일이 지났다. 만약 내일까지도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일행들에겐 미안하지만 태운이와 둘이서 행렬을 앞질러 나가 일을 해결해 볼 생각이었다.
규민은 끝까지 자신이 구조에 책임을 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시간은 벌써 절반쯤 날아갔고 이제는 효율을 챙겨야 할 때였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가차 없이 놔두고 일을 우선으로 해결하려 했겠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잠깐!”
그렇게 조금 조급한 마음을 안고 움직이는데 갑자기 진득하면서도 서늘한 기운이 땅속에서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시현은 급하게 손을 들어 올리고선 일행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분명히 사방을 경계하며 조심히 걷고 있었건만.’
뒤늦게 주변을 타고 오르는 낯선 기운에 시현은 빠져나가는 것보다 멈춰 서는 것을 택했다.
이런 류의 함정은 변수가 무척이나 많았기에 제대로 된 분석을 하고 움직이는 게 옳았다.
“진법이다. 다들 조심해.”
“허억. 어, 어떡해요?”
비록 완전히 제가 알던 무림의 진법은 아니었지만, 안쪽과 바깥쪽이 단절되어 있다는 건 확실했다.
시현은 무슨 일이 일어난 줄 모르는 것처럼 별다른 동요 없이 앞을 향해 걷고 있는 기사단의 행렬을 확인하고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성안.’
[생명의 덫(-)- ㅁㅁ과 ㅁㅁ ㅁㅁㅁㅁ]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았지만, 덫이라는 단어가 시현의 신경을 거스르게 했다.
그리고 아무리 덫이라지만 자신이 어느 하나 느끼지 못하고 그 범위 안으로 들어섰다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도대체 왕자를 잡아갔다는 미친놈은 누구길래 내가 감지도 못 할 함정을 이렇게 광범위로 펼쳐 놓은 거지?’
“태운아. 너도 늦게 알았어?”
“…예”
태운은 시현의 물음에 얌전히 대답하고는 티가 나지 않게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태양혈이 위치한 곳을 지그시 눌렀다.
뭐지?
낯선 기운이 피어오르며 공간을 단절시키는 동안 아주 찰나간 작은 통증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자신도 어디서 시작된 건지 알지 못할 정도의 은밀함이었다.
태운의 눈이 점점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게 영향을 끼치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무척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살면서 어떠한 것도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를 남기지 못했다. 제 스승을 빼고는 말이다.
‘그런데 내 방벽을 뚫고 영향을 끼쳤단 말이지.’
태운은 서늘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작게 움켜쥐었다 풀어냈다.
며칠간 시현에게 손도 제대로 못 대고 잠도 같이 못 자고 밥도 단둘이 먹지 못했기에 안 그래도 불만이 목 끝까지 차 있던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저것들을 다 베어 내고 그 길드원들이란 놈들을 잡아 와야겠다 생각을 하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이 행위들에 살벌한 흥미가 돋기 시작했다.
슈우우욱.
그때 다시 한번 이상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현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재빠르게 몸을 돌려 세 명에게 튀어가 몇 군데를 점혈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다들 최대한 호흡하지 마세요. 태운아!”
“예.”
시현과 태운이 세 명의 일행을 가운데에 두고 사방을 경계했다. 독은 아니었지만, 독과 같은 현상을 주는 기운이었다.
한 모금 들이마신 시현은 딱히 살상용은 아니라 여겼지만, 혹시 몰랐기에 재빨리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그때 결계 덕에 조금 가까워진 행렬들에서도 작은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백 명이 넘는 인원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도통 알 수 없는 일투성이었다. 이래서 다들 이 공략을 실패한 건가 조금은 이해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잠시 후.
이상하게도 멀쩡하게 서 있는 기사단 세 명의 뒤로 일정 거리를 둔 채 따라다니던 이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는 기사단과 마치 아는 사이인 것처럼 대화하기 시작하자 시현은 작게 입을 벌린 채 그들의 말을 집중해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게이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글로리 놈들 처리하려면 시간이 촉박해. 빨리 움직이지.”
“쯧. 시간도 조절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씨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제 시현의 혼란스러움은 극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게이트 안의 인간들이라고 여겼던 인물들이 마치 자신들과 같은 헌터라도 되는 것마냥 게이트와 글로리 길드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게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현은 저들이 꺼내 든 나침반을 보며 이 모든 상황을 빠르게 소화해 내야만 했다.
“저 자식들…. 우리랑 같은 곳에서 넘어온 놈들이야.”
그들은 유준이 여태 사용하던 욕심쟁이 나침반과 똑같은 물건을 들며 길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잘 들어요. 지금 저 앞에 있는 기사단 놈들 헌터 같습니다.”
“예…? 서, 설마요. 분명 입구에선 저희 말고는 출입 없다고 했잖아요.”
“저도 그 부분은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저 자식들 분명 글로리 길드원 얘길 했어요.”
순간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아닐 거라고 부정했던 규민의 입이 딱 다물렸다. 그리고 잔뜩 흔들리는 눈으로 시현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쯧.
시현은 작게 혀를 차고는 다시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의 행적을 확인했다.
그러자 분명 평범한 몸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더니 덩치 큰 용병들을 서넛씩 번쩍 들어 올리며 수풀 안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목표는 정해졌군요. 저들이 향하는 곳으로 우리도 가야겠습니다. 미안하지만 여기서부턴….”
“제,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놓고 가지 마세요…! 제발요.”
잠시 망설이던 시현이 태운과 둘이서만 움직이겠다고 말을 하려던 그때, 유준도 어떤 말이 나올지 예상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득달같이 시현의 팔을 붙잡아 오기 시작했다.
“유준아….”
오히려 둘이서만 움직이면 다른 사람들은 힘들일 일 없으니 그저 반가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준은 자신이 마치 귀찮아서 버리고 가는 거라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아, 아니 그냥 앞으로 힘들 것 같아서 잠시 쉬고 있으란 뜻이었어….”
“아뇨. 저, 저도 분명 쓸모가 있을 거예요! 함정이 있으면 나름 간파할 수도 있고!”
시현은 반듯한 눈썹 끝을 조금 늘이면서 볼을 살짝 긁적였다. 괜히 자신이 어렸을 때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몇몇 사장에게 매달렸던 일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왜 하필.’
처음부터 그랬다. 유준을 보면 자꾸만 예전의 제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자신에게도 괜찮은 어른이 옆에 있었다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소망하던 그런 시기였다.
‘그래, 저 앞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모르는데 아직까지는 저 나침반을 볼 사람이 필요해.’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준의 눈을 마주하던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을 바꿔 의견을 물어보기 시작했다.